[성화의 신비(2006)_10. 자기 의를 꺾는 훈련 ② - 베드로]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신자의 모델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런 다윗이 아니라, 밧세바 사건의 실패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그래서 기가 막힐 수렁에서 건져냄을 받아 비로소 반석 위에 선 다윗을 신앙의 모델로서 삼고 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아니라 뜻밖에도 밧세바사건으로 실패한 다윗을 우리 신앙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초점이 되는 훈련이 『자기 의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구원 얻기 전에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에는 죄 짓고 사는 것에 대해서 크게 탓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거룩하신 대로 부름을 받은 성도의 삶에 대한 소원을 가진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것은 분명히 신령한 능력이어야 옳다.
그러나 여러 번 이렇게 언급하는 것과 같이, 실제로 그 기대대로 성공하는 신자는 없다.
■뜻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지 않고, 좌절을 맛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하는 일을 방치하신다는 말이다.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제자들을 청구했으나 주님께서 허락지 않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은 내버려 두셨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고 할 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많은데,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마태복음 26장에서 시시콜콜 다 집어넣었다. 왜 이렇게 다 썼겠는가?
■이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것은 모든 성도의 현주소이다.
우리 모두가 진심을 가지고 베드로 의 이 신앙 고백을 수차례 했을 것이다. '주를 위하여 제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제가 좋아하는 것을 외면하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어떤 희생도 희생과 어떤 부름에도 응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린 가장 사소한 데서 넘어진다. 우린 놀란다.
베드로는 왜 울었는가? 장담하고 갔으나 지켜내지 못하고 숨어서 울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고 세 번째는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했다. '다 주를 버릴지라지라도 내가 주와 함께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는 장담이 있었다.
진심이었다. 그래서 통곡했다. 그 통곡은 왜 나왔는가?
■진심을 지킬 실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진심이 실력은 아니다.
우리는 각오하고 결심하는 것을 너무 부각시킨다. 머리 깎고, 머리띠 매고, 금식하고, 주먹 쥐고 한다.
■진심을 가져도 그 진심을 행할 능력이 없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그 비명이 왜 나오는가? 선을 원하나 죄 아래 늘 사로잡혀 온다.
■다윗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 다윗이 기가 막힐 수렁에서 못 나오는 것이다.
스스로가 '주는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거기에서 나온다. 『우리는 내놓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 하나뿐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영웅이 아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가능한 의미를 알겠는가?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건 우리 진심이다. 그러나 진심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내는 자는 아니다.
알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우리가 아는 것을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는 것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굉장히 중요한 일로서, 이걸 놓치면, 우리는 결심하고, 고백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무속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
■우리 안에는 지식도 없고 능력도 없고 무지하며 부패했다. 그리고 무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신앙 현실이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과 고백을 기쁘게 받아서 우리를 힘 있는 자로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자로 만드시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신들이 진심에 그치지 않고 능력까지도 주님께 의존해야 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진심을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이룰 힘이 없는 것까지 꼬집고 들어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한 고백과 헌신과 열심과 충성들이 늘 물거품이 되고, 아니 그런 고백을 한 자로서 부끄러운, 오히려 순전히 죄인들이 저지르는 실패까지도 가는 현실에 대하여 놀란다.
왜 그런가?
베드로의 이 회복, 즉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무엇을 깨우쳐야 되는가?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훈련시킨 것과 동일한 것을 모든 성도에게 훈련시킨다.
뭘 훈련시키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며, 열심이 아니며,
▶오직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지식과 방향과 방법과 내용과 그 실천과 성취 모든 것을 주님께 의존하여 은혜를 구해야 된다는 것을 확인해야 된다.
▶이것을 다른 표현을 써서 『자기 의를 깨야 된다.』
▶『자기 의』라는 것은 자기 안에 신앙적인 근거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기독 신앙적인 근거, 즉 삶의 진정한 가치와 복됨의 근거는 자기 부인함과 예수를 따르는 거에만 있으며 자기 선택이나 생각 결정 행동은 오히려 장애만 된다는걸 알고 그걸 벗어나는 것이 자기 의를 깨는 거다)
『자기 의』가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하면, 타인에게서 결점과 무능을 보고 경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심한 사람이 보이면 『자기 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한심해 보인다. 왜 한심해 보이는가? "왜 안 해?'이다.
우리가 혹시라도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해?' 라고 생각이 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심하고 경멸스럽다. 답답하고.
그래서 어떤 실수를 하냐 하면 정답을 가르쳐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죄인이라는 말을 아직도 이해 못한다는 뜻이다.
▶베드로의 사도직 회복은, 아니 베드로의 사도직은 처음부터 '다 주를 버릴지라도'라는 그 진심과 충성과 열정 위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무슨 기준 위에서만 허락되는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근거하는 신앙 위에 허락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께 그래서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것도 우리의 진심을 받아서 무슨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우리가 근거가 되고 우리가 이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그리스도만이 이유와 근거가 되는 작업을 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현실 속에서는, 우리가 열심을 내고 고백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실패하는 절망만을 경험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절망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근거로 하여 나갔다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3-10은 우리가 잘 아는 팔복이다. 이 팔복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조건이나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복받은 자의 증상』을 논하는 것이다. 복받은 자의 증상! 이 증상이 나타나면 너는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거다.
▶심령이 가난하면 그것이 복받은 자의 증상, 즉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이고, 하나님,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입니까?'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나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서 내 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는 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겸손하고 겸양하고 온유하고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파산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내 영적 필요와 내 영적 소원에 대하여 내가 가진 것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의 그 비통함을 말한다.
▶신앙의 정당한 과정을 거치면 성도들이 겪는 신앙상의 현실이 어떤 것으로 감각이 되느냐 할 때, 심령이 가난한 것이 절망으로 감각되는 것이 원칙이라는 말이다. 기고만장하지 않는다.
팔복 속에 이런 것도 있다. '의에 죽이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지금 배부르지 않다는 것이다. 갈급하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뜻밖에 승리와 결실보다 이 갈증과 절망과 고민과 몸부림이 더 많다. 왜 그런가? 우리의 신앙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최고의 걸림돌이 『자기 의를 빼는 것』이라서 그렇다.
언제나 '내가 있으므로' 무엇을 하든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나설' 수 있고 ,은혜를 구한다는 말에도 '내가 나설' 수 있다. 겸손이라는 말을 자랑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죄인이 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셔야 되는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의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데도 현실적으로 이걸 놓치고 있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이걸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될지,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를 힘을 주시고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소원케 하신 것을 이루게 하실 은혜를 베푸사 그리스도께서 늘 나를 장악하시고 붙드시고 놓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루 종일 울부짖어야 된다.
▶잠깐 넋을 놓으면 우리는 '자기'에게로 돌아와 있고 '자기 의'와 '자기 기준'과 '자기 자랑' 속에 살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외 없이 실패한다. 신앙은 결국 이 싸움이 가장 큰 싸움이다.
이 울부짖음 이 안타까움 이 죄인된 속성에 대하여 다윗이 뭐라고 했는가?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 그렇다. 너무 울어서 침실이 풀장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이런 고백들이 다윗에게만 일어나고 이런 아픔들이 베드로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에 게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요 겪어야 하는 일이요, 믿음으로 극복하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답을 가져야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해결책을 가지고 알게 된 것을, 믿게 하는 것을 우리에게 결실키 위하여 더 많이 노력해야 된다.
▶더 많이 무릎 꿇어야 된다. 더 많이 은혜를 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죽으셨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모든 신자된 마땅한 반응과 마땅한 충성과 마땅한 승리를 위하여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이 싸움을 우리는 평생 동안 해야 된다.
그것이 신앙의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는 보편적이고 유일한 코스이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남을 가르치는 것보다, 자기를 돌아보며 자기를 올바른 믿음과 ▶은혜 위에 세우는 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잠자는 순간에도 잊지 말고 이 싸움을 하여, 올바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경건과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령한 삶의 복들을 누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