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신비(2006)_12. 성화의 승리]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이 본문은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도 아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또 우리를 기뻐하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아들들로 정하시고 구원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결과까지 갈 것이라고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들은 장로교 교리의 주종을 이루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인정이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강조하는 성경의 내용들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외면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 내용에 있어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부분은 신자가 구원을 얻었고 믿음의 헌신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실패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앙을 행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생활을 잘 하거나 성공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경험하다시피 그러한 증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며 신자에게 있어서 어느만큼의 필요와 믿음의 대상인가를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신앙의 내용 전체》를 증언하고 있지는 않다.
■《신앙의 전체 내용》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 의를 꺾고 하나님만 의존하는 그런 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대하시고 인도하시는 보편적인 내용은 신자 쪽에서 보자면 《좌절과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신앙의 실패》가 의지의 문제라고 싸움을 들어가서는 안 된다. 누구는 결심하고 약속한 것을 이루어냈고 누구는 소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평가이다.
세상에서는 한 개인의 의지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의지의 승리와 의지의 박약함으로 인한 실패를 비난한다. 신앙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는 의지의 승리를 위하여 서 있는 믿음의 영웅들이 없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을 영웅시한 것은 사실 성경이 의도한 것과 달리 우리가 세상 속에서 가지는 인과율에 근거한 것이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근거한,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 사람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세상적 사고방식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모세를 보자. 구약성서의 제일 위대한 인물이 모세라고 했을 때, 모세가 비전을 가지고 주님 앞에 헌신되어 쓰임 받았다는 식으로 갖다 붙이는 성경의 설명은 없다. 모세는 뒷걸음 치고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열심을 받아주시지 않는 데에 대해 놀라 있는 상태 즉 낙심해 있는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요셉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는 요셉을 꿈과 비전의 사나이로 위대한 인물로 자주 언급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게 그리고 있지 않다. 요셉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 놀란다. 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생으로 묶여가고 있다.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서 노예가 되고 종살이하다가 감옥에 가고 그래서 요셉이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당신이 나가면 억울하게 잡혀와 있는 것을 풀어달라는 소원 외에는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요셉이나 모세를 명시해서 신앙 문제를 다룰 때 우리 안에 어떤 거룩한 결심과 그 결심을 추진하는 끈질긴 의지 같은 것들을 신앙의 중요한 근거로 삼고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신앙의 실패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이 성경을 갖다 붙인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은 거룩하려고 했는데 육신이 말을 안 들었다고 한다.
■총체적으로 육신과 마음이 한 통속으로 우리는 거룩한 것을 생산해 내거나 산출해 내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성취를 근거하여 신앙을 평가하지도 않고, 윤리나 도덕성을 가지고 그 신앙을 평가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신앙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이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여러 번 인용하고 강조했듯이 누가 더 많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오직 그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가를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평가해야 옳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어떤 신앙적인 진심이나 열심 같은 것들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치가 있어서 보상으로 무엇을 받는 조건이 되지 않고, 《그것 자체가 내용》이다.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불문하고 오직 하나님께 《나의 전심을 바치는 것 자체가 내용》이지, 그것이 조건이 되어 내가 소원하는 현실적인 보상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느냐 하면,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었다가 폐위를 당해 왕권을 빼앗기는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사건에서 성경은 일찍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이렇게 이미 선언했다. (사무엘상서 15:20-23)
별것 아닌 것 같은 사건에서 순종하지 않았다고 사울 왕이 폐위된다.
왜 순종해야 되는가? 왜 제사보다 순종이 낫는가?
제사는 여기서 우리가 만든 어떤 최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제사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을 것만 있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있지 않다.
우리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은 내 헌신과 열심과 능력이 빚어낸 어떤 곡물이 아니고, 하나님께 붙어 있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심성에 속한 것으로 충만하여 짐으로써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자기의 의》라는 것은 중요한 걸림돌이 된다. 우리는 자꾸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열심으로 자신의 자신을 평가하길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더 진지하게 더 뛰어나게 주님을 섬겨 무엇을 만들어냈느냐가 아니라,
■더 큰 신앙과 더 큰 더 깊은 경지가 있을수록 하나님께 자신을 붙들어 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으로 충만하여졌느냐에 대한 싸움이다.
순종은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어떤 열심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과 순종이 하나님께 나를 붙들어메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는 신성의 충만으로 채워져야 되는, 그래서 《그것 자체가 내용》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본질인 것이다.
이 문제는 다윗이 바세바 사건을 저지르고 시편 51편에 기록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통해서 다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못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칠 것이 있는 것과 우리가 만들어 드려야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남다른 종교적 열심과 종교적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신앙 현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은 좌절과 실패가 더 많다.》
왜 그런가?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주님 앞에 드리는 것으로 조건을 삼아 내가 원하는 보상을 받아내려 하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묶여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본성적으로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고 그다음에 나를 확인하여 하나님께 내가 드린 것만큼 내가 원하는 소원을 받아내는 식의 상거래를 하기 일쑤이다.
그것을 깨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을 아무것도 생산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된다
■우리는 마음의 절망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이고 마음이 비참해지는 것이 정상이다.
《자기의 의》라는 것이 아주 고약한 특성이고,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우리 삶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과 모든 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된다.
■이것을 확인해서 자신에 대해서 절망을 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잠시 잠깐이라도 나를 혼자 두시지 말라'는 고백이 나온다.
■우리는 매 시간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이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놔두면 죄의 본성이 드러나서 우리 각자를 근거한 자랑과 비교와 시샘과 또 그런 결심들을 한다.
열심을 내고 의지를 발동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평하듯이 믿음의 위인들 믿음의 역군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진심을 받으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그러나 그것이 공로가 되고 그것이 방법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신다.
그것을 서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예를 들면 기복신앙이라든가 신비적 체험이라든가 혹은 어떤 신앙적인 행동들에 전체를 끌어모으는 일들 같은 그런 것들은 신앙 훈련의 어떤 유익이 있고 방법으로서 쓸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 훈련의 중심이거나 신앙 내용에 있어서 그것이 중심에 서 있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그것이 전부인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가 계속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은혜가 방임을 낳는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은혜를 논하며 방임을 걱정하는 이유는 혹시 율법적 사고이다.
율법적 사고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결과를 만드는 것이오, 은혜를 강조할 때는 내가 원인이 되지 않고 내가 결과가 되는 원인이 있다고 하여도 내가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이상 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사랑과 믿음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보다 더 심한 훈련과 더 혹독한 인도함을 받는다'고 이 히브리서 12장의 징계를 가지고 확인한다.
시편 105:16-19에서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에서 "그 몸"의 원래 의미는 혼이다. 직역하면 '그 혼이 쇠사슬에 꿰였다'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 혼비백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늘 들었던 요셉에 관한 설교는 대부분 이것이었다. 요셉은 믿음으로 꿈도 꾸고 종으로 팔려갔으나 정직히 살고, 감옥에 갇혔으나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승리한 자라고 들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넋이 빠져 있었다. 자기의 인생 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현실은 하나도 없다. 갈수록 더 험난한 데로, 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기대할 것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비전과 믿음이라는 것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해서 기독교 신앙을 흔들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모세도 물론 그랬다. 시편 90편에 가면 모세의 기도가 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오 신속 기간이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8-10)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신다" 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의기양양했던 모세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의기양양한 때가 언제였는가? 바로의 아들로 이집트 왕자로서 살 때 자기 민족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혈기 왕성해서 쳐 죽일 때를 기준해서 보라. 그는 도망쳐야 했고 하나님을 기다리다 지쳐서 꿈을 접은 지 40년이 지나서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맡겨 출애굽의 기적을 이루었다.
그때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모세가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이야기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믿는 자가 믿음이라는 것을 씨앗으로 해서 전능함이라는 열매를 결실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그것을 안다.
■모든 인간은 죄밖에 지을 줄을 모른다. 하나님 앞에 진노밖에 살 것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만이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베푸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 중에 다시 태어나면 안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질투는 나의 힘, 범죄는 나의 힘이다. 우리는 이것밖에 할 줄 모른다. 우리는 오히려 그 사이사이에 한 번씩 행한 기특한 일에 놀란다. 이것이 정상이다. 후회란 너무 무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지 않았으면 무엇 하나 제대로 했겠는가? 잘할 수 있었을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만드는가? 없는 데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의 본성은 '인간은 할 수 있다!' 라고 여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인류 역사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철저히 나쁜 존재인가를 확인했다.
옛날에는 무식해서 못했지만 이제는 유식해서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배고파서 도둑질을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배불러서 한다. 배부르면 배고파서 하는 도둑질보다 더 나쁘다. 핑계를 댈 수 없기에 훨씬 뻔뻔하게 나온다.
■우리가 고민하고 실패해서 절절 매는 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오, 우리 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개입인 것을 확인케 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느니라"는 《복 받는 증상》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조건이 아니라 《복받은 증거》인 것이다.
■'내 안에 아무것도 없구나..!'가 확인되고 감각되거든 복받는 중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언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쳤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되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야 한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데 누가 놀리거든 가만히 있으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채우시되 신성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 자녀의 구원의 결국인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에까지 가라.
그래서 신자에게 허락된 복을 누리고 그 믿음을 놓지 말고 그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이 말씀과 약속과 소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