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신비(2006)_13. 성령충만 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가지는 소원은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오, 신앙적인 헌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모든 신자의 공통된 소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한 승리도 많이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실패를 맛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받으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뻐하시는 일에 써주시지도 않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발이 묶여서 허우적거리는 대로 놔두시는 현실을 실제로 경험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왜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가?
우리는 실제에서 반복해서 노력하고, 실패하고, 결국은 체념하는 현실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나와서 이야기한 그 사람들이 거의 다이고, 그렇게 안 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은 체념하는 신앙 현실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무관할 것이다.
죄에 대한 승리는 윤리성과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신이 근거가 되는 능력과 결과를 가지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를 꺾는 훈련》을 우리에게 시키신다
다윗, 베드로, 바울 등 성경에 등장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평생에 훈련받았고, 그것이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한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믿음의 내용을 진심과 소원을 가지고 붙잡으면 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근거의 싸움》 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라' 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비장이나 장렬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죽음이다. 자기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우리는 없고, 예수 안에 우리가 있을 뿐이다.
이것을 통해서 모든 성경의 내용들이 풀리고,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가 근거가 되는 것을 꺾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할 말이 없는 인생으로 만들고 계신다. 우리는 이것을 절망으로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이 아닌 것을 무엇으로 증거했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복받은 증상이오, 증거이다.》
세상이 기대하는 종교라는 것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어떤 능력과 가능성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영적인 것이다, 주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남다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와 연관하여 또 하나 봐야 되는 것은, 죄에 대한 승리와 신앙의 승리가 자기 의를 깨는 것으로 승리함을 인도받고 있다는 것과 함께
'왜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성령충만이 그 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충만함으로써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베드로가 되는 것이고,
다들 외치는 신앙상의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과 실패를 만회하고 그 승리를 얻게 해주는, 성도에게 허락된 신적 개입이며 방법이라고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주장하시며 신적 충만의 경지로 약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하시며 간섭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조종하시겠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 전체 사상이 그렇다.
창세기에서부터 인간이 죄를 짓고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를 기계적으로 조종하시려고 하지 않는다. 설득을 하시려고 한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의 영은 설명하러 오시고 납득시키러 오신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들을 설명하고, 그리로 인도하여, 우리도 결국 충만케 하시려고 오신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의 요구인, 본문에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는 이런 말씀을 받았을 때 우리의 반응과 우리의 이해는 '맞다. 이래야 된다.' 라고 반응을 한다.
하지만 이 반응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다 납득한다. 당연히 여기고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고 소원한다. 그런데 왜 안 이루어지는가?
모든 일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것들을 소원하면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보는 이런 내용들은. ▶사실은 그 속에 시간을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빼 놓는다. 왜냐하면 종교는 초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인가 아닌가만 우리에게 관심이 있지, 신자이면서 신자가 완성된다는 시간적 과정과 단계는 생각을 안 한다.
신자라면, 완벽하거나 아니면 꽝이라는 구별만 하지, 신자가 되는 것과 신자가 된 이후에 신자가 완성된다는 개념을 늘 놓친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보면 '난 이제 알았어!' 라고 하는 순간 그냥 어떤 경지로 들어가 버린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 문제만 다루기만 하면 '맞는가, 틀리는가?' '넘어가든가 완전 꽝이든가?' 이분법밖에 없어서 아무런 과정도 훈련도 없이 밤낮 유일한 소원 하나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붙들어 매서 왜 안 주느냐고 매일 시비를 걸고 체념을 하다가, 또 다음 날 '욱!' 해 가지고는 하룻밤 새고 기도하니 하룻밤어치 밖에는 안 는다. 밤을 새고 기도하는 식의 널뛰기를 한다.
에베소서 5장에 가면 ★시간이 얼마나 여기에 중요한 요소로 설명되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5-18)
★시간 개념이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이 설명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연습하여 충만의 경지에 가라는 과정과 단계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을 내가 진심만 갖다 바치면 그 보상으로 신적 경지에 들어가 신적 충만이 허락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성령께서 어느 한 영혼에게 깊이 개입하사 본인이 연습한 것이 아닌 것을 확인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신적 충만의 과정과 단계가 필요한 한 인격과 영혼의 내용과 본질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신적 인도와 주장 분발 확신을 주시는 것으로만 그렇게 하신다. 그런 것들은 다 우리를 분발케 하고 잠자는 자리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찾아오시고 또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고 우리로 인내하게 하시고 충성을 계속하게 하시기는 해도, 신적 충만이 채워지는 내용으로서는 그렇게 단번에 와 주시는 적이 없다.
★이것들은 다 시간이 걸려서 연습하고 훈련하여 되어지는 법이다.
이런 일들은 물론 서신서의의 공통된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내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1-5)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좋은 일 할 때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그만 아닌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것 아닌가?
'무엇은 하지 말고, 무엇은 해라' 이것은 연습하기 위해서만 나열하는 것이지, 성령충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라면,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만이 남고 나머지는 다 없어지는 것인데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는 나열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아는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받지 못한 사람들, 경험하지 못한 99%의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1%가 받은 성령충만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성화의 과정을 대신하는 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진실함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개입과 사랑하사 그 영혼을 위로하시며 확신 주시기 위한 개입이지, 노력하지 않은 것을, 그것을 해답으로 연습해야 될 것을, 안 해도 그 내용을 가지는 것으로는 성령충만을 주시는 적이 없다.
★성령 충만은 연습하고 분별하고 깨어 있고 시간이 걸려서 가는 자리라는 이야기다.
'술취하지 말라'가 무슨 뜻인가? 이는 방탕한 것이다. 방탕하다는 것은 성경에서 낭비하고 허비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탕자의 비유이다. 자기 재산을 달라고 해서 허랑방탕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했는가? 시간을 낭비했다. 자식은 아버지의 밑에서 보고 배우고 양육받고 돌보심 속에 있어야 된다. 그것을 혼자 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술취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술 취하면 어떻게 되는가? 정상적인 생각과 분별을 놓친다. 우리는 때로 술 먹으면 솔직해진다, 담대해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신이 빠진 것이다. 평소 같으면 해서는 안 되는 얘기를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을 미화시켜서 솔직해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가? 성령 충만은 어디로 가라고 하는가?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과 기회들을 무엇하고 있으라는 것인가? 훈련하고 있으라고 한다. 깨어 근신하여 연습하고 훈련해야 한다.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라.
★성령 충만은 연습하고 훈련해서 가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훈련과 연습이라는 것은 단 번에 되는 법이 없다.
훈련과 연습에서 제일 크게 좌절하는 것은, 이것을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실패가 훨씬 많으니까. 연습을 하면 할수록 '나는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가지 못할 자리를 욕심을 내어 이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승리이다. 그 승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한 부활생명을 가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신자의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듯 어찌 선생이 학생이 배울 수 없는 것을 꺼내서 학생들을 좌절시키겠는가?
어찌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문제를 내어, 푸는 놈은 살려주고 못 푸는 놈은 심판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그런 현실을 준비하셨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타락하여 멸망을 자초한 인류에게 개입하셔서 그분의 자녀로 부르고 계신다. 그분의 자녀를 구원하시며 신앙으로 충만케 하사 영광 받으시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각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사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자기의 자녀 삼으시고, 《자녀다운 충만과 영광과 승리》로 이끄시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 완성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1차적인 사명이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다름으로 인한 부수적인 영향이 세상 앞에 우리가 빛이고 소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