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신자의 신앙현실은 뜻밖에도 절망과 실패로 나타난다. 신앙훈련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된 본성을 확인해 자신을 부인하는 일과 하나님으로만 모든 필요와 소원을 가지는 항복으로의 길이다

nazunzaro 2021. 9. 5. 20:13

[성화의 신비(2006)_15. 종말론적인 신앙]

[종말론적인 신앙]

■신자의 신앙 현실은 뜻밖에도 절망과 실패로 나타난다

■ 신자의 신앙 훈련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확인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일과 하나님으로만 모든 필요와 소원을 가지는 항복으로의 길이다

■ 하나님은 그 뜻하심이 다 완성되도록 하시는 그 목적을 위하여 그 일을 다 이루시기 위하여 시간과 과정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신앙의 완성과 그 결국은 신자의 신앙인격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신앙의 중요한 본질은 우리 자신이, 사람됨, 인격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말을 꼭 기억을 해야 한다

■ 진정한 신자들의 현실은 실패이다. 스스로 느끼기에 실패이고 절망이어야 옳다

■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는 자만이 진정한 신자이다

■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십자가가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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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0-11)

우리는 여러 번에 걸쳐서 성화의 신비를 다루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대로. 《신자의 신앙 현실이 뜻밖에 절망과 실패로 나타난다》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우리가 마음에 가지기를 정당한 신앙과 실패한 신앙을 그러면 어떻게 구별하며,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자연스러운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그의 자녀들에게 목적하시는 신앙의 그 내용들을 이 시점에서 제대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신자의 신앙 훈련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확인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일과 하나님으로만 모든 필요와 소원을 가지는 항복으로의 길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종말론적이라는 데서 확인된다."

기독교 신앙에 여러 가지가 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그 하나님 주권의 유일하심이라는 유일신 사상 혹은 은혜 혹은 믿음, 혹은 사랑 이런 여러 가지를 특징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중에 꼭 기억해야 할 특징이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종말론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며, 그것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직 현실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표하신 것이 다 실현되지 않고 약속하신 어느 날 그 최후의 그 시간까지로 미루어져 있고, 그러나 그것이 다만 그냥 어떤 방해나 혹은 하나님 능력의 어떤 부족 때문에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뜻하심이 다 완성되도록 하시는 그 목적을 위하여 그 일을 다 이루시기 위하여 《시간과 과정을 가지고 계신다》 하는 뜻이다.
지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약속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 얘기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 또는 다르게 표현할 때 우리 신자들이 가지는 믿음들은 그 실현, 그 완성을 위하여 《과정과 단계가 있고,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큰 오해는 신앙, 종교라는 것이 갖는 초월성 때문에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답으로 결과 되기를 누구나 바라는 거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간절히 소원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 없이 그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과정을 두고, 그 약속하신 것을 결실하시겠다고 성경이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시간과 과정의 필요는, 하나님 쪽에서 일하시는데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가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이, 그 목적하는 대상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하여 우리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신앙의 완성과 그 결국은 신자의 신앙 인격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을 꼭 기억을 해야 한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이 생기거나 무엇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격이, 성품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인간이라는 한 인격이 그 전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 인격,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어떤 내용과 수준으로 그가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
과정이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고,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실패로 나타나고, 우리가 모든 종교에 대하여 가지는 기대가 그렇듯이 제대로 된 신앙을 진심을 바치면 안 되는 것도 되는 법인데, 왜 나의 신앙은 실패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 때문에 절망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신앙 인격은, 하나님이 우리를 조작하거나 조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발언이며,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전 인격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가지는 신앙은 주문과 다르다. 주문은 그 주문을 외우는 사람의 인격이나 무슨 조건이나 어떤 뭐 기준이나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 주문만 외우면 결과가 나타나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그가 가지는 바, 신앙적 내용이 그의 신앙 인격의 어느 수준이 되어야 그 수준에서 나타나는 결실들이 있고 효력이 있지, 그 수준과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들은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확인하곤 한다.

그래서 신앙적 승리 또는 신앙의 완성이라는 것은, 다만 '법을 지켰느냐, 또는 도덕성을 가졌느냐?' 하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죄를 졌다, 안 졌다' '도덕성이 있다, 없다' 라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과 하나님의 뜻과의 대조이며,
자기를 확인하는 자랑과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는 순종과의 대조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누가 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이고 그의 순종이 그의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참 어렵다. 이거 더 두고 우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오늘 우리 지금 읽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나타나게 하려 한다"고 그런다.
이것은 이제 이 당시 이걸 썼던 바울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외적인 측면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초대교회 로마 사회에서 핍박받는 현실 속에 있었고,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했고 늘 죽음 앞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를 죽이는 세상의 세력 앞에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고 그 위협의 공격 대상으로 늘 죽음 앞에 있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이, 죽음을 감수해야 되는 세상의 죄악된 풍조가, 하나님과 그를 믿는 신앙을 반대하는 세력의 더 큰 것들이, 신앙을 방해하지 못하고,
이 세상이 가지는 반대와, 그 반대하는 세력에 쫓기는 처지로 있는 것이, 세상이 우리를 반대한다는 것과 함께 예수가 왜 죽었느냐를 오히려 증언하는 저들은, 왜 저 죽음을 무릎 쓰고 저걸 믿는가 하는, 생명이 드러나는 일로 쓰임 받는다라고, 지금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내적으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이 일은, 우리 각자가 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신앙의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현실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할 만큼 우리는 완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걸 왜 감수하느냐? 그러면 자폭을 해야 되지 않느냐? '너 ,혀깨물고 죽어야 되지 않느냐?'
그렇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수를 죽인 자들을 위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걸 감수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그 승리가 나에게 결국 결과될 것을 믿어 예수 죽인 것을 짊어 지느니라'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아 이제는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늘 하지만..
■우리가 이런 외적인 공격과 위협 앞에 아직도 노출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이루실 결과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것은 세상이라는 환경과 조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각 성도들의 현실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진정한 신자들의 현실은 실패이다. 스스로 느끼기에 실패이고 절망이어야 옳다.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모든 고수들은 어떤 분야건 어떤 종목이든 모든 고수들은 한계와 공포를 안다.
모든 초자들은 가능성만을 안다. 우리 뭘 얘기를 할까? 공부를 얘기해 볼까? 시험 보고 나서 꼭 공부 못한 것들이 이번에는 시험 잘 봤다는 거다.
공부한 웬수들은 뭐라고? 망했다는 거다. 성적이 발표되면 망한 놈은 96점이고 잘 본 놈은 42점이란 말이다. 그거는 그들에게는 전혀 틀린 얘기 아니다. 96점은 뭐 때문에 망했다고 그러나? 백점을 맞아야 본전인데 하나 틀렸단 말이다. 그러니까 망했단 말이다.
그러나 초자는 이름밖에 못 쓸 줄 알았는데 찍은 게 하나 맞은 것 같다 이거다. 아니나 다를까, 42점이나 나왔다 이거다.

안 그런가? 뭐든지 그렇다. 그 세계적인, 아마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무도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최영의(최배달) 그는 평생 수 없는 격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다른 격투기의 어떤 달인들, 예를 들면 어떤 킥복서 하고, 프랑스의 발차기 기술인 사바트의 명인하고 , 어떤 프로레슬러와 한다든가 또는 어떤 권투선수와 한다든가 하면, 공포에 시달려서 잠을 못 자고 머리가 막 한웅큼씩 빠진다고 한다.
최영의는 25센트짜리 미국 동전을 두 손가락으로 이렇게 휘는 사람이다. 엄지 손가락만으로 물고 나무를 서고, 양손 수도로 맥주병 열두 개의 목을 딴다. 이 사람이 그 격투를 이기고 나서 꼭 후회하는 게 뭐냐면, 너무 강하게 쳐서 상대방을 불구를 만들거나 치명상을 입히고 한 데 대해 후회한다. 왜 그랬나? 무서워서 그랬다는 거다. 무서워서. 자기가 정말 강자라면 이길 만큼만 힘을 써야 되는데 자기도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힘을 써서 그런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그런 고백이 매번의 결투마다 끝에 후렴처럼 따라 나온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스스로 한 고백 속에, '공포를 아는 자만이 진정한 강자다.' 그런 말을 한다.

우리가 신앙이 좋다는 건 뭔지 아는가?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는 자만이 진정한 신자이다.
믿음 안에서 얼마나 우리가 날뛸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강한 믿음이 아니다. 그거는 출발선이 없는 결승라인을 그린 것과 같다. 100m 달리기를 하려면 출발선과 결승라인까지 100m가 있어야 되고, 마라톤을 하려면 출발선과 결승라인까지 42키로 이상의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출발선을 모르고 결승선만 갖고 얘기를 하면 누구나 결승 테이프에 앞에 서서 '빨리 출발 신호 보내시오' 그러면, 뭐만 필요한가? 이미 결승라인 안에 들어와 있으면 사진 기자밖에 필요한 게 없잖은가?
그렇게 해놓고 신앙이 좋다 그러는 것을 성경은 목적하고 있지 않으며 약속하고 있지도 않다.
우리 이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이 한계성은 인간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그래서 은혜를 구하는 자리를 만드는 참으로 은혜로운 하나님의 간섭이다.
이걸 거치지 않고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이걸 확인하지 않고는 감히 신앙을 논할 수가 없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십자가가 그 근거로 서고 중심에 서는데, 십자가란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절망적인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십자가가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 자신의 절망을 모르는 자는 십자가를 저 최태준목사 아들 같이 휘두를 사람이다. 사도신경을 그렇게 외웠다고 그랬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로 맞으사 죽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
그래서 우리는 서두에 한 질문 같이 실패와 절망이 신자의 신앙 현실이라면, 신자된 표인 빛과 소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거는 분명히 더 보다 적극적이고 성공하고 어떤 기준 이상의 승리자로서만 나타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거기에는 특히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저들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한다.
그러니까 착한 행실까지 가야 되는 것 아니냐?
물론 가야 된다.
■그러나 신자의 신자 됨은 도덕적 승리, 윤리적 합격보다도 들보를 깨닫는 회개이다
들보를 깨닫는 회개. 그러니까 이 같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얘기한다.
신앙이 좋다는 건 질그릇이 (금그릇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질 그릇이 깨져 안에 있는 보배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좋은 실천을, 신앙적 실천을 할 때는 그가 가진 신앙이 그를 윤리적 도덕적 경지를 만들어내되, ■노력하고 애써서 능력을 발휘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깨져서 가는 거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가 자라났다고 얘기하기보다 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만이 가실 수 있고 어떤 윤리든 어떤 도덕이든 어떤 신앙의 경지든 그리스도만 가시고, 내가 그 안에서 그 자리에 가는 것이다.
신자가 가지는 신앙상의 어떤 성공적인 모습들은 그가 자신을 부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서만 되어지는 현실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갔다고 느끼지 않는다. 자기는 죽어 예수 안에 묻혔노라고 얘기를 하고, 밖에서는 볼 때 아니라 당신은 여기까지 왔노라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제 책임이 아니다 ^^)

■그래서 우리는 들보를 깨닫는 절망을 자신 안에서 확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고, 그런 차원에서 자기를 죽여, 자존심과 증오와 파멸을 종식시켜, 비로소 빛이고 사랑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다.
뭐가 없어졌을 때? 내가 죽었을 때. 죄 밖에 지을 줄 모르는 내가 죽었을 때.
아까도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에게는 이해가, 나의 죽음만이 경험되고 나에 대한 절망만이 체험되기 때문에,
신자가 이 절망과 이 자신에 대한 포기를 자폭으로 가고 자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자기를 묻기 때문에 옆에서 볼 때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게 참다운 빛과 소금의 자리에 나가는 신앙상의 큰 비밀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거다; '나는 됐는데, 넌 왜 안 돼?'
이런 얘기는 있을 수가 없다.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자기를 포기하는, 그래서 성경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지니라"의 실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급한 결과나 신비한 체험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신앙상의 어떤 경지라는 것, 신앙상의 승리 혹은 신앙의 완성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돼야 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받아내는 것으로는 절대 될 수가 없다.
질 그릇이 깨져야 된다. 질그릇을 도금하지 말라
질 그릇에 네온 사인 붙이지 말라. 질 그릇에 노트북 붙이지 마라. 질 그릇을 깨야 한다.

■뭘로 나타난다고?. 자신에게 절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전인적으로 목적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된 각각을 완성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그를 유용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 써먹으려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써먹으려고 신앙이 좋으라고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의 필요는 잘 보라. 시간이라는 것은 주를 위해서 내가 쓸모 있기를 바라면 시간이 아깝다. 빨리 빨리 완성이 돼야 한다. 그죠?
그러나 우리 자체가 목적이라면 길수록 좋다.
긴 이유는 더 크고 멋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조급한 결과를, 조급한 완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신앙상의 이해가, 빨리 빨리 내가 완성이 되어 주를 위하여 남은 인생이 쓸모 있기를 바라는 데 있다.
따져 보자. 도대체 하나님한테 우리바 왜 쓸모 있어야 되느냐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디 있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지금 아파 누우셔서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내가 못 일어나니까 누구든지 정신 차린 몸 순서대로 와갖고 이일 저일 해라'는 없다.

예를 들어보자. 모세를 보라. 모세가 없으면 출애굽이 안 되는 거다? 그럴 리가 있는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에서 모세를 다룬 부분이 있으니까 거기를 참고하라. 뭐라고 돼 있는가?
출애굽 사건에서 제일 크게 훈련받은 사람은 모세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하며 그 부르심의 사역 속에서 억지로 끌려가서 초반 내내 그가 한 대표적인 말은 이거였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그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훌륭한 모세는 언제 완성이 되느냐 하면 10가지 재앙이 끝나고 홍해 앞에 서서야 비로소 비로소 "너희는 잠잠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라는 우리가 아는 그 훌륭한 모세가 그때에야 나온다.
그 앞에 있었던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출애굽이라는 그 거대한 역사가 모세 하나를 위해서 쓰여졌다고 얘기해도 옳다.
왜 '모세를 봐라.' 그러는가? 모세를 봐라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를 기어코 만드셨다 이렇게 보면 좋다. 모세가 어쨌단 말이야? 모세가 뭐 훌륭하다는 거야, 도대체가?
우리는 이 따위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빨리 나를 불 붙는 산으로 불러주시기를 바란다. 지팽이도 빨리 주고.
지팽이는 나이가 들어야 짚는 거다.

요셉을 보라. 하나님이 요셉을 불러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애굽에 먼저 보내어 준비시킨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데 요셉에게 한 일은 뭐냐 하면 요셉을 훌륭하게 만드는데, 그로 하여금 형제들에게 팔려서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서 수많은 나들 나날들을 고뇌하게 만든다.
■고민하게 그 억울했던 날들로 뭘 배우나? 인생이 얼마나 억울한가를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 배운다.
어떻게 그렇게 감히 얘기를 하냐고? 형들에게 복수를 포기한다. 나중에 그가 그의 형들에게 하나도 섭섭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 긴 시간 동안에 요셉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만들고 계셨다. 요셉은 길고 긴 그 억울한 세월 동안 억울해만 했다. 억울해 하기만 했다. 시편 103편에 나오는, 시편 15편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자면,
혼비백산 했다. 그 몸이 쇠사슬에 묶여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그 일은 그 발이 착고에 묶여 있었던 그 일은, 직역하여 표현하자면, 쇠사슬이 혼을 깬 꿰뚫은 시절들이었다.
그것이 직역을 한 표현이다. 우리나라 말에 아주 적당한 표현이 있다. "혼비백산" 했다. 하나님이 만드실 애굽에서의 총리, 그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그의 가족을 불러들이는 책임을 맡긴 요셉에게 뭘, 그 뭘 훈련시켰다고? 혼비백산하는 훈련만 시켰다.
이게 뭔가? 인생이 이게 뭔가? 이렇게 살아서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인내해야 하는가? 이런 가장 원색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고민을 하게 했다. 그래서 뭐가 된 거인가? 다 타서 재가 됐다. 다 타서 재가..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가지는 신앙상의 기대와 우리가 고백하고 믿는 믿음의 내용들 속에 있는 그 완성들, 멋진 신앙상의 그 완성, 승리, 영광들을 위하여 지금 우리가 제대로 가는 것 같은가? 반대로 가는 거 같지 않은가?

모세도 그렇게 느꼈고, 요셉도 그렇게 느꼈다. 모세는 자기가 히브리인인 줄 알고, 자기 민족을 위하여 들고 일어나 그 관리를 때려 죽일 만큼 열심으로 자기 백성 편을 들었으나, 하나님이 외면하셔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거기서 사십년을 목동으로 지낸다. 바로의 왕자로 커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불붙는 듯한 열정을 가졌는데, 40년을 거기서 그냥 목동으로 양치다가 늙어버려서 팔십 세가 됐다. 뭐가 남았겠는가? 다 재가 됐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너, 내 백성을 구원하러 가라." 모세의 불만은 이거다. '여태껏 뭐 하시다가 이 나이에 와서 부르십니까?' 그 40년이 모세가 볼 때 하나님이 그를 이렇게 위인으로 쓰며 위대한 지도자로 쓰는 것과 연결이 돼 보이더냐 말이다. 그는 매일매일 날마다 신앙이 크는 것이 아니라, 절망하고 절망하고 절망하고 절망하여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없는 나락으로까지 갔을 것이다.
요셉도 그랬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정당한 신자의 길은 이 모세나 요셉의 경우와 같이, "이게 뭔가?" "이게 뭔가?"가 옳다. 백번 옳다. 그래서 기독교를, 기독교의 이 믿음의 내용을 복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복음이다.

'가만히 있어도 좋다' 이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 얘기, 책임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얘기할 건데, 또 죽여버릴거다, 책임을 안 지는 자를.
기본이 이거고 본질이 이거다. 우린 성경 전체에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본다. 그게 성경이고 그 이상 성경은 다른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우리 자신의 신앙과 현실적 모습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믿음은, 우리가 깨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참여해야 된다는 사실이고, 그 작업이 우리에게는 도무지 일 같지가 않고, 진전하는 것 같지가 않고, 약속과 연결되는 것 같지 않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무슨 큰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도 않고 그냥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 거,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뭐가 없어진다. 의욕과 열정이 없어진다. 이거 굉장히 필요한 거다. 의욕과 열정이 없어지는 거.
왜? 우리가 가지는 인간적 의욕과 열정은 필요 없다.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가 순종하라고 그러지 마라. 하나님이 부르시며 시키는 것에 순종하라.
■지금 뭐 하는 해야 되는 때냐? 믿음으로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만드시는가 보라.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며 내용이며 변할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는 약속의 근거인가를 보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다.
우리는 우리의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위로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우리를 사랑하사 죄 지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아는 아버지는 우리를 복 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고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 현실은 도무지 이런 약속들과 기대와 멀어 보인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거나 놓고 계시는 순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을 만들고 계시며,
우리를 우리의 헛된 욕망들과 우리 식의 기대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으로 바꾸고 계신다.
자신을 쳐 복종케 하며, 자신을 깨뜨려 보배가 나와야 하는, 이 자기 의를 깨는 싸움과,
주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고 훈련하시고 가르치시는 일들에 대하여 믿음과 순종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저 성경상의 위인이라 불리는 모세와 요셉이 걸었던 길이오, 저들을 만든 길이오, 저들을 영화롭게 한 길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지금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있는 손길인 줄 아는 믿음으로 확신해야 한다. 아멘//

[15. 종말론적인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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