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서 우리에게 표현되고 확인되는 결실인 것을 책임으로, 순종으로설명된다

nazunzaro 2021. 9. 7. 09:45


[성화의 신비(2006)_16_은혜와 책임]

- 우리가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은혜와 책임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화가 이미 구원에 포함되어 있는 칭의로부터 시작하는 은혜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지금까지 확인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럴 때 우리가 가지는 책임은 어떠하며 은혜를 강조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무 책임도 없는가?》 하는 것이다.
또는 《우리가 책임을 강조할 때에 그것이 은혜를 감소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든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로마서 10장의 말씀들은 얼핏 보면 인간에게 책임과 조건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서 우리에게 표현되고 확인되는 결실인 것을 설명하고 있지, 이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뜻으로 허락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기계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조종하여 구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인격에 간섭하사 구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우리의 《항복》과 《이해》와 《납득》과 《결정》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은혜가 우리 안에 결실하여 나의 인격을 사로잡아 하나님께서 나를 항복시킨 표》이지,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모든 신자는 《인격적으로》 구원을 얻으며, 《인격적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지으셨고》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대우 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에 대하여 《전 인격적인 이해와 결정》을 가지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결정이나 내 책임을 반씩 나누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전 인격에 확인되고 납득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내용과 완성이 우리 자신의 《인격과 현실에 》결과하는 것이므로, 신앙고백은 우리의 의식과 결정과 노력과 실천 등 실존으로 경험되며, 그것을 인간은 책임으로 이해하는 법이다.

요한복음 15장은 유명한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이다. 이 포도나무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께 붙어 있으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가지가 줄기로 가서 붙드는 그런 나무는 없다. 가지는 당연히 줄기에 붙어서 나오는 법이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와 복과 존재와 가치의 내용이고 복이고 주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는 것을 가르치는 대목이지, 붙어 있어야 된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책임과 조건과 상태의 결정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

가지가 줄기를 붙드는 법은 없다. 줄기로부터 가지가 나온다. 줄기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마르고 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 없는 상태와 하나님 안에 있는 상태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지, 결정이나 선택이나 자격이나 조건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당연히 하나님께 붙어 있자고 이야기하고 권하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쉽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신앙의 가장 큰 내용은 순종에 있다》는 것이다.
이 순종은 우리가 의도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서 우리의 조건을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합 하는 자 곧 《신자의 복된 자리와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책임이란 신앙에 있어서 조건이 아니다. 책임은 후원?의 조건도 아니며 거래의 조건도 아니며 보상의 조건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는 신앙적인 책임으로 구원을 얻었다든가, 자신이 행한 신앙적인 책임으로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다든가, 보상을 받는다든가, 복을 받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신앙상의 책임들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복된 자리에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상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으로, 복된 약속으로 그 안에 있게 하사 얻게 된 모든 것을 가르키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거나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와 내용에 관한 것》이다.
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하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책임이다. 그래서 《순종》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가 책임을 지고 순종하면 그것을 얻는 조건과 자격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이해요, 하나님께서 그리로 우리를 몰고 가시는 것을 누리는 것을 우리는 자꾸 책임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은혜인 것이다. 이것은 어렵고 책임으로 이해하는 게 쉽다. 붙어 있읍시다, 잘 믿읍시다, 헌신합시다,는 쉽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렇게 하면 복을 얻고 그렇게 하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복과 승리를 준비하시고 먼저 찾아와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과 순종, 복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내용과 목표에 그 은혜를 이해하고 누리는 자의 상태를 책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설명을 해보면, 책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와 내용에 관한 것이며, 우리의 자격과 노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내용이기에 《그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성경에 책임의 다른 형태를 보면, 예를 들면 계명이나 어떤 명령들을 요구하는 것은 신자의 신앙 내용이나 그 훈련과 실천이 자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근원이시고 하나님께서 내용이시고, 하나님께서 목표이시며,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책임과 계명을 동원하고 있지, 우리가 꺼내놓는 어떤 가치들로 근거나 자격을 삼게 하려고 책임이나 명령을 동원하는 적은 없다.

모든 신앙적인 요구들은 다 하나님께로 되어 있고, 우리의 것을 버리도록 요구받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성경, 곧 하나님으로부터만 거룩한 목표와 내용이 흘러나오고, 우리는 이 은혜를 책임과 계명 또는 명령으로 받들어 순종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인 신자의 신앙 내용을 완성하는 방법에서 책임과 계명으로 요구받는 것이 실천상 더 쉽게 이해되며, 그 이유는 계명이나 명령이 방향과 눈금과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은혜와 책임은 신비로운 조화이다. 우리는 그 은혜를 책임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하등의 잘못이 없다.
그러나 그 책임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누리는 것,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 책임은 올바른 것이지만,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책임으로 인하여 은혜가 유효해지며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자격이 되고 조건이 된다. 그리고 책임이 공로가 되어버린다.

골로새서 1장으로 가보자.
"이로서 우리도 든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9-12)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울이 요구하는 신앙의 내용들인데, 이 모든 것들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성경이 우리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조건과 자격이라면, 우리의 의지나 책임을 격발시키는 또는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10-12)

놀랍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사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신 것을 감사하기를 원하노라'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도 자격과 조건으로서 책임을 묻는 부분은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이 결단코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항복시킨다. 우리를 완성하며 승리하게 한다.

책임은 무엇인가? ■책임은 이 은혜를 납득하고 이 은혜에 항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책임이란 은혜에 대한 납득과 이해와 기쁨으로 소망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과 은혜의 약속들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소망하는 것을 책임이라고 한다. 그것을 유효하게 하거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는 신앙생활의 격려나 명령이나 책임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해하고 납득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과 복주심으로 간섭하시는 은혜에 대한 납득과 항복과 감사와 소원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책임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실천 여부나 반응 여부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신실하심과 작정하심의 영원함과 그 목적과 내용의 비할 데 없는 영광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 일을 중단하시거나 취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에 순종하지 않는 자의 고단함과 허비하는 날들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은 서두에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납득시키시고 항복시키시며 기쁘게 하사 우리로 소원하게 하신다는 것이오,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책임과 격려들과 분발들은 다 소원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는 이런 이해 속에서 스스로의 신앙을 채찍질하며 다른 이들에게 신앙상의 분발을 격려할 수 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언제나 되풀이해서 우리의 운명에 불변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섭하시는 것을 우리의 것으로 채우며 우리의 자랑과 소원과 기쁨이 되도록 하신다.

히브리서 12장에 지금 설명한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

여기서 말하는 징계가 영어 성경에는 'Discipline' 이라고 되어 있다. 훈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내용들과 약속한 복들이 우리의 것으로 채워지며 충만하며 완성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완성되는 일이 우리의 소원이며 기쁨인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허락하신 은혜에 대하여 소원을 가지며 열심을 가지도록 분발시키는 것을 우리는 책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1-13)

열심을 내라는 뜻이다. 노력하라는 뜻이다. 분발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 채찍질하라.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뜻이 아니고, 그래야만 이 일이 유효하거나 시작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신실하신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간섭하심에 대하여 소원을 가지게 되며, 그때 기쁨으로 열심을 품고 분발하게 되고 소원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책임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책임과 계명과 격려의 정당한 위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작정하심 속에서 우리의 자발적인 반응과 기쁨으로 순종을 소원하는 책임을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은혜를 강조한다는 것은 내가 외면하고 있어도, 게을러도, 잊고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은혜에 우리가 참여하여 누리고, 노력하여 채우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복인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래서 소원하는 자리에 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줄을 아는 것. 여기에 우리의 책임의 정당한 위치가 있는 줄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