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열왕기 04 / 열왕기상 8:54-66 / 2021.09.05]
성전을 다 짓고 솔로몬이 온 백성을 모아 성전 봉헌식을 하는 것이다. 기쁜 마음과 감사와 자랑이 온 회중과 솔로몬의 기도에 충만하게 담겨 있다. 놀라운 기도다.
하나님만 섬기고 온 세상에 하나님만이 주인인 것을 알게 하고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던 그동안의 헌신과 그 진심들의 결과물을 보는 그 마음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바른 길, 복받는 길을 살기를 원한다 이렇게 선언한다.
7년 동안이나 지은 아마 세상에서 역사상 가장 호화롭고 정성과 진심의 건축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성전은 무너진다. 솔로몬의 진심과 백성들의 화합이 있는 그 열정과 그 진심에는 일말의 의심이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이 성전은 무너지고 더더욱 크게 나라가 뽑혀서 이민족에게 포로가 된다.
이 글들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간 후손들이 이로부터 약 400년 후에 일어난 현실, 즉 실패와 낙심 불안 분노 속에서 돌아보는 자기들의 선조들과 나라의 역사인 것이다.
특별히 솔로몬에 이 성전 짓는 일은 성경에 너무나 자세히 나와 있다. 모든 것을 백향목과 황금으로 짓고 격식과 외양과 각 부품들이 얼마나 정성 속에서 선별됐고 만들어졌는가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성전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훼파되고 자기네들은 나라를 잃고 쫓겨와 있는 현실에서 돌아본다면, 이런 자세한 내용이 나열되는 것이 기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백성들과 함께 2주간이나 축제를 벌이고 그 온 마음들에 감사와 만족이 있었던 일들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성경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이렇게 이 본문을 돌아본다.
솔로몬은 잘했는데 그 다음 후손들이 잘못해서 이렇게 됐다 그러면 제일 쉽다. 그러나 이제 따져보겠지만 나라가 분열되고 엉망이 되는 단초를 제시한 것은 솔로몬이다. 솔로몬으로 인하여 그 다음 대에 가서 나라가 나뉘고 북이스라엘은 유다 왕조에 등을 돌리고 그리고 자기네끼리 새로 만든 나라의 정체성을 위하여 우상을 도입하게 되고, 그것을 남왕국도 배우게 되고 하는 일들이 말하자면 솔로몬이 그 이유인 것이다.
솔로몬과 당시에 이 기쁨에 참여한 현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진심과 열정으로 이 기쁨을 누리고 있고, 그걸 탓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 ■저들이 진심과 열정을 가진 거기에 큰 결함이 있었다,라고 역사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구약 성경이다.
예레미아 7장에 오면 예레미아라는 선지자는 이제 망하는 시기에, 남왕조와 북왕조는 이미 망했고 남왕조가 망하는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절절한 호소를 했던 선지자이다. 유다 백성들은 당시에 국운이 쇠하였고 국제적으로 위기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라가 망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이 선민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이요 다윗 왕과의 영원성이라는 중요한 약속을 하나님께로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가 망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예레미아 7장에 이 무서운 경고가 나온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렇게 된다.
'여호와의 전'이 뭐가 거짓말일까? 여호와의 전이 여호와의 전이 아닌 걸까? 하나님이 이 전에 아니 계시는 걸까? 무엇이 거짓말일까?
그 후에 이어서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믿지 말라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실로에 행한 일을 기억해 보라." 실로에 행한 일은 사울 왕 때 법궤가 놓여졌고 제사가 진행되던 성읍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사무엘상 4장에 그 사건이 나온다. 블레셋과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이 패한다. '왜 우리가 패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 '그럼 어떡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들게 하실 수 있는가?' '법궤를 모셔오자.' 그래서 법궤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다음 전투에서 더 철저히 패하게 된다.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와 두 아들이 죽는다.
"너희는 실로에 행한 일을 생각해 보라"라고 얘기한다.
■'너희가 성전을 지은 것이 너희 신앙과 너희가 믿는 이 하나님에게 만족스럽고 책임이 끝난 것이냐?' 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이 아니라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대하여 갖는 저들의 감격, 저들의 어떤 자랑이 거짓말이라는 거다.
'그럴리가요?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크게 칭찬을 받은 왕입니다. 어찌 그런 실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성경은 이 부분도 똑같이 지적을 한다. 같은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예레미아 9장 23절에 이렇게 꾸짖는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누구 보고 하는 소리 같은가? 다 솔로몬한테 걸린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그러니까 우리가 아차 싶지 않은가? 솔로몬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들의 진심과 그들의 열심에 하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거나 순진했던 것이다.
■이 무지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그들을 택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하고 그들로 자기의 백성이라 약속하신 분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다.
■이거 굉장히 구약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주제일 것이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이미 애굽에서 기적 속에 꺼낸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이렇게 명하신다:
'백성들에게 가서 꼭 이렇게 전해라. 세계가 다 나의 것이다. 그런데 너희를 그 가운데서 내가 택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면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여기에 다시 '순종'이 등장을 한다.
■우리가 구약을 읽는 데 제일 어려운 주제가 이 '자유와 순종의 문제'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종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는, 그가 모든 정성을 받쳐 아니 온 국민이 모든 정성을 바쳐 지은 성전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내용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다는 지적을 이렇게 역사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순종한다,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하는 얘기는 도처에 나온다. 특별히 이제 소선지서들에 가면 더 많이 나오는데, 소선지서들은 대부분 다 북왕조의 멸망기와 남왕국 유다의 멸망기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호세아의 선언은 이거다: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를 원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렇게 나온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당시에 솔로몬과 이스라엘이 아니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가장 크게는 `권력`이라고 생각한 거 같다. 하나님이 자기네 편을 들게 하기 위하여 제사와 법들을 지키면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신앙을 가졌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언제나 편을 드시지만,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 그들을 부른 하나님은 더 큰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매번 그들을 괴롭게 하신다. 어려움에 처하게 하시고 다시 생각게 하신다.
사사기가 그랬고 열왕기가 그랬고, 회복된 후에 바벨론 포로 후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랬고, 예수님 오신 이후에 로마에 의하여 성전이 다시 파괴되고, 아직까지 그렇다.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매우 놀라워서 요한복음 17장에 가면 `하나님을 아는 문제`는 이렇게 돼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그러니까 지금 솔로몬에게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 정성으로 황금으로 지은 성전이었다. 그건 힘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겠다는, 그리고 `그것이 영광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죽는 거다.`
구약 내내 뭐라 그러냐 하면 "나는 인애를 원한다.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너희가 정의를 행하기를 원한다."
■정의, 인애, 이런 단어들이 우리 다 아는 것 같지만 우리가 뭘 속느냐 하면, 이런 것들이 도덕과 명분상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을 한다.
도덕과 명분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을 하는데 불과하면 그것이 공포가 된다.
도덕이 공포가 되고, 종교가 공포가 되는 것은 그것을 지킬 수가 없으면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수 밖에 다른, 자신을 변호할 방법이 없다.
개신교 이천년 교회 역사에서 제일 험했던 일이 뭐냐 하면 마녀사냥이었다.
■은혜를 베풀고, 관용을 베풀고, 회복과 용서를 가지지 못하는 한, 명분은 모두를 싹 죽이고 보복하는 일에 쓰였지, 덕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가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성전을 지었다' 그러고 나면, 꼭 돌아봐서 '넌 뭐 했어?' 이렇게 된다.
우리 많은 얘기를 이렇게 했다; "오늘 죽어도 눈을 뜨면 천국일 것을 믿는다."
또 하나 있다; "너 나중에 예수님 앞에 서서 '너 세상에 살 때 뭐 하다 왔어?' 그러면? '저는 의사 하다 왔습니다.' "밤낮 주사나 놓다 왔어?" 이렇게 꾸짖고 뭐라 그랬나? "선교사로 나가야지" 그랬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은 오셨을 때 모두가 뭘 바랬나? 그의 권능을 보고 그가 왕이 되라고 그랬다. 권력을 잡아 하나님의 뜻을 힘으로 이루라 그랬고, 예수님은 '사탄아!' 라고 물리치셨고 친히 우리들의 손에 죽는다.
뭘 하시자는 건가? 하나님의 영광은 용서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기다리는 데 있다. 그렇게 말한다.
무엇을 만들려고 할까?
우리 자신이 사랑과 용서와 회복을 가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권세를 갖거나 능력이 있기를 전혀 바라지 않으신다.
코로나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모일 수도 없고 뭐.. 왜?
자기자신일 수 없는 법은 없다. 늘 자기는 자기자신이고, 자기자신이 되는 일은 외부에서는 전혀 방해를 할 수도, 도울 수도 없다.
■우리가 얼마만큼 신자 다워지느냐 하는 것은 다른 모든 방법이 필요 없이 우리 스스로가 되는 수밖에 없다.
하나 더 가보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가 가진 권세는 폭력도, 무슨 능력도 아니고 십자가였다.
뭘 하시려고? 영생을 주려고. 그렇게 받은 생명이다.
'그가 죽어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주신 거야.'
이렇게 신파조로 읽으라고 준 게 아니다.
이 영생을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보이라는 거다.
우리가 죽어야 된다. 우리가 죽어야 된다고. 져주어야 된다.
그게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누구라고 아는가? 누구라고 아는 건가?
예수와 십자가가 왜 폭력이 되나? 왜 그게 권력이 되나? 그러니까 안타깝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그럼 제가 다 할게요.' 여기서부터 빗나간다.
정의는 어떻게 요구가 되는가? 정의는 꼭 이걸로 설명이 된다: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라"
고아원 짓자, 요양원 짓자는 물론 아니다. 구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무력한 자를 인간 대접하라" 그러는 말이다.
우리 이거 언제나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웃은 언제나 있다. 가족이 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한 인격으로, 어떤 존재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그의 백성으로 삼으려는 대상으로 보라는 하나님을 아는 이 마음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늘 핑계가 생긴다: '예수 잘 믿고 싶은데 안 돼요..'
해 본 적이 없잖은가?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한테 선언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이게 다 우리이다.
"성전 짓기에 수고하고, 종교적인 어떤 어떤 지위와 보상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상대방을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강제하려 하지 않는다. 우월하려 그러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아니다.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경쟁과 우월감과 경멸과 비난과 저주와 보복과 분노에서 우리를 격리해내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 그게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다. 외적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당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당신은 못한다." 이런 말은 우리에게 사용되지 않는다. 교육적으로만 사용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부르신다. 아직 아브라함이 아무런 실력이 없을 때 시작이 이 약속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백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게 우리이다. 그게 우리라고. 아브라함이 무엇을 내서 그에게 어떤 권력과 어떤 지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께 복 받는 자,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자로 부름을 받는다.
이 땅의 모든 족속이, 모든 사람들이 차별화를 해서 확인을 하고, 누구를 비난해서 확인을 하고 하는 데서 벗어나,
우리는 누구든지 만나면 그 사람이 존귀한 존재라고, 내가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우리를 계속 훈련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건 명분이 아니다. 우리 존재론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신 길이고, 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길이다.
매일 해야 된다. 왜? 매일 누군가를 만나니까.
매일 시험과 유혹 앞에 있으니까. 거기서 우리가 신자가 돼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뭐였나?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이 코로나 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까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과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용서하는 자가 되고, 복을 나누는 자가 되고,
회복시켜 주는 자가 되고, 기다려 주는 자가 되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그리 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신 것처럼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건 아무에게도 핑계댈 수 없고,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주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서, 오늘부터는, 지금부터는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훈련하고, 연습하고, 기도하여, 승리하고 감사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