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신비(2006)_17. 의욕과 책임]
구원을 은혜로 받듯이, 성화와 신앙의 완성이 은혜인 것을 집중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확인해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정리해야 될 문제로는, 그러면 의욕과 책임이 어떤 가치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 남는다.
은혜를 강조하면 예외 없이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 쪽의 책임도 없어지고 의욕도 없어지는 그런 식의 오해를 당연히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장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는 분명히 우리의 신앙적 완성을 위하여 책임을 묻고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 고 해서, 의욕이 필요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는 내용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내용'이 되어야 하고, '인격적 본질'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 혼자 우리를 조정하시거나 조작 하시는 차원에서 은혜를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격과 존재'가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시며 채우시는 것'을 우리는 책임으로, 의욕으로 이해한다고 이미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의욕과 책임론'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둘 사이의 조화와 질서와 종합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신앙이 훌륭하다 또는 신앙적으로 성공했다는 표현을 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목표하시고 또는 격려하시는 표현들로서 우리가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과 자신의 신앙을 우열의 개념에서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신앙적인 성취를 '죄로부터의 회복'에 초점을 두지, 내가 어떻게 내 의지와 각성 등에 근거하여 성취했는가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나 다름을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무엇을 이루셨는가'로 이해를 한다.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0장이다 70인 사건의 보고 내용이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씀이야말로 분명하게 우리에게 일어난 신앙의 성취나 신앙상의 어떤 드러남이 그 내용에 관한 것이지, 우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임을 여기 밝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도 확인하다시피 위인과 영웅을 조명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칭송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쉽게 믿음의 영웅이라고 치부하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
그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채워진, 하나님만이 받으실, 또 주실 수 있는 그 영광의 내용들을 그의 인격과 생애에 가지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두어, 죄인 된 인간을 부르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복의 완성에 이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은혜의 영광에 초점을 둔다.
우리가 성경상에, 예를 들면 모세라, 엘리야라, 다니엘이라, 이런 위인들을 쉽게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경지에 갔는가는 설명이 성경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종을 세워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결실하도록 그를 장악하셨는가에 초점이 있다.
그러니까 저들이 얼마나 쓸모가 있었는가, 저들은 어떻게 남과 다른 특별한 재능의 사람인가에는 초점이 없다.
그런 것은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와서, '이제 우리 민족이 죽게 되었는데 네가 왕비이니 왕께 이야기하여 이 재난을 면하도록 하라' 하면서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안 해도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 이거다.
그러니까 누가 영웅이 있어서, 위인이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 안 될게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덜 될게 더 된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선민의식과 그 우월감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이렇게 꾸짖었던 것을 기억해야 된다: "회개하라 천국에이 가까웠느니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은 선민이요 복 받아야 되는데 왜 이런 현실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말하자면 일침을 가하며 저들이 오해하고 있고 잘못된 신앙상의 현실을 고발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속으로 넣디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으리라'이다. (마태복음 3장)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특별하고 달라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그랬나?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다니엘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는가 할 때, 다니엘이 남달라서 하나님께서 사용했다는 식으로 교훈을 추출해내려고 하는데, 성경은 결단코 그런 초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니엘이 이방 나라에 잡혀갔으나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신앙을 목숨걸고 지켰다'라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내시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종으로서 그가 서 있는 것이지, 그가 있음으로써 안 될 일이 됐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하는 성경의 위인들은 그들의 유용성, 능력으로 성경이 묘사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그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는 일 때문에 쓰임받는 자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하여 그런 신앙적인 내용에 있어서 그 경지에 가도록 하나님 앞에 붙잡혔다고 이해해야만 한다.
물론 순종과 책임을 가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런 일을 강권적으로 해서 다 한다,라고 해서 우리의 책임을 전혀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요한복음 15장에서와 같이 이런 식으로 말씀 한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이런 말씀은 다 우리의 《순종》과 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신앙상의 그 《은총》을 구하여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래야 우리 각 개인이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과 자녀로서의 완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열매에 관한 싸움인 것이다.
더 많이 쓰임을 받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하나님의 기적을 누리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에 관한 이야기지, 자칫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신 것이 우리의 반응 여하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것으로 생각하는 식의 책임에 관한 그런 우리의 두려움은 없어야 된다 그런 이야기이다.
우리가 모세나 엘리아나 다니엘 같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듯이 현실 속에서도 쓰임 받는 사람들, 또 신앙상으로 정말 귀감이 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의 부러움이 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누가복음 17장에 의하면 이렇게 조심하라고 되어 있다:
"너희 중에 네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7-10)
참 무서운 말씀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오, 하나님이 할 수 있게 능력 주셔서 행한 것, 그러니까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열매는 그게 뭐냐 하면,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결실된 열매인데, 이 가지가 한 거는 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지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지는 나무에서부터 가지가 나가지, 가지가 점점 점점 쳐들어와서 줄기에 붙는 그런 가지는 없다. 애벌레라면 모를까? 나무 뿌리로부터 그 나무가 만들어낸 열매가 매달리기를 가지에 매달린 것 아닌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거기에 달리는 거다.
지금 이 종에 관한 이야기도, 네가 유능하고 특별해서 주인이 못할 것을 도운 것이 아니라, 주인이 시킨 것, 여기서 시킨 것이라는 것은 권위 이전에 하나님의 지혜, 경지, 이것까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시선을 넘어서는 그거를 주인이 시켰고 주인이 이루게 해서 수종든 것뿐인데, 주인의 손발이 된 건데, 손발이 자기가 본체라고 그럴 수 있느냐?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책임을 논할 때 우리가 마음에 가지는 이 자랑을 제거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책임들은 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또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그 은총과 영광을 누리는 소원으로서 《책임과 의욕》이 동원되어야지, 자랑이 되거나 자랑이 되면 뭐가 되나?
근거가 되고, 근거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복된 약속들이 나로 인하여 하나님과 내가 대등하게 그 운명을 결정하는 자가 되고, 그러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미련하게, 어리석게 자랑하거나 또는 어리석게 좌절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성경에서의 이 은혜는 너무나 필수적인 우리의 신앙상의 내용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책임과 의욕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 그의 지혜, 그의 계획, 그의 신실하심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목표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것임을 믿고, 그것이 우리의 복이오, 영광인 줄 아는 믿음으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책임과 경계와 소원과 의욕을 낳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책임이나 우리의 의욕들은 다 이런, 하나님께만 있는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사 우리에게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모든 은총의 복들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신앙적인 훈련을 하거나 신앙적인 열심을 부리는 것은 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뜻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식의 우리 자신의 처지를 확인한 자의 소원이오 간절함으로 하나님만이 답이며, 그분만이 우리의 복인 것을 아는 신앙의 몸부림이며 항복이며 진정한 믿음의 행동이 된다.
그래서 이것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책임을 권하고 은혜를 약속하고 그 둘 사이의 조화를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힘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1:6-7)
소원하고 순종해야 된다. 그렇게 안 하면 하나님이 버린다는 뜻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목표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는 지금 초점이 '된다, 안 된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구원과 허락하신 믿음의 내용이고, 완성의 경지인 탓이다.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이 믿음의 궁극적인 도착지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믿음으로 채찍질하며, 믿음으로 채우기 위하여 소원하고, 그러기 위하여 책임과 의욕과 열심과 혹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든 일들이 신앙인 것이다. 그것 자체가.
그렇게 하여 무슨 보상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목표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게을리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목표하신 것을 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꾸중과 자책을 또는 경계와 권고를 받으며 심하면 얼마든지 더 괴로운 시련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한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책임과 순종 이것 자체가 믿음이고, 그것이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요, 복이다. 책임과 순종은 그 자체가 믿음이고 복이고, 그건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에게 복이시다.
그래서 모든 시편의 고백, 모든 성경의 고백은 하나님을 이런 복과 묶어서 표현을 한다. 예를 들면 시편 18편이다. 시편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표현을 기억해 두자:
"나의 힘이 되신 여호하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뿌리시오, 나의 산성이로다" (시 18:1-2)
성경 안에 이런 표현이 얼마든지 있다:
'여호와는 나의 상급이시며,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며,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뿌리시며, 나를 높이시는 자요..'
'복을 주시는 자요, 나를 높이시는 자요, 지키시는 자요..' 라는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오, 상급이오, 방패요, 산성이라 이렇게 나온다.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내용이 뭐냐하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기뻐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과 다른 무엇과 바꾸지 않으며.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자라고 생각을 할 때, 그 복이 물질화되고, 신앙행위가 이 전능하신 신에게 만족을 드려서 내가 소원하는 세상적인 복을 받아내는 대상으로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다. 걸핏하면 그리로 넘어간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복이고 상급이고 소원이고 믿음이고 우리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는 그런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남과 다른 영광을 취하는 것으로는 써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