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부모의 마음은 오로지 자식이 잘되기만 한다면 나는 망해도 좋다는거다. 이 부모의 마음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로 늘 말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nazunzaro 2021. 9. 9. 23:11

[제자훈련 3-06 / 부모 마음, 자식 마음 / 1995.11.08]

- 부모의 마음은, 오직 자식이 잘 되기만 한다면 나는 망해도 좋다는 거다.
-이 부모의 마음이 성경에서는 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독교 신앙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 부모의 마음, 첫째 가장 중요한 원칙, 자식이 잘 되는 것이라면 나는 망해도 좋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가져야 된다.
- 자식의 마음은 부모가 하는 얘기는 무조건 옳다고 믿는 거다. 순종하는 마음이다.
- 자식 된 마음은, 부모님이 내 편을 든다는 걸 알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순종!
- 이해가 가고 안 가는 건 이차적인 문제이다. 이해가 가서 행복하느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 부모님은 내 편이다,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 이게 우리가 이웃간에 있어서도 서로 간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식된 마음이다.
- 상대방이 부모가 돼야 되고, 내가 자식이 돼야 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내가 부모가 되고 상대방이 자식이 돼야 될 때가 있다.
- 교인들끼리도, 직장 동료끼리도 어떤 부분에서는 한 분이 부모의 마음이 되고 반대 분이 자식의 마음이 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거꾸로 되고가 있다. 물론 대등한 전우가 되는 때가 더 많지마는, 어떤 일은 누가 부모의 마음이고 누가 자식의 마음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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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2:14-15)

부모의 마음은, 오직 자식이 잘 되기만 한다면 나는 망해도 좋다는 거다.

이 부모의 마음이 성경에서는 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독교 신앙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부모의 마음, 첫째 가장 중요한 원칙, 자식이 잘 되는 것이라면 나는 망해도 좋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가져야 된다.

자식의 마음은 뭔가?
자식의 마음은 부모가 하는 얘기는 무조건 옳다고 믿는 거다. 순종하는 마음이다.

자식 된 마음은, 부모님이 내 편을 든다는 걸 알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순종!
이해가 가고 안 가는 건 이차적인 문제이다. 이해가 가서 행복하느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 부모님은 내 편이다,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가 이웃간에 있어서도 서로 간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식된 마음이다.

상대방이 부모가 돼야 되고, 내가 자식이 돼야 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내가 부모가 되고 상대방이 자식이 돼야 될 때가 있다.

교인들끼리도, 직장 동료끼리도 어떤 부분에서는 한 분이 부모의 마음이 되고 반대 분이 자식의 마음이 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거꾸로 되고,가 있다
물론 대등한 전우가 되는 때가 더 많지마는,
어떤 일은 누가 부모의 마음이고 누가 자식의 마음이 되는 거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사도 바울의 편지 내용 속에 제일 큰 몫을 차지했던 것이, 어떤 자가 참 하나님의 종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능력과 실력이 있는 것이 다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증명을 해 보였고, 누가 더 유익하며,누가 더 오래 참으며,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충성된가, 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예를 들고 설명을 해 왔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렇게 푸는 셈입니다.

교회 앞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목자는 교우들 앞에 설 때 [부모의 마음으로 선다]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선다는 것은 어떤 부모든지 그 자식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참 사도인 가장 중요한 증거요, 참 사도가 누구냐를 우리가 판단할 때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도 바울이 자신이 참 사도인 것을 고린도 교회에 설명한 이 문제를 가지고, 이제 오늘 현실 속에서 우리 교우들과 함께 생각하려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부모와 자식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며 어떻게 적용해야 되느냐 하는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또 여러 가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 문제로 인한 여러 가지 답을 얻고자 합니다.

우선 생각할 것은 이겁니다. 언제나 목사가 부모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목사만 어른이고, 교인들은 그럼 다 언제나 그 자녀냐?
권위와 무슨 지혜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그러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둬야 합니다.
목사가 늘 어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영적 양식을 먹이는 차원에서만 그렇습니다.
설교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푸는 이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목사가 부모의 입장 혹은 또 선생의 입장, 이런 자리에 섭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에는 오히려 교우들이 목사에 대하여 부모의 입장으로 서야 하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력 있는 목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우들이 그 목사의 부모의 마음으로 그 목사가 큰 사람이 되도록 부모의 마음으로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 차원으로 가면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목사를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죠.
자식을 목사 만든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정예배 볼 때 자식이지만 목사 된 자식에게 설교를 부탁하고, 그러나 그 자기 자식이 목사로서 더 충실해지고 더 크기 위하여 부모된 마음으로 여러 가지 후원과 기도하며 기다려주며 충고하며 하는 일들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교회 안에서의 필요한 신앙생활에 어떤 원칙들을 하는 것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큰 잘못은, 이 설교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목사가 모든 문제에서 권위를 남용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의외로 교회 안에서 목사가 갖는 권위가 어느 부분이고, 어느 부분은 아닌가?
서로가 어느 부분에서는 부모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자식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전혀 전혀 그것이 뭐 상대방에게 무례한 것도 아니고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런 말을 좀 잘 못하는 분위기 속에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데는 끼어들고, 해야 되는데 못 하고, 이런 그 문제가 있죠.

그래서 우린 이제 이런 원칙을 세우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부모의 자리를 갖는 것은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목사가 꼭 어른이 아닐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는 그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과 그 말씀을 적용하는 부분으로 나눕니다.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느냐? 이 약을 단 번에 먹이느냐? 물에 타서 세 번에 나눠 먹이느냐? 그건 그때마다 처방이 다른 것입니다.
그 부분 처방하는 부분을 목사는 나이가 들어야 배웁니다. 그러니까 젊은 목사는 이걸 잘 못합니다.
그래서 젊은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시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설명을 잘하는데,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이 경직된, 직선적 선포를 하기 일쑤입니다,
그건 어느 정도 경륜이 쌓이고 인생의 경험이 생겨야 그거를 제대로 적용하며,
교우들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있을 만큼 그걸 이렇게 제조 기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성도 여러분들이 오히려 부모가 돼야 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 그게 옳지만 그 일을 이렇게 하십시다, 저렇게 하십시다' 라는 방법과 적용에 대하여
교우 여러분들이 부모로서 관여를 해야 될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목사는 그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교회 안에서, 만인제사장주의인 것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그렇지 않은 신자들보다 위에 있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았다고 해서 그가 꼭 누구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맡은 것일 뿐인 겁니다.
★서로 간의 겸손과 서로 간의 책임을 나누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런 부분을 다뤄야 됩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때야 하며, 자식의 마음은 어때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부모가 돼야 되고 제가 자식이 돼야 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제가 부모가 되고 여러분이 자식이 돼야 될 때가 있고,
교인들끼리도 어떤 부분에서는 한 분이 부모가 되고 반대 분이 자식이 되고,
어떤 면에서 그게 거꾸로 되고,가 교회 안에는 꼭 있어요,
물론 대등한 전우가 되는 때가 더 많습니다마는 어떤 일은 누가 부모이고 누가 자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뭡니까? 부모의 마음은 우월감이 아닙니다. 부모의 마음.
★[부모의 마음은 오직 자식이 잘 되기만 한다면 나는 망해도 좋답니다.]

★[이 부모의 마음이 성경에서는 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신앙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 부모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자랑하는 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뭐, 물론 자식한테 '야, 너 왜 이렇게 못하냐? 난 옛날에 공부 잘했다.' 이건 재는 게 아니죠.
분발시키는 거죠. 그래서 뭐 하도 공부를 못하니까 여기서 이렇게 욕을 하던데요. '넌 왜 공부하고 싸우냐? 넌 공부하고 라이벌 관계냐?' 뭐 그러던데요.
자식을 그렇게 꾸짖는 것은 그를 체념하라든가, 주눅들게 하거나, 그가 바보라는 걸 인식시키자는 게 아니라 분발하라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말이죠, 듣는 사람이 금방 압니다. 이 분이 지금 부모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서 하는 것인지, 잘난 척 하는 건지, 사람들이 금방 압니다.
이거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 첫째 가장 중요한 원칙; 자식이 잘 되는 것이라면 나는 망해도 좋다.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이란 있을 수 없고, 경멸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심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이겁니다.
어느 부분에 대해서 상대방의 약점과 못난 것이 여러분 눈에 띄었거든, 그가 자식이고 여러분이 부모인 것이지, 여러분은 잘 낫고 그는 못 낫고, 여러분은 옳고 그는 틀린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단 문제가 아닌 이상은, 진리 문제가 아닌 이상은.

이해하시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가지실 것. 어떤 마음? ★자식이 잘 되는 것을 위해서라면 내가 망해도 좋다는 마음]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잘못된 일에 대해 포기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포기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될 때까지, 될 때까지, 여러분의 모든 열심을 동원합니다.
세 번 해보고, 30번 해보고, 300번 해 보고가 아닙니다, 자식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보상을 원치 않습니다. 보상을 원치 않습니다.
자식 앞에서 재는 부모는 없습니다. '나 때문에 자식이 저만큼 됐다' 그러는 부모는 없습니다.

여러분,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수석 합격한 학생 인터뷰와 부모들이 나오면, 잘 되는 집은 그러죠. 부모는 다 자식 덕으로 돌리고, 자식은 다 부모 덕으로 돌리고. 그렇죠?
안 되는 집은 다 가면 부모는 자식 탓이라고, 자식은 부모 탓이라는 거 아네요? 안 그래요? 그건 서로가 자기 역할을 모르는 것이죠

자식에겐 부모가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났고 내가 잘했기 때문에 자식이 잘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우리는 이렇게 해서 잘 됐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는 사실은 되게 웃기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했더니 잘 됐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도 말이죠, '아, 난 우리 애는 이렇게 했더니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던데.' 이러는 부모 봤어요? 안 그래요?

잘 되는 집일수록 다 옆에서 '아휴, 그 집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되세요? 애들도 어쩌고 그렇게 말을 잘 듣고. 부모님이 역시 다르신가 보죠?'
'아니에요, 우리 애들도 속썩여요. 제가 나으면 얼마나 낫겠어요?' 이러는 것이지,
'우리는 기도하고 큰 일이 생길 때 금식하고 손잡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여러분, 구역에 모이시거든 제가 여러 번 경고한 건데, 이거 조심하세요; 구역에서는 누구나 조심스럽게 마음을 여는 법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척 여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자기의 고민이나 약점을 펼치면 누구나 그걸 밟고 지나갔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여는 게 오래 걸립니다.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었는데, 그 마음 열 때는 보통 자기의 고민거리 큰 약점을 먼저 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꺼내는 적이 많습니다; ‘아, 저는 그렇게 시어머니하고 관계가 어렵습니다.’
근데 이렇게 톡 쏘는 사람이 하나 생겨요, '아니 왜 시어머니하고 문제가 생기죠? 도대체 이해가 안 가네요? 저는 무슨 일이 있으면 기도해요. 그러면 이렇게 일이 생길까 그러다가도 이렇게 봄눈 녹듯이 녹아요.’
그러면 여러분 모두가 은혜를 받고, ‘아, 집사님, 그렇군요.. 우리도 이제부터 다 모여서 기도합시다.’ 그래요?
다음부터는 ‘저도 기도하고 가지오.’ 그러고는 다시는 마음을 안 열고, 다시는 얘기 안 하지, ‘저 사람은 신앙이 좋구나..’라고 안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 사람이 변하고 쉽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근데 그걸 누가 가장 많이 속는다고요? 실수하고? 목사가 그래요. 교인들이 왜 많이 오고, 사람들이 왜 그 목사님을 높이는지, 사실은 목사 된 제 입장에서 보면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이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고, 저 교회는 덜 모이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덜 모이는 쪽이 훨씬 실력 있고, 목사님이, 인격도 훌륭하고 이쪽이 아니올씨다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는 뭐 좀 예외입니다마는. ^^ 아닌 말고. ^^ 아시겠어요?

근 데 그걸, 남들이 성공했다, 잘한다 그러면, '목회 성공담' 이런 걸 한단 말이야요, 아이, 미치겠어요, 이거는. 그런 법이 어딨어요?
여러분, 애가 대학 수석합격했는데, 애 부모가 '자녀교육 성공담' 이런 거 책 써내면 여러분 항복이 되세요? ,어쩌다 애 하나 똑똑한 거 얻은 거 가지고 지가 뭐 모든 일 하는 것 같이 그러면 되겠어요?
‘왜 당신은 애를 그렇게 낳아서 그렇게 키웠냐? 근데 우리 애를 봐라’ 그럼 되겠어요? 그 어머니도 여기서 얼마나 죽을 맛이겠어요? 이런 걸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도 서로 그런다 말이죠.

목사가 그러는 것과 똑같이, 교인들의 실수는 어디에 있느냐? 책에 무슨 은혜를 입었거나, 신앙상에 무슨 하나의 답을 찾았다고 여기면, 그때부터 돌아다니면서 남의 집에서 왜 싸우냐는 거에요? 왜 어머니 노릇 그렇게 하고, 왜 자식 노릇 그렇게 하고, 돌아가면서 이 시비를 걸어요?

그건 아니에요. 여러분이 남들의 약점이 눈에 보이거든 여러분은 '부모의 마음'을 가지셔야 돼요. 부모의 마음. 선생의 마음을 갖지 마시고. 가정교사가 되거나 무슨 법관이 되지 마시고, 부모의 마음이 되세요.

남의 집 자식한테, 남의 집 부모한테 가서 얘기하니까 막말 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식, 자기 부모의 얘기면 그렇게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 약점을 들출 수가 없잖아요? ‘우리 어머닌 이래요.’ ‘우리 자식은 이래요.’라고 어떻게 얘기해요?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의 마음]은 뭡니까, 그럼?
★[자식의 마음은 부모가 하는 얘기는 무조건 옳다고 믿는 겁니다.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못난 자식은 다 뭐라 그러죠? 이해가 안 간다는 거 아니에요. 그건 엄마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는 거 아니에요?

지난 번에 자녀들에 대해서 제가 많이 뭐라 그러는 설교를 한 번 했더니, 부모님들이 다 은혜를 받았데요. 우리나라에서 은혜를 받았다는 건 자기 편을 들어줬다는 표현이에요. 뭐, 은혜는 무슨 개뿔이나 은혜?
그래서 집에 가서, 자식들이 이제 많이 감동을 받았으리라 여기고, ‘어때?’ 그랬더니, 자녀들이 한결같이 그러더래요, ‘그건 목사님 생각이고.’

★사람은 말이죠, 항복하지 않아요. 항복하는 데는 성령의 감화와 인생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이 한 번 딱 째려 봐서 변하는 건 없어요. 그리고 무슨 웅변을 한 번 토한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아요. 기적을 한 번 목격한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래 걸려서 변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부모가 자식을 다루듯 하세요. 우리가 될 때까지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섭하시는 건 기적이나 능력이나 열심이나 다 부족하잖아요? 그것 플러스 시간이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놀랍게, 우리를 사랑하는가를 아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그의 기다리심이에요. 그의 포기하지 않는 간섭이에요.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그런 걸 매시간, 매일, 매년 해서, 몇 십년을 그렇게 해서, 우리 하나를 만들어 내세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시는 부모된 마음으로의 사랑과 간섭과 그 배려와 인도와 그 결론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 자식 된 마음은, 부모님이 내 편을 든다는 걸 알아요. 순종하는 마음. 순종!
이해가 가고 안 가는 건 이차적인 문제에요. 이해가 가서 행복하느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 부모님은 내 편이다,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이게 서로 간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식된 마음이에요

그때마다 다르다 그랬죠. 그때마다. 제가 부모가 될 때가 있고, 여러분이 부모가 될 때가 있어요. 뒤집어서 얘기하면 제가 자식이 될 때가 있고, 여러분이 자식이 될 때가 있어요.

부모 된 마음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가 망해도 좋다. 그, 부모된 마음이어야 하듯이,
자식은 ★[부모님이 나한테 해 주시는 것은 나를 위해 하는 거지, 부모님이 자기 위신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니다. 자기 이익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그래서 순종입니다.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결국 뭐와 연결이 되냐?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이건 일맥상통 해요.

부모가 자기를 위하여 자식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잘 되는 거라면 내가 망해도 좋다’ 라는 것이 자식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마음이라면,
자식의 최고의 소원은, 자식 된 최고의 소원은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거라면 난 뭐든지 한다.’ 이것이란 말이죠.
서로 빗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의 마음이.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소모품으로 쓰지 않듯이. 이건 하나의 경고에요, 부모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 자식을 소모품으로 쓰는 것. 자식을 키워서 영광을 받겠다든가, 자식을 키워서 보상을 받겠다든가, 자식을 키워서 이름을 내겠다든가, 자식을 키워서 어떤 뭐, 내가 필요한 일을 써먹겠다는. 자식을 소모품으로 써먹을 수 없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목사가 교회 앞에 가장 큰 범죄가 뭐냐 그러면, 진리를 잘못 가르치는 거에요.
그러나 좀 더 포괄적으로 얘기하면, 교회나 교인을 통하여 그들을 소모품으로 해서 자기 이름을 날리려는 것. 가장 큰 범죄입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목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교회가 잘 됐다, 어느 교회가 큰 일을 했다 하면 그 영광이 대표적으로 목사에게 돌아오는 법입니다. 그걸 위하여 교인들을 채찍질 하면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목사가 오거든 그 교회에 나가지 마세요.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위에 붙어 있으니까 그런 엉터리가 통하는 거예요. 딱 보고 아니면 그 교회 나가시면 안 돼요. 이놈의 목사는 우리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명해지려고 우리를 써먹는다. 우리를 짜내는 것이다,를 알면 안 가야 되는 겁니다. 붙어 있지 못하게 해야죠.

그러나 하여튼 그건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의 문제지만, 자신이 부모의 입장에 섰을 때는 꼭 이걸 해야 돼요.
상대방을 자식을 소모품으로 쓰지 않는다.
언젠가도 얘기했죠? 누구에게 내가 충고를 하고, 누구에게 내가 경고를 하고 누구에게 내가 도와줘야 될 때가 있어요.
도와주고 와서 이렇게 얘기하지 말라고요; "아니 누가 글쎄, 그게 나보고 이렇게 얘기하길래, 내가 '이봐 정신 차려. 그게 아니고 이거야. 30년씩이나 예수 믿고도 그것도 몰라?' 그러고 왔어 내가."
이건 죽여야 돼요. 이게 무슨 얘기야. 그러니까 그렇게 30년씩이나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이거 하나 모르더라고. 이건 안 돼요.

여러분, 어디 가서 "아니, 우리 애 새끼가 이게 대학교 들어갔는데도 아직도 이것도 모른다 그래서 '너 뭐 하는 거야?' 내가 그러고 왔어." 그래요?
부모끼리 만나서 안 그런다고요. 창피해요. 잘못한 걸 안다면 놀라고.
속으로, 아, 내가 왜 이걸 미리 안 가르쳤을까? 우리 애가 아직 이것도 모른단 말인가.. 하면서 쉬쉬하고 감추고, 그것이 밖으로 실패가 나타나지 않도록 얼른 고쳐 놓죠. '너 다신 그러지 마라. 그러는 거 아니다.' 안 그러겠어요?

부모된 마음이 가져야 하는 것, 자식을 소모품으로 쓰지 않는다.
마찬가지에요. 자식된 자가 가장 경계해야 될 문제;
★자신이 가진 어떤 결과도 그 공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 부모에게 돌린다. 자기가 아무리 뛰어나고, 부모는 영 아니올시다이고 도와준 것이 없고, 나 혼자 백프로 다 해서 이 자리에 왔을지라도, 그건 다 부모 덕입니다.

왜 성경이 이것을 요구하느냐?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받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공격했던 가장 굵은 지적이었던 거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부모는 우리에게 사실은 다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부모에게 받고,
부모의 사랑과 부모의 인도와 보호를 백프로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식은 부모로부터 그걸 받도록 돼 있고, 그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보호하심과 복주심과 생명과 진리와 모든 인도와 보호 속에 있는 어떤 모습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 앞에 순종할 것과 그 공을 돌릴 것과 그 앞에 무릎 꿇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 전후서를 통하여 자신이 참된 종인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핵심적으로 가장 간결하게 증명한 것일 겁니다; "내가 부모다, 너희가 내 자식이다. 내가 너희에게 뭘 바랄 것 같으냐? 내가 너희에게 보상을 바라고 너희로 인하여 무슨 이익을 보자고 할 것 같으냐?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는 거 봤느냐? 부모가 준비하는 법이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된 셈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가장 크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경우엔 부모,요 어떤 경우엔 자녀입니다
그때 이 원칙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부모된 책임, 자녀된 책임,]

우리들이 제대로 한다면 서로 부모들이라 그럴 필요 없죠.
그것이 무슨 높이의 싸움, 권위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경쟁이 일어나죠.
받아만 먹고, 책임은 안 지겠다고 하는 자식의 싸움만 할 수도 있습니다. 난 일 안 하겠다..

[부모의 책임, 자식의 책임,] 부모가 실패해서는 안 되는 부분, 자녀가 실수해서는 안 되는 부분, 이것을 지켜 나간다면,
우리는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그 보호와 사랑과 능력으로 간섭하시는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끝없이 커갈 것입니다. 무궁무진하게 충만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변화와 우리의 의와 거룩의 진전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들 앞에 생명의 열매와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를 바라는 일들에 우리는 누구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이 맡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셔서,
그때마다 여러분이 져야 하는 짐, 이 원칙대로 자기 짐을 져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 허락하신 복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이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인도하심 속에 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그 결과가 얼마나 놀라운지,
실제로 다 경험하시는 여러분들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사, 부모로. 부모의 마음으로,
그리고 온전하심과 무궁하신 사랑과 전능하신 능력으로 지키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이제 우리 인생 속에서 맡은 조그마한 책임 속에서 부모의 책임, 자식의 책임, 감당하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어떤 일에나 시기와 경쟁으로 할 것이 아니요, 감사와 순종과 만족하는 마음으로,
주의 자녀된 직분을 감당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며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우리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널리 널리 전파되는 일에,
주님 앞에 충성된 종이라 지칭받는 기뻐하심을 입는 자랑스러운 자녀들이 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