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의 옳음은 늘 남을 비평할 수밖에 없다. ​죄는 하나의 세력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다. 죄를 벗어날 실력과 자격이 없다. 누군가 와서 구해줘야 하는 것이다. 누구의 은혜, 용서,해방이

nazunzaro 2021. 9. 11. 11:55

[산상수훈 27 / 마 7:28-29 / 2010.11.07]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내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로라"
(마 7:28-29)

예수님께서 이 산상 설교를 마치자 그 들은 무리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참 놀랍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르다. 권위가 있다.' 그렇게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 산상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의 중요한 본질이 비교되고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대표적인 그 본질을 '은혜와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은혜와 사랑이 바리새인들의 의와 비교될 때 자칫
도덕과 법과 대척점에 있는 것 같이 이해돼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의 중요한 결함은 그 도덕성과 법의 문제가 아니고,
그 정신과 그 내용을 성취할 수 없는 데 있다.

가장 중요한 지적이 같은 마태복음 23장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여며 오수를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지적의 핵심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알고 있지만 실천은 없다 그런 뜻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본인들이 이룰 수가 없다' 그런 뜻이다.
도덕이나 법이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이 얘기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그것이 도덕이나 법의 적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경험하듯이 도덕이나 법이나 굉장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밖에는
사용되지 못한다.
그것은 최소한의 사회 질서를 위하여 강제력을 가지고 요구된다.
도덕을 논할지라도 그것이 명분으로는 모두의 공감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 불가능하냐 하면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자신과 남에게 나눌 만큼의 실력이 죄인 된 인간에게는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의의 치명적 결함이 무엇이냐 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행사할 때 그 옳음의 행사가 자신을 기만하거나 위장할 수밖에 없으며,
■또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으로밖에 그 도덕과 법을 사용할 다른 실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현실 속에서 쉽게 이 사실을 목도하는데,
우리 어느 곳에서나 최소한의 질서를 위하여 법을 얘기하고 도덕을 얘기할 수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질서를 위하여 최소한의 윤리가 요구된다.
은혜를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한다고 해서 도덕과 법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법에 생명과 내용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예수밖에 없다, 그런 뜻으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진 명분과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들먹일 때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으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으로 가지 못하는 부분을 간과한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저지르는 실수이다.
최소한의 어떤 질서가 필요할 때 어떤 수준이 필요할 때 우리가 윤리를 얘기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보라.
"당신 왜 그래? 응?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왜 해?"라고 얘기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마치 지키고 있는 자 같고, 상대방은 틀려서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누고 있다
할 수 있는 자가 할 수 없는 자를 비난함으로써만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할 방법은 일반 자연인의 경우에는 없다.

■어떻게 옳은데 입을 다물고 있단 말인가? 옳은데 입 다물고 있으면 무식한 자나 방관한 자가 되는 것뿐이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웃고 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개선의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옳음은 늘 남을 비평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잘못을 들춰서만 자기의 옳음이 증거된다는 것은 사실, 사실 치사하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공부 잘해 갖고 와서 "야 너 왜 하나 틀렸냐?
"여보, 옆집에 누구는 다 틀렸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우리도 알다시피 치사하다.
우리 공부 잘하면, 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이해하는 건데, 시험 문제가 쉽게 나오는 것이 싫다.
치사하다. 우리가 부자이면 물가가 싼 것이 싫다.
■우리의 자기 확인은 참으로 비열하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누가 틀리면 불편하다.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들이 싫다.
그러니까 그를 비난할 뿐 아니라 정죄한다. 뭐라고 정죄하는가? "너는 왜 태어났니?" 이거다.
본질로 들어가면 그거다. "넌 왜 태어났니?
좋아, 내가 한 발 양보하마. 너 태어난 거 내가 인정하겠는데, 너 이민가라" 이거다.
우리는 몰아 낸다. 그것 밖에는 우리는 도덕을, 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이 옳고 그른 자격 논쟁이나 유용성에 관한 능력 문제와 다른, 다른 본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신약 성경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복음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언제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일단 능력으로 소개된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설명된, 대표된 이 인간의 의는,
■하나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는 옳은 것을 혹 알 수는 있으나, 옳은 것을 행할 능력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죄인인 까닭이다. 죄 아래 붙잡혀 있다.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일차적으로 은혜로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사랑으로 강조하는 것은
죄의 반대 말이 은혜이고 사랑인 탓이다.
죄 자체와 그냥 이해를 위해서 반대되는 단어를 고르라면 선이나 의가 맞다.
그러나 죄의 반대말을 은혜나 사랑으로 놓는 이유는
죄가 하나의 규칙이거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세력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의 세력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다.

우리가 의를 행하려면, 참다운 의인이 되려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이 되어야만 한다.
죄로부터의 구원 때문에 은혜가 그 반대편에 선다.
그 구원에 왜 은혜가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느냐?
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구원을 위하여 왜 은혜가 필요하냐?
■죄를 벗어날 실력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와서 구해줘야 하는 것이다. 누구의 은혜, 누구의 용서, 누구의 해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죄의 반대말을 은혜라고 얘기하는 여기에는 도덕이 필요 없다, 혼란과 무질서가 상관없다, 싸우지 말자, 라는 얘기가 아니다.
진정한 도덕을 지키려면, 진정한 법을 지키려면, 그 내용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우리는 은혜부터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읽은 로마서 1장 16절의 능력이라는 표현과 11절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그 설명은,
■그래서 결국 한 인간이 가지는 의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범위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것으로만
사랑이 가능하다 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자랑이 있는 것이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치, 의미, 승리보다 큰,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의 속성과 성품과 능력과 거룩함으로의 부름이 거기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심에 있어, 당신의 의를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올바른 내용과 올바른 규범을 가지고도 결국은 이루어낼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사랑으로 대조시키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이것이 요한복음 15장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여기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계명, 어떤, 어떤 이상, 규칙, 개념이 의의 조건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나의 계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자의 속성과 성품과 능력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 무인격적인 개념이 강조되고 있지 않고, 어떤 규칙과 규율로써, 법으로써 우리의 의에 조건이 있지 않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내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내가(예수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방법이다.
■그를 따르고, 그의 통치에 나를 순종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 요구는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13절에 나오듯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얘기한다.

이 계명의 요구는 하나님과 우리 간에 '권력자와 복종자'라는 구별을 낳는 요구가 아니고
친구의 관계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사랑의 요구라고 한다.
친구란 그렇다. 친구란 대등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친구이기 때문에 요구한다고 한다. 사랑은.
■이 사랑으로 요구하는 대등함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왜냐하면 사랑의 반대말은 우리가 알듯이 증오가 아니다. 외면도 아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아마 동정이거나 굴종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려는 의,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데, 우리가 여태껏 살펴본 바와 같이,
법과 윤리가 우리는 자기 증명을 위하여 누구를 해치는 것으로밖에 쓸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예수 안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며, 가치 있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데,
법과 도덕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더 큰 이유로 오신다는 거다.

도덕이란 최소한의 가치가 있어야 되고, 법이란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 되는 거다.
옳고 그른 조건을 묻는다든가, 가치가 있다 없다에 조건을 묻는 것이 법과 도덕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그 자격과 가치보다 큰 다른 조건을 갖고 오시는데,
그 조건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격과 가치로는 받을 수 없는 어떤 복을, 어떤 영광을, 어떤 명예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 조건과 이유가 뭔가 봤더니, 그것은 법적 조건과 도덕의 조건보다 훨씬 큰,
그것으로는 관계할 수 없는 관계로써만 성립하는 조건으로서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를 그런 관계의 대상으로서 대접하시더라는 거다.

여기에, 말하자면 당시 무리들이 반응한, "이 가르침은 다르다. 예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다"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드러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깊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요구하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되는 내용인데, 우리가 늘 간과하고 있다.

출애굽기 32:30에 가면 당시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애굽을 이제 탈출하여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해방되어 이제 시내산에 이르렀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동안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어서 범죄했던 그 당시이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러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용서를 받아낸다. 이 모세의 기도의 핵심이 뭔가?
'하나님, 원래 이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저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약속하셨을 때​
자격과 가치를 보고 한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이때 《사랑》을 도덕과 대척점에 놓지 말란 말이다.
도덕을 도덕되게 하고, 법을 법되게 하는 진정한 본질이요 생명이다. 사랑이.
■사랑이 빠지면 도덕과 법은 사람 잡는 것 외에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이 얘기를 하는 거다.

'하나님, 만일 이 백성을 버리시려면 저도 버리십시오.
저도 하나님 마음에 들 자격을 만들 실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하신다.
구약에만 있느냐? 신약에도 있다. 신약성경 로마서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뭘 원하는 거냐 하면, 바울은 유대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
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가 나중에 회심하고 이제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뜻밖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어서 이방에 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다.
마음에 늘 자기 동족, 자기 민족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일에 대하여 마음이 아프다.
이 고백을 한다. "내 혈육, 내 골육과 친척을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라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져도 좋다."

그런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아시겠는가?
구원받아 천국 가기 바쁜 우리에게 "나, 지옥 가도 좋다. 대신에 내 가족 구원시켜달라" 이렇게 기도하는 꼴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나타난 것 아닌가?
"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여, 나를 사망에 내려보내 주시옵소서"
그게 성육신과 십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자리에 당신을 낮추어 찾아오셔서
사망의 자리까지,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다.

도덕과 윤리에 대하여, 또는 법에 대하여 우리가 '은혜가 우선한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이유를 이해해야 된다.
●기독교 신앙은 당연히 도덕성을 가진다. 당연히 법보다 더 큰 기준과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의로워지고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먼저이듯이,
도덕과 법을 먼저 알고 나중에 은혜를 아는 순서를 가진다는 걸 기억하여,
이 은혜가 진정한 결실을 하며, 모든 각자의 영혼과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그 결실하는 것을 기다리는, 기다리는 사랑을 가져야 된다

■산상 설교 내내 신자의 신앙의 본질을 이것으로 설명했다. 이해와 용서라고.
이해와 용서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니다. 내 실력으로 윤리적일 수 없고, 법을 지킬 수 없는, 그 현실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여, 우리 모두가 동일한 형편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신자들의 중요한 실천적 그 이해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실천과 이웃에 대한 이해가 보다 너그러워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웃어야 한다.
어느 때 사람이 시퍼러둥둥해지는가 보라. 옳을 때 그렇다. 어떻게 옳을 때? 틀린 사람 잡아서 옳은 것을 확보할 때. 그때 시피러둥둥 해져서..

20세기에 제일 많이 자행된 세계 역사의 현실이 뭐냐? 지나간 20세기에 무슨 역사적 우리가 현실을 경험했느냐? 이념 투쟁 때 사람은 가장 인간성을 상실하더라를 배웠다. '옳은 사회 만들자 옳은 세상 만들자' 그럴 때. 그게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때 제일 많이 사람을 죽였다.

지금도 우리 한국 사회에도 이념 투쟁이 있는데, 이념을 탓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념 투쟁을 하면 사람이 또 친척도 못 알아보고, 부모 자식과도 연을 끊고,
울어야 할 때도 안 울고,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념에 사로잡혀 인간성이 말살이 된다. 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신앙도 잘못 가면, 이 결사 각오가, 순교가, 시퍼러둥둥을 만든다. 멋대가리 없는 인간을 만든다. 시도 때도 없이 고함 지르고, 눈 감고, 혼자 우는, 이상한 괴물을 만든다.

■웃어야 된다. 웃는다는 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히죽히죽 웃으면 진정성이 떨어지고..

잘 생각해 보라. 신앙이 좋다는 것은, 지금 그의 실력이 없는 것을 넘어가 주는 거다. 누가 손 들고 막 옳은 소리 하면, 씨익 웃는 거다. "거, 목소리 좋구만.. 알았어.." 이렇게 어른 노릇을 하라.
하나님이 그의 생애 속에서 그를 만들어오고 다듬어오고 제대로 된 된 실력과 생명과 참다운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기다려 주라. 들어 주라.
서로 언성을 높이고 얼굴 시뻘개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 실천에는 없다. "너 두고 봐. 너 지옥 가" 이 말은 안 하게 되어 있다. 안하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 다만 옳으면 다가 아닌 것을 기억하라. 내가 사람을 잡고 있나를, 내가 참다운 인간성을 신앙으로 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우리의 신앙과 신자된 현실이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에게 기뻐야 한다. 넉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렇지 못하다. 우린 조급하고 분내고 억울해 한다. 우린 아직도 성육신을, 십자가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시며, "내 계명을 지키라" 초청하사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신다.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신다.
그 기쁨을 주시옵소서.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과 성품과 삶을 알게 하사, 우리 인생의 기적을 알게 하옵소서.
그 신비를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만나는 이들과 내가 사는 세상에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줄을 우리 이웃들로 하여금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