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다 죽을 것 같은 일들이 뒤집어져서 기적을,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걸 만들더라 이게 부활, 부활신앙이다. 부끄러운 역할이냐, 명예로운 역할을 맡을건가? 이게 늘 우리의 선택에 놓여있다

nazunzaro 2021. 9. 16. 23:53

​[ 예레미야 29 / 2021.09.15 ]​

- 그들이 악역을 맡은 것이 저들에게 복이 되게 하겠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 그 모든 것이 다 죽을 것 같은 일들이 오히려 뒤집어져서 기적을,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걸 만들더라. 이게 부활 신앙이다. 그게 부활이다.

-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목적을 변경시킬 수 없다. 이렇게 눈물 흘리고 한 숨 쉬어야 하는 일들이 이렇게 많은가? 그게 최고의 과정이라고 얘기하는 거다. 우리는 그게 싫다는 거다

- 사람이 생각을 안 하면, 고민을 안 하면 그럼 뭐가 될 것 같은가? 소만도 못하고, 돼지만도 못하고, 개만도 못할 것 아닌가? 생각을 해 보라. 돼지는 먹을 거나 있지, 우린 뭘 했을까?

- 우리가 생각을 하고 우리가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고 울고 불고 하는 것들은 도대체 우리가 어떤 지위, 어떤 신분이기에 그런 것들이 허락되느냐?

- 유토피아 그 나라는 살 곳이 못 된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고 개성이 없는 곳은 인간이 살 수가 없다.

-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우리와 동등한 모습으로, 우리 손에 죽으러 오신 하나님이다. 이게 기독교다.

- 우리가 세상에서 오해를 받고 박해를 받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차별이, 예수 믿는 어떤 우월한 보상이나 증명이 안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무슨 불만인가? 예수가 그렇게 오셨는데?
우리는 그걸 못 참는 거다. 이기게 해 달라이다. 그건 예수를 믿는 게 아닌 거다.
제대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 받은 자의 그 진정한 세계관, 역사관, 종말관, 현실관이 다 무너져버렸다. 기독교가 그걸 놓치면 아무것도 아니다

- 그 모든 것이 다 죽을 것 같은 게 오히려 뒤집어져서 기적을,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걸 만들더라, 이게 부활신앙이다. 그게 부활이다

- 그러면 이제 생각해야 한다. 부끄러운 역할을 맡을 것인가, 명예로운 역할을 맡을 것인가? 이 문제가 언제나 우리의 선택에 놓여 있다

- 우리가 잘못하면 지옥 간다라든가, 잘못하면 벌 받는다, 이렇게 간단한 얘기 아니라, 잘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가 그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기회이다.
- 단번에 완벽하고? 그다음에 평안하고 아무 일도 없는? 그건 다 구라다. 일흔 번씩 일곱 번. 그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점점, 실패할 때마다 크는 거다. '다음엔 내가 한 번 더 잘할 거야. 이것보다 낫게 할 거야.' 그게 인생이다

-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한 걸음 더》이다. 그 믿음의 현실성, 구체성 그리고 절대성, 아무도 그 믿음을 부러뜨리거나 꺾을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요 권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하루하루의 복됨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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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6:13-26)
"13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14 너희는 애굽에 선포하며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굳건히 서서 준비하라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15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16 그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며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17 그들이 그 곳에서 부르짖기를 1)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18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르시되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 같이, 해변의 갈멜 같이 오리라
19 애굽에 사는 딸이여 너는 너를 위하여 포로의 짐을 꾸리라 놉이 황무하며 불에 타서 주민이 없을 것임이라
20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일지라도 북으로부터 쇠파리 떼가 줄곧 오리라
21 또 그 중의 고용꾼은 살진 수송아지 같아서 돌이켜 함께 도망하고 서지 못하였나니 재난의 날이 이르렀고 벌 받는 때가 왔음이라
22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26 내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이전 같이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6장 13절 말씀부터 26절 말씀을 읽어 보면 재미없고 약간 지루하지만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다. 애굽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예레미야 끝 부분에 오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변 나라들, 대표적으로 이 애굽은 아주 전통 있는 당시의 제국이고 늘 이스라엘에게는 적대적인 세력이었는데 그 애굽이 망할 것을,
그다음 47장에가면 블레셋의 멸망을, 모압의 멸망을, 그다음에 넘어가면 암몬의 심판, 에도의 심판까지 쭉 여러 나라들의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멸망과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

이런 심판에 관한 예언들은 이사야에도 나오고 소선지서에도 나온다. 우리는 생각 없이 읽으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나라들을 다 심판하시리라 이렇게 쉽게 읽어내곤 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훨씬 그 뜻이 오묘하다. 지금 예레미야의 주된 예언 사역은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다. 유다의 멸망은 유다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갱생시키려고 하시는 징계이다.
저들이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를 외면하는 대로 갈 수는 없다. 그들을 벌하여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내리는 심판 속에, 연장 선상에서 애굽의 심판, 블레셋의 심판, 모압의 심판, 암몬의 심판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사야서에서나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듯이 26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이전같이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애굽이 느브갓네살의 바벨론에 의해서 치명적인 공격과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회복되어 사람 살 곳이 되리라라고 얘기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이해를 돕느냐 하면,
■이 심판이 주어지는 것은 없애버리는, 망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돌이킬 기회와 역사를 허락하셨다 이렇게 읽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부터 그 중생의 기억이,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다가 죄인인 줄 알게 되는 중생의 기쁨과 통회자복의 변곡점, 변환점 같은 것들이 그 이전과 이후를 이렇게 나눈 것 같이, 예수를 믿고 나면 '나는 믿었고 넌 안 믿는다'가 확연한 이분법으로 자기 확인의 방법이 된다.
내가 예전에는 죄인이었는데 몰랐고, 이제는 예수 안에서 내 죄가 사하여진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라는 둘의 대비같이,
그 과거와 지금을 대비하는 것 같이,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은 큰 선지자들의 사역을 볼지라도 이런 것들이,
약속한 자기네 백성을 위하여 그 반대편에 선 적국들에게 심판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 편을 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그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불가피한, 혹은 더 깊은 하나님의 개입이듯이, 역사이듯이,
그들의 적국이 되어 마치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보면 적국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한 나라들에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명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멸망과 헛된 것으로 끝나는 것을 막으시는 어떤 개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예언서들의 주변국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의 예언들이 가지는 뜻이다.

그러면 그게 우리한테는 시원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도 우리 편이고. 그러면 아닌 자들과 구별돼야 되고, 하나님만 믿는 자들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구별되어야 되고,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고, 내가 승리하면 대신에 실패하고 패배하는 자가 있어야 되는 식의 이분법은 사실은 성경에서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9장으로 가보면, 이제 바울이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로 말미암는 이방의 구원을 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낳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것은 이제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 정통 후계자인 것 같이, 이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 첫째인 에서가 아니라, 둘째 야곱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에서는 물리치고 야곱에게 복을 주었다,라는 얘기들을 하고 있다.
얘기를 읽으면 맨처음 우리의 이해를 하나님께서 하가에게서 난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에게서 난 아들 이삭에게, 또 그리고 그 후손에게도 에서와 야곱 중에 하나님이 특정한 자를 통해서, 그래서 택함을 받으면 택함을 받지 못한 자와 이렇게 구별되는 이분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초점은 누구는 버렸고 누구는 택했다,라는 얘기를 하려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무슨 선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이 목적과 계획과 의지를 가지고 인류사를, 역사를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신다, 일하고 계신다,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14절;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오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 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그래서 모세와 이제 바로의 대비를 보이고 있다.
바로는 회개하지 못하게 하셨다. 성경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바로가 완악해졌었다기보다 하나님이 회개하려는 마음을 언제나 붙잡아서 더 완악하게 해서 악역을 계속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긍휼로 여길 자는 긍휼로 여기고 완악하게 만들어지는 자는 더 완악하게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면 당장 이 질문이 나온다. 19절이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그럼 우리 책임이 아니고 하나님 마음대로 해놓고서 왜 우리 보고 잘못했다 그러세요?'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사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시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시기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오"

여긴 이런 얘기이다. 하나님이 악역을 세우고 선한 역을 세운다. 하나님이 악역을 세웠으면 그 악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는가 보고, 선한 역할을 맡았으면 선한 역할의 귀중한 삶을 살아라.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거기에 우리가 가졌던 의문들, 하나님이 우리 옛날 생각하면 세종대왕은 천국 갔을까? 우리 그때 기독교가 안 들어왔고 예수도 아무도 몰랐는데 어떻게 되는 건가? 그 질문은 늘 나온다.
그런 부분들을 지금 예레미아에서는 남유다 왕국의 심판을 행한 것 같이 모든 열국의 심판을 행함으로써 그들이 악역을 맡았을지언정 그 악역으로 인하여 망하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징계하여 갱생하듯이 그들이 악역을 맡은 것이 저들에게 복이 되게 하겠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라,이다.

못알아 듣는 표정이 되었다. 잘 보라. 나만 혼자 재미있어 해서 미안한데, 요셉이 총리가 된다.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형들이 죽이려고 하다가. '뭐 죽일 필요 있냐? 팔아 먹자.' 팔아서 가서 고생하고 노예 노릇하고 고생하고 그다음에 무고를 당해서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을 한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그 꿈을 꾸고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들어왔다가 요셉의 꿈 해몽을 듣고 풀려나서, 술 맡은 관원장이 잊어먹고 있다가 바로가 꿈, 이게 무슨 꿈이냐? 아무도 그 꿈을 해몽하지 못하는데 생각이 났다. '감옥 속에 특별한 죄수가 하나 있습니다.' 나와서 풀었다.
그래서 애굽을 살리고 온 세계를 살린다. 누가 오나? 형들이 쌀 사러 왔다. 형들이 무릎 꿇는 거 보고 무슨 생각이 났다고? 그때 꾸었던 꿈. 그때는 뭔지 몰랐던 꿈. '형들이 벤 볏단이 내 볏단에게 절합디다.' 그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자기 꿈이 재미있어서 얘기했다가 미움만 샀던 그 꿈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총리가 되기 위하여 최고의 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 최악의 과정으로 갔으며,
■그가 최악으로 가는 과정에 최고의 악당은 형들이었던 것이다. 그 형들이 구원을 받는다. 지가 죽인, 말하자면 죽인 동생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 그들이 죽인 것이 절대 될 수 없는 총리 자리에 가서 앉게 만들어 진거다.

이런 얘기들은 왜 성경이 하는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목적을 변경시킬 수 없다.'
■'그럼 이렇게 눈물 흘리고 한 숨 쉬어야 하는 일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그게 최고의 과정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다. 우리는 그게 싫다는 거다.

서양에서 최고의 이상향을 유토피아라고 한다. 유토피아란 '없는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뜻이.
그런데 상상을 한다, 그래서 상상하는 나라가 뭐냐 하면, 일 안 해도 되고 고민 안 해도 되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된다고? 사람이 생각을 안 하면, 사람이 고민을 안 하면 그럼 뭐가 될 것 같은가? 소만도 못하고, 돼지만도 못하고, 개만도 못할 것 아닌가? 생각을 해 보라. 돼지는 먹을 거나 있지, 우린 뭘 했을까?
●우리가 생각을 하고 우리가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고 울고 불고 하는 것들은 도대체 우리가 어떤 지위, 어떤 신분이기에 그런 것들이 허락되느냐 말이다.
●유토피아에 대해서 이렇게 비평을 한다. '그 나라는 살 곳이 못 된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고 개성이 없는 곳은 인간이 살 수가 없다.'

■우리가 당하는 지금 코로나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방해하거나 타협시킬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기독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다.
●예수는 딱 그렇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인 것같이 우리가 죽여서 그런 무덤에 보내서 무덤을 뒤집어 부활을 만든 것이 예수다. 그게 우리 십자가다.
십자가는 사실은 빨간색이어야 맞다. 피 흘린 십자가. 우리가 죽인. 그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상징 아닌가? 이게 자꾸 변해서 금목걸이가 됐다. 집에 가서 빨간 볼펜으로 다시 칠해 놓으라.

■우리는 하나님 하시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런 말 못 알아먹고, 죽은 자를 살려낸다는 부활에 대해서도 우리가 기대가 없다.
교회에 제일 위험한 건 뭐냐 하면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기적과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들이 쇠퇴하고, 우리가 아는 질서, 우리가 아는 기대, 우리가 아는 수단으로 교회가 방법론을, 목적을 구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잘못이다.

우리가 '기도했는데도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거는 얼마나 굉장한 오해인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아는 방법, 내가 원해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거라면 그게 뭐에 쓸모가 있는가?
우리가 몰랐던 거. 상상할 수 없었던 걸 만든다. 그게 뭔가? 생각해 보라.
예수 믿으면 믿지 않는 자와 뭐가 다른가? 예수를 안다.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우리와 동등한 모습으로 우리 손에 죽으러 오신 하나님이다. 이게 기독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오해를 받고 박해를 받고, 무슨 이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차별이, 예수 믿는 어떤 우월한 보상이나 증명이 안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무슨 불만인가? 예수가 그렇게 오셨는데.
"그는 그는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귀한 모양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도다" 아닌가?
■우리는 그걸 못 참는 거다. '이기게 해 달라'이다. 그건 예수를 믿는 게 아닌 거다.
제대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 받은 자의 그 진정한 세계관 역사관 종말관 현실관이 다 무너져버렸다. 기독교가 그걸 놓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으로 그걸 대신하겠는가? 그러니까 예수 대신에 다른 뭘 세워놔야 될 거 아닌가? 누구를 세우고 싶은가? 옛날에 고대시대는 시저였겠다. 바벨론일 때는 느부갓네살이고, 애굽에서는 바로이고. 왜 그렇게 됐나?
우리 각각이 예수를 믿고 이 자리에까지 나와 앉았고 이 성경 말씀을,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역사로 보고 있다면,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현실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그 약속에 대한 신뢰와, 그것의 결국에 대한 자신이 있어야 현실을 살아낼 거 아닌가?

안 그런가? 누구를 위하여 믿어주는 것 아니고, 우리 자신의, 자기의, 자기 신앙, 자기 현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안 해주세요? 나는 이건 억울합니다.' 이게 뭔가?

■'그 모든 것이 다 죽을 것 같은 게 오히려 뒤집어져서 기적을,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걸 만들더라.' 이게 부활 신앙 아닌가? 그게 부활이다.
죽을 목숨이 영원히 살게 된다? 무한대로? 삼천갑자 동방삭이? 그런 그런 유치하고,기독교 하고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의 현실을, 오늘을 못 살게 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요셉이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형들이 나중에 요셉을 알아보게 됐다. 요셉이 나와서 울고 '형님들 제가 요셉입니다.' 그러니까 벌벌 떨었다. '아이고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그때는 못난 짓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뭐라 그러나? '형님들, 나를 여기 보낸 건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이 다. 성경이 왜 기록돼 있는데?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현실.

​우리가 동일한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하나님의 권능과 성실하심과 그의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권능과 지혜와 사랑 속에 있는 존재들이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유명한 이사야 53장에. 이런 말씀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이다.

유다 백성이 두들겨 맞고 그들을 두들기는 데 쓰인 자들이, 아까 얘기한 요셉의 형들이,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 같고. 두들겨 맞아서 망한 것 같은 유다는 요셉같이 총리가 되고 하는 식의 인생 속에, 어느 인생 하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영광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약속들 속에서, 도망갈 것이냐, 다른 것으로 대체할 것이냐 말이다.

우리의 생애 속에서 우리가 악역을 맡았다 할지라도, 잘못한 짓을 했을지라도 그것마저도 우리에게 손해 보지 않을 거라고 성경이 얘기한다. 얼마나 굉장한 범위인가?
'난 모든 것을 용서하지만 거짓말만은 안 돼.' 이건 안 된다. 모든 잘못 중에 제일 많이 하는 잘못이 거짓말이다. 뭘 하나 남겨놓으면 안 된다, '이것만은 안 돼.' 이 잘못은. 이 잘못만은 안 해야.'
다 괜찮다. 우리가 안 믿는다고 우겨도 괜찮다.
배신하고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게 누군가? 베드로이잖은가? 베드로. "사탄아!"까지 갔던 자리에서 그 수제자라는 거 아닌가?
우리의 인생 속에 우리가 언제나 잘할 수 있다고 잘해야 된다고 그렇게 얘기할 마음은 없다.
어떤 곳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도망갈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생각하라. 부끄러운 역할을 맡을 것인가, 명예로운 역할을 맡을 것인가,가 언제나 우리의 선택에 놓여 있다.

■우리가 잘못해도 된다. 잘못하면 지옥 간다라든가, 잘못하면 벌 받는다, 이렇게 간단한 얘기 아니라, 잘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건 스스로가 그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기회이다. 단번에? 완벽하고 그다음에 평안하고 아무 일도 없는, 그건 다 구라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 그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점점,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크는 거다.
'다음엔 내가 한 번 더 잘할 거야. 이것보다 낫게 할 거야.' 그게 인생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 배짱, 배장이라는 단어를 믿음과 같이 써야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아들을 보내신 그의 말릴 수 없는 진정성이 나의 존재와 내 인생에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이 내가 크기를 바라고 내가 성숙하기를, 내가 철들기를 바라서 이 모든 과정을 허락하고 있다. '감히 감히 감히 방심할 수 없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현 주소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한 걸음 더'이다. 그 믿음의 현실성 구체성 그리고 절대성, 아무도 그 믿음을 부러뜨리거나 꺾을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요 권리라는 것 기억하는 하루하루에 복됨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말 하나도 안 해도 됩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성경에 못 박아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셨듯이 우리의 생애를 못 박는 어느 것도 우리를 영광과 찬송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합니다.
그 완성의 길을 하루씩 걸어가는 귀한 하루하루라는 것, 깨달아 믿음을 단련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을 성숙시켜, 우리 인생의 귀한 명예와 위대한 실존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