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에게 전 평생에 걸쳐서 훈련시키신 것은 자기파산과 자기포기이다

nazunzaro 2021. 9. 2. 13:57

[성화의 신비(2006)_11. 자기 의를 꺾는 훈련 ③ - 바울]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하나님의 종으로 준비시키셨는가를 확인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영웅적이고 위인적인 준비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드로로 하여금 어떻게 [자기 의]를 꺾어 은혜에 매여 달리게 하셨는가를 확인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에게 오면 바울의 전 생에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이 간섭을 하시고 이 준비를 하신 것을 보게 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8)

이것은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좀더 자세히 나열한 이런 내용들을 말한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이 고생들은 아시다시피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소아시아 지방의 전도 영향을 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당한 고난들이다.
이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강력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정말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 맞느냐' 라는 강력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그렇게 의문을 제기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울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영웅적이고 형통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시원치 않고 유능해 보이지도 않고 상당히 무능해 보여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이라면 왜 하는 일마다 어렵게 되느냐' 라는 두 가지 이유에서 아마 사도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인 증거는 내가 고난을 받으면서도 증거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욕심을 바라는 것이라면 이 고생을 왜 하겠느냐?'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사심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마지 못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도가 맞다,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고생한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다.

바울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라면 누가 이 고생을 하면서 하겠느냐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 혹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는 이것이(=이 고생을 하는 것이)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간섭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을 세우신다면 남다른 것으로 무장하게 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바울의 시작은 초대교회 지도자이었던 스데반을 죽이는 것으로 무대에 등장을 한다
베드로는 어떻게 주님 앞에 종으로 확인이 되는가?

■세 번 부인하는 경지까지 가게 해 놓고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자기의 종으로 쓰시듯이, 바울은 시작부터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스데반을 죽이고 시작하는 것이다

바울이 외적으로만 그런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도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잠도 못 잤다.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현실감이 없게 읽는다. 바울이 충성되이 성공적으로 인생을 마쳤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읽어도 비극이 없고 고달픔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한 번 읽어보라. 기가 막힌다. 이 기가 막힌 일들을 바울이 뭐라고 증언하는가? 고린도후서 1장을 보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 1:8-9)

왜 이런 일을 했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형통하게 써주시기를 바란다. 주를 위해서 살기도 바쁜데 현실이 발목을 잡는 꼴을 못 본다.

■우리가 요구하는, 유능해야 되고 능력이 많아야 되고 형통해야 되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신앙상의 장애물인 자기 의'이다.

나는 했다. 넌 안 했지?' '나는 믿었다. 나는 기도했다. 나는 너와 다르다.' 이것을 빼내야 된다.
은혜를 더하소서. 불쌍히 여기서 여기소서. 이것이 신앙이다. 이것이 신앙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우리는 신앙을 서로 부추기고 경쟁하고 확인하고 서로 자존심 싸움하다가 다 망쳤다
왜 우리 기독교를 복음이라고 하는가? 거기에 왜 용서와 오래 참음과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한 자의 위로와 그 안부가 없는가 말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에게 전 평생에 걸쳐서 훈련시키신 것은 자기 파산과 자기 포기이다.

고린도 후서 12장에 가보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공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7-10)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파산 선고를 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 목마르다는 것은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을 말한다. 그게 복이다
왜 그런가?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만들어 주실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요, 기독교의 약속이요, 우리의 신앙들이다.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신앙은 꼭 율법화한다. 왜 율법화 하느냐 하면 우리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의 율법은 본성적이다.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으면 우리는 율법으로 벌써 돌아선 것이다. '아니, 그것도 못해?' 그러면 우리는 벌써 율법을 기준하여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셔서 등뼈를 꺾어놓으실 것이다. 저주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힘을 얻게 하시려고, 포도나무의 줄기에 우리를 붙들어 매시려고 다른 데 붙어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인간의 죄성에서 제일의 본질은 하나님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 병을 고치지 못하며 다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도 바울에게 '네 능력이 약한 데에서 온전하여 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확인을 하는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이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

하나님을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신 것을 알게 하사 은혜를 입어 그분의 손길이 이미 일하고 계시고 그렇게 완성하실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 알리셔서 내가 믿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결과이다.
우리의 믿음은 전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려는가를 약속에 근거하여 이미 일어난 일과 지금 하시는 일과 그리하여 끝내 이루실 일들에 대하여 알고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순종하면 이루어지고 불순종하면 안 이루어진다는 조건이 아니다.
불순종하면 얻어맞고 그 자리에 갈 것이고, 순종하면 칭찬받고 그 자리로 갈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신앙의 실패들과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받지 않으셨거나 내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밤낮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우리를 목표로 삼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목표이다. 이 시대와 이 나라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일차적인 문제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모든 이웃들이 있다.
천하보다 우리 한 명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씨름하고 계신다. 일하고 계신다.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았던 순간은 없다

우리 모두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손길을 못 보고 있어서 지금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바울에게 하셨듯이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신다.
저들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진정한 복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저들의 장애물을, 자신을 근거로 하려는 자기 의를 꺾으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복을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통과 승리와 보이는 증거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우리의 잘못된 기대가,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고 있는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손길들을 놓치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안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제껏 해오셨다.
■우리가 가졌던 우리의 신앙에 대한 선택과 그 절망과 낙심들을 이제 다시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한 것은 우리를 꺾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입 다물고 이렇게 조용해졌다. 제대로 하나님께서 하셨다. 우리가 그것을 절망으로 느낀 것만 틀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든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로는 못 참으시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필요와 자기의 욕심을 만들어내는 정도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고 목표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신적 내용과 경지와 그 수준으로 채워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나는 했다!' 라는 이 싸움을 하지 마라. 왜냐하면 신자란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 자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채우는 자이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수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 아니요, 그분의 아들을 주셔서 구원한 경지가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 참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오, 우리가 자랑할 수 없는 이유들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이시오 의로움이시오 거룩함이시오 구속이시다.
이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내 자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는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룩한 실력이 없다. 신적 경지에 갈 실력이 어디에 있는가?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상이오 영광이오 은혜요 구원이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31)

왜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하는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낀 절망과 낙심들은 우리의 의와 근거들을 뽑는 것으로서 작용해야 옳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복을 위하여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이제까지 일해 오셨다. 우리는 헛고생한 것이 없다 이제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은 이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의 믿음이 신적 약속과 신적 충만과 신적 경지의 믿음의 내용들로 우리에게 채워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을 "예수 안에 믿음 가운데서 산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