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正義가 아니라 情이로와야 한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하여 죽는 거다. 회복은 우리에게만 있다. 신자의 책임이다. 용서가, 회복이, 기다림이 있어야 된다

nazunzaro 2021. 8. 25. 06:14

[다시 보는 열왕기 03 / 열왕기상 6:11-13 / 2021.08.22]
=========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내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내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내게 확실히 이룰 것이오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6:11-13)

본문 열왕기상 6장은 이제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솔로몬이 대략 40년간 통치를 했는데, 그 성전을 짓는 일에 7년, 그다음에 왕궁을 짓는 일에 13년을 쓴다. 그의 통치의 절반을 이 큰 건축공사에 시간을 두는, 국력을 쏟아 붓게 된다.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를 우리가 잘 알듯이 그 부귀영화 속에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여 아름다운 성전을 지은 것 이것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일은 3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시고, ‘무엇을 줄까?’라는 말씀에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 그래서 칭찬하시고, ‘네가 지혜를 구했으니 나머지도 다 주겠다, 그래서 부귀영화가 네 이전에도 없었고 네 이후에도 없을, 우리 잘 쓰는 한국말에 전무후무한 부귀영화의 왕이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거기에도 오늘 읽은 것 같은, '네가 내 말을 듣고 내 법도를 따르면'이라는 조건이 송곳 같이 들어있다. 이것은 나중에 성전을 다 공사를 마치고 봉헌할 때도 등장을 해서 9장에서도 다시 등장을 한다.
그러니까 이 좋은 일을 하면서 딴 생각 품지 마라, 진심을 끝까지 지켜라 이렇게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경고는 이 결과를 아는 후손들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그 찬란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성전이 다 파괴되고, 그 후손들이 나라가 망하여 이국의 나라,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의 포로로 살아야 했던, 이때로부터 대략 350년 이후에 일어날 일 거기에서 현실인 포로자들,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이 '왜 그랬어?' 라는 말로 들려야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성경에서 아무런 평을 하고 있지 않다. 뒤에 나오는 후대를 잇는 왕들은 다 다윗의 길을 갔느냐, 다윗의 길과 다른 길을 갖느냐로는 판정이 내려져도, 솔로몬 얘기는 다시는 언급되지 않는데, 솔로몬의 그 실패는, 말하자면 언급하기도 창피했다고 그럴까? 말을 삼가게 된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대의 왕들은 다 다윗을 쳐다보지 않고, 솔로몬을 쳐다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그 권력과 자신의 지위를, 부귀영화, 권력으로 삼으려고 해서 다 실패했던 역사를 남기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중요한데,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 특히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주제는 자유와 순종이다.
자유는 하나의 권리인데 순종은 권리의 포기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자유도 충분히 약속하고, 순종도 끝까지 요구한다.
자유가 권리이면서 책임인 것 같고, 순종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같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선택인 것 같이 그 안에는 우리가 둘을 묶을 수 없는 모순적인 내용들이 섞여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이 자유와 순종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밝혀내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제일 잘못된 일은 뭐냐 하면, 성전을 지음으로써 솔로몬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성경은 증언하는 셈이다. 그는 이 성전을 짓느라고 국력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고 정성이었고 신앙이었고 헌신이다. 최선을 다한 헌신이다.
그러나 이 성전은 성경에서 여러 번 경고되듯이 그것이 올무가 된다.
예레미아 7장에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제 남유다의 멸망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마라" 이렇게 나온다.
무슨 거짓말일까? 스스로 만든 거짓말, 성전을 지었으니 이렇게 호화로운 지극 정성을 들여서 주의 영광을 드러냈으니 이제는 나에게 그 보상만 남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올무와 오해가 되게 되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장악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하나님이 이 백성에 대하여 적극적인 뜻을 갖고 있다,의 상징이다. 그것은 일찌기 출애굽 후에 출애굽기 19장에 나타나듯이 출애굽하여 석 달이 흐른 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너는 백성들을 모아서 이 말을 전하라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법도를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약속한다.
그런데 이 약속은 이스라엘 하나를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두에 이런 조건이 붙는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한 고로' 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선민이라는 지위와 제사장 국가라는 지위는 다 온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려는 방법이지, 차별화되어 문을 닫아거는 이분법으로, '너희는 바깥에 있고 나는 안에 있다' 하는 차별로는 쓰일 수 없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차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가 아주 극단적인 차별로 작용한다.
이 차별을 조심해야 되는 이유는 말하자면 그것이 책임을 면제받은 것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에 있으므로 너희와는 다르고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든다,가 되었다.

실제로 히스기아 때 쳐들어왔던 아수르가 하룻밤 사이에 다 죽고 그 나라가 구출함을 받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편들어서 절체 절명의 순간에 개입하여 살려낸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상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을 모셔오자, 그래서 실로에 있는 법궤를 모셔와서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다가 대패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하고 법궤는 빼앗겨져서 블레셋의 다곤 신장에 안치되는 그런 비극이 이러한 역사도 동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것과 같은 신앙의 '상징성',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성'들이 우리에게 면책의 방법과 수단이 되는 것을 늘 조심해야 된다.
그들은 열방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어떻게 하나님 없는 자들과 다른가를 증명해야 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고, 이방신들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모든 대가를 요구하는 신들이다. 더더욱 그 신들은 있지도 않은 신이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인데 스스로들 스스로를 속여서 내가 많은 희생을 하면 신이 보상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식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모든 것을 바쳤으니 하나님이 보상하리라,라는 데로 왜곡시켰다. 이게 준엄한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멸망에 나타나는 성경의 경고인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모아서,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할 때 조심할 것은 교회의 외부적인 '상징성'들이 내용을 대체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

지금 코로나 시대니까 회집하지 못하는 문제가 대단히 큰, 이 장애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런 건 없다.
하나님을 믿는 문제에 지리적 공간적 혹은 시간적 제약이란 없다.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고, 구약에서도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인용 하셨듯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오', 또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여인에게 '이곳에서도 말고 저곳에서도 말고 이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 이렇게 돼 있다.

한 7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이북에서 피난 온 많은 북한의 피난민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피난을 왔다. 공산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서 모든 재산 다 놓고 내려왔다. 그래서 맨 처음 한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도 정성을 다해서 좋은 교회를, 예배당을 지었다. 제가 자라난 교회도 1950년대에는 감히 상상 못할 돌로 교회를 지었다. 최고의 재료가 좋은 석재로 지은 교회였고, 그다음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고급한, 비용을 들여서 온 교회 교인들이, 자기 집은 없으면서 자기는 삯월세를 살면서 교회를 짓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기쁜 일이었고 스스로 감격할 일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후에 부작용이 생겼다.

■무슨 부작용이 생겼냐 하면, 열심히 했는데 보상이 기대하고 다른 것이다.
예배당을 지은 건 지은 거고, 오늘을 사는 건 오늘을 사는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거다. 그 상징물이 '상징하는 내용을 오늘 살아야' 되는 거다. 과거에 한 번. 언젠가 한 번 한 일로. 오늘 한 일로 내일을 오늘 사 놓을 수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다.
오늘 내가 평소보다 열 배의 헌신을 한 것은 오늘 열 배로 잘한 것이고, 그것이 내일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내일은 내일 또 해야 된다.

우리는 지금 부흥시대를 겪고 나서 이제 코로나시대가 됐는데, 순교시대나 감격시대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답답하다.
그 많은 부흥의 감격들을 기억하는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 오셨을 때, 엑스플로 74 했을 때, 저 여의도에 100만 명이나 모여서 마포대교를 걸어 나오던, 서로 어깨가 부딪힐 만큼 많은 인파가 걸어 나오면서 찬송을 부르던 감격과 역사가 있다. 그러나 그 감격과 역사가 많은 교회를 만들어내고 세우고 많은 성도들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후는 이상하게, 이상하게 흐지부지 되었다.

■그게 지금이다. 그때만큼 신앙이 한국 교회에서 줄었나? 그렇지 않다. 그때는 그 우리의 헌신이 가시적인 결과를 볼 수 있었던 시기였고, 지금은 가시적인 결과물을 볼 수 없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신앙생활을 더 충실히 하는 것밖에 집단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결과물이, 지금은 '상징물'이 없다.
여기서 당황들을 하고 있어서 빨리 모여야 된다, 빨리 돌아가서 옛날의 감격으로 가야 된다,라는 생각은 성경에서 아주 여러 번에 걸쳐서 지적하는 실패다.
잘못된 생각이다. 앞으로 나가야 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오늘의 유익을 끼쳐야 된다. 그런 일들에 우리는 별로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한데,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얼 해야 되는지, 과거에 있었던 것은 결과물을 본 것이고 이제 앞으로 갈 때는 결과물이 어떻게 보이게 나타날지 우리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전 생각을 하면 이런 지금 우리 쓰는 핸드폰이라는 거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삐삐가 나왔을 때만 해도 얼마나 놀랐었는가? 그런데 요 몇 십 년 사이에 이제는 핸드폰이 나오고, 핸드폰이 은행도 필요 없게 하고, 우체국도 필요 없게 하고, 모든 물건을 사러 갈 필요도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를 돕고 있는 것만큼 우리를 당황케 하고 있다. 정상적인 확인들, 정상적인 유대, 정상적이라는 말은 사실은 좀 구시대적 표현이다. 우리가 알았던 전통적인 이해를 다 무너뜨렸고, 새로운 이해, 새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성경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 성도들이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은 것을 놓쳤다, 성전을 지어놓고 ‘우리가 성전이 있어,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우리는 너와 달라. 우리가 어떻게 이방신을 믿는 저런 야만족들한테 잡혀갈 수 있습니까?’ 라고 큰소리를 치고, 그걸 안심으로 삼아서 자기의 책임을 못한 것 같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도 자기의 책임을 져야 되는 일에 혼선을 빚고 있고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이제 소위 구약 뒤에 나오는 열두 소선지서에서 강조해서 이것을 요구한다. 대표적인 선지자 아모스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 흘려 보내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되는 것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불법과 만행이 자행되고, 하나님 아는 것과 백성을 돌보는 것들이 없어진 사회를, 세태를 꾸짖는다.
그러나 여기에 이 선지자들의 꾸중을 듣는 데 있어서, 이 꾸중을 대언하는 선지자나 그것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했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도 이런 꾸중들에 대하여 이제 교회는 받아들이는 일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선지자들이 살기를 띄고 공포스럽게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건 그들이 공갈을 칠 문제가 아니고,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몰라보고 있는데 하나님이 '너희는 틀렸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전달하는 행위다.

오늘날 우리가 신약 시대를 겪으면서는 늘 이 일에 우리가 일종의 공포를 그 안에 담고 이런 정의를 논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단에 대해서 공격할 때, 이렇게 공포스럽게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잘못을 꾸짖어야 맞지만, 또 교인들에게 알려야 되지만,
우리가 칼을 든 것 같이 얘기하는 건 맞지 않다. 그건 하나님이 하실 거다. '알곡과 가라지를 지금 구별하실 겁니까?' "아니다. 말일까지 두어라. 그때 가서, 그때 가서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겠다" 그리 하셨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가지고 차별적 자기확인을 한 것 같이, 즉 우리가 신약시대로 얘기를 하면, '예수를 믿는다'와 '안 믿는다'를 차별적으로 다루어서 '넌 안 믿어가 자신이 맞는 것을 확인시키는 유일한 방식이 된 것을 고쳐야 된다.
●그것보다 더 해야 된다. 마땅히 더 해야 된다. 십자가를 걸어 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하여 죽는 거다. 우리는 어디까지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영역이 넓혀질지 모르는 중간에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섣부른 공갈을 쳐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런 정의를 말할 때마다 말하자면 공포가, 어떤 공갈이 거기 들어가는 이유는, 일반 사회에서는,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려면 방법이 폭력밖에 없다. 악인을 제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세상은 생명을 만들 수도 그리고 생명을 파괴시킬 수도 없다. 세상은 오직 제거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회복은 우리에게만 있다. 교회의 책임이다 교회 공동체라는 것은 거기에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다림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지금 솔로몬에게서 성전을 거의 100프로 다 금으로 싼, 이런 치장을 하고 이런 진심을 표출한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거기에다 묻어버린 것 같이, 그래서 오고 오는 후손들이 다 망한 것 같이,
●우리 한국 교회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교회 공동체의 십자가를 내다 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주고받고 넘겨주어야 할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다.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서 매일 행해져야 하는 일이고, 그 행해지는 일은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매번 해야 되는 일이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익숙치 않은 일을 해야 된다.

그가 어떤 업적을 남겼고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는 전에 있었던 일로가 아니라, 오늘 만났을 때 나타나야 된다.
■그러니 늘 얘기하듯이 반가워 하라. 교회 와서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데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건 큰 죄다. 심지어 한 교회에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우리 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 우리는 남포교회 교인 아닌가? 어느 교회든 이 말은 쓰는거다,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게 뭐가 낫다는 겁니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왜 우리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세상이 그래서 그런다'
맞다. 세상이 서로 아는 것을 겁을 내고 서로 벽을 쌓는 것이 익숙해져서 그 영향이 교회에도 들어온다. 저항해야 된다. 저항해야 된다.

■최고의 죄가 뭐냐?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이 하나 있다. 최고의 죄는 무관심이다.
누구에 대한 죄냐?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가 사는 이웃에 대해서, 공동체 내에 동료들에 대해서, 무관심은 죄다.

‘어떻게 속 다 뒤집어서 보여 달란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니다. 우리 속을 다 까발리는 것이 정직이거나 그것이 교제가 아니다. 혼자 져야 하는 짐을 누르고 우리가 모인 공통분모를 나눠야 한다. 공통분모가 있지 않은가? 어느 결사체나 다 공통분모가 있지 않은가?
◆신앙공동체 아닌가? 신앙공동체의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뭔가? 믿음 아닌가? 소망 아닌가? 사랑 아닌가?
◆근데 이게 자꾸 희미해져서, 정의가 성경에서는 바르고, 틀리면 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의란 - 정의란 우리 말이 묘하다 - 정이로워야 되는 거다. 정의 말고, 정이로와야 된다. 바를 정(正)자 말고, 마음 심 변에 붙은 푸를 청, 정(情)이 있어야 된다.
정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정이 있다는 건 내 가족이면 가족이 잘못해도 편을 들어야 되듯이, 같은 신앙 고백 속에는 편을 드는 마음이 있는 것, 이것이 정이다.
그것을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펼치셨고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 되심을 이렇게 우리와 구별하여 우월감으로 유일 존재로 그 명예를 고집하시지 않고 ◆찾아와 우리와 대등하게 되는 것으로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성육신이다.

그러니까 성전을 지었다고 그러면 이것이 특별하다는 말은 이 특별함이 보편에 녹아들기 위하여 상징해야 된다. 보편에, 판잣집에 녹아들어야 한다, 성전이.
◆우리가 가지는 어떤 위대함도 그 위대함이 가장 무식한 자에게 녹아들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 와서, 그런 유무식, 지위고하, 부귀와 상관없이 공통분모로 여기서 평등한 관계를 가지는 표현, 교제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고, 성전의 왜곡에서 극복되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결국 그 성전이 몽땅 무너지고 훼파되고 모든 보물이 빼앗겨서 탈취물이 되고, 다시 나중에 지었는데 헤롯이 그것도 잘 지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 같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무너진다.
그것은 우리가 '왜 그랬어? 잘했으면 안 그랬을 텐데..' 이렇게 말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보이는, 그래서 협소해지고 경직되고 제한되는 거를 무너뜨려 넓게 만드신 역사였다.
◆아주 간단한 거다. 그러나 그게 어렵다. 그게 어렵다. '솔로몬 너 왜 그랬어'가 아니라 오늘 우리는 그 역사와 그 과거의 실패로 어떻게 그보다 나아질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물으라고 이걸 써놓은 거다.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인가? 이 얼마나 긴 장에 걸쳐서 망신을 주는지 모른다. 그 안에 큰 바다를 놓고 그 바다는 직경이 얼마고, 기둥은 몇 규빗인데 금으로 쌓고.. 이런 얘기들을 나열하는 그 수치, 그 지적, 그 부끄러움을 역사에서 배울 줄 모른다면 헛 사는 거다.
우리 인생에서도 그런 것 투성이다. 잘못한 게 더 많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잘한 것보다 더 많은 걸 한다. 그것이 창조와 부활이라는 거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잊는 것같이 부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 그게 우리의 신앙이고 그것이 우리 현실에 실제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지금 일을 하신다. 우리의 신앙도 그 신앙 안에 함께 몰려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약속들이 우리 안에서 꽃 피우고 감사와 찬송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한다.
웃음을 잃은 현대, 기대가 없는 현대, 서로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 우리만이, 우리만이 생명이고, 소망이고, 우리만이, 우리만이, 우리만이 하나님의 임재이다.
나 혼자 갖고 있으라고, 나 혼자 묶어두라고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하여,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을 위하여 우리를 세우셨다.
그 책임 감당하는 우리와 우리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