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신비(2006)_4. 그리스도와의 연합 ①]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19-20)
■참다운 신자의 성화의 완성은 은혜로 말미암는다. 성화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서 성화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구원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신 것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들은 다 끝났고 구원 얻은 다음에는 우리가 홀로 신자로서 생활과 실천을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느끼는 문제를 성경은 필히 교정하고 있다
■본문 20절의 중요성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이 되어 있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부활했고,
■새 생명을 얻어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했듯이, 살아나서 영원한 나라에 갈 때까지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 혼자인 내가 아니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나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계속되고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신실하심으로 연합된 이상 이 문제는 실패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함을 얻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을 얻는 이 문제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영광된 운명을 바라보고 완성되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하고 결말되어 완성되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어디에서 우리가 놓치느냐 하면, 율법적 습성과 인과율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는 행위적 본성 때문에 자꾸 놓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유명한 사도 바울의 "곤고한 사람"에 관한 문제가 나온다. 이 곤고한 사람은 왜 곤고하다고 비명을 지르느냐 하면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늘 악에게 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2-23)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겉사람은 죄의 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도 겉사람과 속사람,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표현들이 주변에 많다. 그런데 이 표현은 굉장히 위험한 표현이다.
■사람이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은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는데 겉사람이 죄의 법 아래에 지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육에 속한 사람이 지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곤고한 사람들, 즉 죄에게 지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감사하리로다' 다음에 뭐라고 다시 반복되는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이다. 이 부분은 다시 앞으로 가버렸다
앞이 무엇인가?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겉사람은 죄의 법이라는 갈등에서 이 사람이 비명을 질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이 비명과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했는데,
구원한 다음에 뭐라고 다시 언급을 하는가? 나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되었다인데,
다시 덧붙이기를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답이 되었으나, 답이 된 사람이 아직도 곤고한 사람의 비명지르는 형편과 바뀐 것이 없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어떤 위험 속에 있는가 하면 표현상의 위험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어떤 위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속사람과 겉사람의 싸움이 신앙 싸움이라고 알고 있고,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속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영에 속한 사람에게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한다고 자꾸 생각을 한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 싸움은 내가 싸우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속 사람 좋다. 영에 속한 사람 좋다. 우리 안에 인류의 선조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엇이 선인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행할 능력이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에 대한 소망이나 선에 대한 의지나 양심으로 죄를 이길 힘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비명을 지른 사람의 고민은 우리가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절망의 비명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정답의 특징은 우리 안에 없고 밖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답이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 사람을 강하게 하시고 영에 속한 사람에게 힘을 주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죄를 이기는 것이고 그 승리,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죄를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갖고 있는 신앙의 승리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힘, 즉 영적인 힘인 성령충만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내 안의 죄를 몰아내게 하는 싸움이라고 자꾸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길 수 있고 그 안에 들어간 자만이 승리를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내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2-23)
이것은 둘이 싸워봤자 늘 지는 싸움이다. 죄의 법 아래로 잡혀온다. 죄인인 탓이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소원이 있고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지만 행할 수가 없다.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다. 율법은 죄인 것을 알고 있지만 죄를 거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한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열심을 내어 이길 수 있는 신앙적인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요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5)
예수 그리스도가 답인데 다시 뭐가 반복되는가? "그런즉"이다. 여기서 '그런즉'은 감사 후의 이야기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이것은 아직 안 변해 있다.
■여기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그쪽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이기게 했다가 아니라, 나는 아직도 그 모양 그꼴로 마음의 법과 육신의 죄의 법이 싸워서 늘 지던 그 모양 그대로 있는데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율법적 기준으로 우리는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적 기준이라는 것은 잘하면 상받고 못하면 벌받는 행위와 법의 기준으로 평가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평가받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평가를 받는다.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승리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원인을 주고 조건을 주어서 이기게 하는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허락하신 구원이다.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갈 구원과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내 것이 되는 방법으로 승리를 얻고 있지, 내가 무엇을 해서 열심을 내어서 훈련하고 배워서 얻는 구원은 없다. 신앙의 승리도 없다.
우리는 곤고한 사람이었다. 마음의 법으로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며 따르고 승리하고 싶으나 늘 졌다. 율법이 가르친 것,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것은 행위법칙이나 인과율 속에 있지 않다.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다.
■●성령의 법을 좇는다, 영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녀로 부르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이 나의 승리가 되게 하는 은혜와 믿음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행위의 법칙이 아니라 은혜의 법칙으로 내가 조건과 원인을 제공하여 얻는 승리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로 승리를 가지는 구원의 방법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다
■●성화라는 것은 점진적이고 많은 시행착오 속에 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은혜를 입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 칭의 문제에서 확인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활 생명 속에 새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승리케 하신다는 성화의 과정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의심하고, 걱정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만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율법을 성취하여 확립하고자 했던 정체성과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의인이다!'라는 정체성이 더 이상 율법을 근거로 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내가 노력하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쳐 얻은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키워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내가 등록금을 내고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만드시고 기르사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원인이시고 이유이신 은혜요 사랑에 의한 것이다.
로마서 7장의 고민은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와 선과 승리를 자기가 이루고자 하고 자기 안의 원인과 조건을 가지고 싶어했던 싸움에서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며,
8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와 우리에게 허락된 영원한 소망과 영광된 결국을 확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명예와 의를 지니며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의 관계라는 것을 확보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된다.
이것이 십자가 전의 상태에서 십자가를 통과하여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벌을 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그 사랑의 연합의 자리로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그 구원 속에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른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구원 얻은 이후에도 신자의 삶은 완벽하지 않다. 당연히 어렵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짓는다.
성화는 점진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노력해야 되고 실패를 맛보고 절망하고 갈등하고 행위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벽하게 확보돼 있어서 취소되지 않고 변개되지 않고 실패되지 않는다.
■우리가 의를 좇고 신앙의 승리를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확보하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다우냐의 문제를 묻는 것이라면 그건 당연히 물어야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 이 문제를 혼동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을 외면케 하고 노력과 책임에서 자유로운 방임주의자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사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승리와 영광을 위하여 개입하셨고 간섭하시고 그 약속을 영원히 지키시는가를 아는 것이, 사실은 기독교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화의 갈등과 그 과정을 인내하고 극복하고 승리케 하는 것이다. 우리로 승리케 하는 것은 무서운 형벌에 근거하지 않고 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격려되며 힘을 얻으며 새 힘을 늘 공급받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 가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무슨 이야기를 자꾸 하는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있지 않다. 우리가 승리해야 승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승리한 신분을 갖고 있고 운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 승리자의 내용을 채워나가야 된다.
승리할 운명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실패로 끝나게 내버려두어서도 안 된다는 책임이 들어오는 것이지 내가 한 것만큼 승리가, 내가 한 것만큼 영광이란 보상의 개념과 인과율로 신앙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자신감이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신자로서 사는 모든 삶의 현실에 대한 배짱이다.
■행위에 의존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거나 행위에 집착해서 자신의 의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 하면 할수록 절망에 빠지게 된다. 신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절망의 문제이다.
절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절망이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이 싸움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성화의 신비]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절망은 절대 부정적이지 않다. 절망을 모르고 또 절망을 해결하지 않고 자란 신앙은 가짜이다.
자칫 잘못하면 절망하지 않을 것으로 신앙생활의 영역을 제한해 버리는 방법을 쓴다. 예를 들면 전도하고 봉사하는 정도로 신앙생활의 영역을 제한한다 일주일에 전도 두 번 하고 성경 열 번 읽고 하는 식으로 절망이 필요 없는 것으로 자신의 잣대를 스스로 만들어서 안심하면 안 된다.
성화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우리 본질의 깊은 데를 꿰뚫어 새롭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혼자 살려는 마음을 제거하는 싸움이다.
로마서 7장, 8장에서 우리는 인과율과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는, 은혜로 말미맘는 승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허락된 승리를 확인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 하나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원인을 갖고 있는 것, 자격을 갖고 있는 것. 이것을 빼버리고 은혜를 이야기하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동서남북과 아래 위를 구별할 수가 없다. 인간의 본성이다. 여기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인 실천이나 신앙상의 선하고 의로운 소원들은 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생긴 소원들이다.
그것을 행하여 예수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생긴 소원들이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받는 도전인 것이다.
에베소서 4장은 이렇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 4:17-20)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도전을 받는다. 신자들의 신자 된 증표나 증상은 죄짓는 것이 괴롭다는 사실이다. 끝없이 선함과 의로움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
■문제는 그것을 자기 안에 힘을 가져서 이루려고 하는 데 있다. 이것이 어떻게 은혜에 속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가를 우리가 확고히 해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가르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산다는 말씀이 갖는 비밀과 신비와 복된 것들을 분명히 확보하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