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린 기독교신앙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은혜인 것을 놓치고, 정성이라고 오해한다. 은혜마저도 정성으로 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탓에 성화라는 우리의 본분이 요구된다

nazunzaro 2021. 8. 24. 12:02

[성화의 신비(2006)_5. 그리스도와의 연합 ②]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화의 완성과 승리를 이루는가를 계속 생각하려고 한다.
본문(갈 2:20)은 우리가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합을 무엇 때문에 자꾸 강조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고 계신다. 나를 나의 가치나 나의 조건으로서 대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로서 나를 취급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셨다고 말씀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였다 있다는 이 사실은 오늘을 사는 현실 속에서도 그 연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상의 능력이 된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신실한 복종과 거룩한 삶을 통해서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우리의 신실함이나 거룩함에 대한 보상도 아니다. 선행에 대한 대가도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처음 거듭나서 거룩한 상태에 들어간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우리의 신앙적인 승리나 수준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사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묶었을 때 이미 허락된 것이오, 하나님의 작정이오. 약속이오,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결과들이다.

■그러나 이 특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특권이 서두에 이야기한 것 같이 우리가 우리를 평가할 때 나의 나 된 것으로 평가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로서 나를 평가해야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내가 된다’라는 의미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이 연합이 그리스도가 나인 연합, 즉 구원이요, 의요, 그리고 모든 신앙의 승리와 거룩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죄에 대하여 패배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 것이 되는 바로 여기에 성화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신실한 복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결과이며 그리스도의 연합에 의한 열매이다.

우리가 제일 크게 오해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 없는 이 문제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이 내 안에 겉사람과 속사람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속사람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표현이 절대적으로 틀린 표현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도 책임이 돌아오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는 그리스도가 없을 때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결정권을 행사할 수가 없다. 죄가 늘 우리를 사로잡아 온다. 그래서 늘 실패한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여기서 은혜라는 것은 신비한 그런 표현이 아니고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이유와 의지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며, 승리로 우리를 붙잡고 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안에 있는 자들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문제를 이해할 중요한 대표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어떤 청년이 와서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니 다 지켰다고 한다. 그러면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시자 못했다.
이 사건은 오해의 소지가 많아서 부자는 천국에 못 가고 이웃을 돕는 것이 최선의 계명이라는 식으로까지 오래되고 있는 본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내용에는 아주 중요한 의도가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놓치면 이 본문은 정말 엉터리 없는 방향으로 나갈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천국 가는 방법, 구원을 얻는 조건 같은 것을 제시하시려고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질문에 틀린 것을 대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일의 조건과 자격을 제시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다 지켜라고 하셨을 때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라고 하셨을 때 청년은 못 했다.
재물이 아까워서 재물만은 포기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지금 이 청년의 문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것도 자기가 노력하고 조건을 만족시켜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해 봐라.’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죄인된 모든 자연인은 죄의 종이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갈 수도 없고, 혹 소원한다 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우리에게는 그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죄가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명하고 우리를 낚아채 가는 탓이다.

청년은 계명을 지키라고 했더니 다 지켰다고 했다. 여기에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 하셨다면,
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사랑하라”이다. 그러나 못했다.

왜 못했는가? 이 청년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자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실력과 힘이 무엇으로 본인에게 확인되어 있느냐 하면 부자인 것으로 확인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자가 대접을 못 받는다. 그러나 다른 선진국에서는 부자가 대접을 받는다. 다른 선진국에서 부자가 대접을 받는 이유가 그만큼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 수준에 못미친다. 그래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일들을 보면 일부 부자들이 정치권과 결탁이 되어 있어 다 싸잡아 부자는 늘 점수를 못 받는다. 청년이 부자인 것은 지금 이 사건의 내용에서 아주 중요하다. 청년은 열심히 살아서 부를 쟁취했으며 그 쟁취한 것이 그의 그에게 자신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질문인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에 대하여 대답하시는 것이다.
‘네가 조건을 만들어서는 절대 못 간다. 낙타가 바늘 위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은 죄인 된 인간들의 본성에 죄성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앙을 가져도 은혜와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바쳐 신을 감동시키는 일반 종교로 버무려지기가 일색인 것이다.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기독교 신앙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은혜인 것을 놓치고, 정성이라고 오해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모든 성도에게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은혜를 구하는 것마저도 정성으로 구해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혜를 정성으로 얻는다고 생각하면 은혜가 이미 은혜가 아니고 훈장이 된다. 간단한 듯 싶은 이 원리가 그렇게도 우리에게는 어렵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고 은혜이다. 죄를 이기는 것도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가 성화에 있어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죄를 이길 신앙의 승리를 쟁취할 능력을 달라고 하지 말고 은혜를 달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이미 주셨다고 하실 것이다. 이미 예수님을 믿은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시고 승리이시고 지혜이시고 모든 것이다.

기도 많이 해서 되었고 은혜를 구한 것까지도 자기 자랑이 된다면 우리는 아직도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필요와 구함의 정답이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자신의 소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복주심 안에 모든 복을 이미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가장 이해하기 좋게 회개에다가 비교해 보자. 회개는 일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다시 신뢰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용서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내가 내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 앞에 나를 순종시키지 않았던 자리에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 주도권을 맡기고 복종하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우리는 회개를 어떻게 하는가? 만회를 하려고 한다. 우리 마음에 죄책감이 생기고 켕기면 갑자기 감사헌금을 확 낸다는 말이다. 그것은 본인이 느끼기에 스스로 어떤 심리적인 효과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확실한 증거이다.
잘못된 행위에서 회개한답시고, 또 어떤 거룩하고 진실된 행위로 만회를 하려는 것은 행위에서 행위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뀐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가 자신을 의지해서 지은 것이다. 회개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행위와 공로로 근거하려고 했던 자리로부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리로 바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고 방법이 없는 도무지 만회할 길이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일 곤란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결정적인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제일 골치 아프다. 신앙인으로 큰 잘못이 없다. 성실히 살고 교회에서 하라는 것 다 하고 표정도 그날이 그날 같고 남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뚜렷한 소신이 있는 것도 아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을 의지하는 죄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
더 큰 욕심을 낸 사람들이, 더 큰 소원을 가졌던 사람들이 죄의 무서움을 더 잘 확인하거나 또는 그 반대도 된다. 큰 죄를 지었던 사람만이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데에 대하여 해답을 얻는다. 그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작정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베푸신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우리에게는 감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어떤 결과를 확인하는 족속이다.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하나님께서 왜 날 사랑하시는가를 아무리 따져도 이유가 없을 때,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이 드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자신이 없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이유는 은혜의 법칙은 이해 가능한 법칙이 아닌 탓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이런 면에서 늘 세상이 만든 일반 신들과 별 차이 없이 자꾸 혼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냐 할 때 부자지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이 실감이 잘 안 난다. 왜냐하면 자격도 없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리도 없으며 도리어 기독교에 손해가 되는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게 된다.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왜 두려움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은 심판의 결과를 나에게 원인으로서 묻는 법칙으로 알고 있을 때 두려움이 있다. 심판 날에 내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텐데 내가 한 것만큼. 내가 간 것만큼이라고 원인의 결과의 법칙과 행위의 법칙을 적용하는 자에게는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것만큼 받는 존재가 아니라 행한 대로 심판받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다.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관계는 한 것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서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 즉 기독교 신앙의 안전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리에게 허락한 요구하는 신앙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잘잘못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라고 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도움이 안 되면 큰일이다.

정당한 신앙생활을 하고 신앙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하루에도 열두 번쯤 자살할 마음이 생긴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이렇게 살고 무슨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은 신앙 의식이다.
거기에 대한 해답이다. 하나님과는 남남의 관계가 아니라, 무서운 심판자와 죄인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다.

★왜 사랑을 논하는가? 관계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가? 사랑의 관계다. 왜 관계를 논하는가? 우리에게 그 관계의 본분을 요구하기 위해서이다.
★관계를 성립하는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성화가 아니라, 관계의 분분을 요구하는 것이 성화인 것이다. 이해하겠는가?

에베소서 4장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구원 얻지 못한 자들의 죄인된 상태에 대하여 말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 4:20)
선한 일을 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탓에 성화라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그것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건이 성립했기 때문에 요구되는 `본분`이다.

★이것을 실패하면 관계가 실패되는 것이 아니라, 이 요청은 관계가 성립이 됐기 때문에 따라오는 본분이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본분을 못 지키는 것 때문에 관계를 의심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책감이나 심지어 절망마저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가지는 감각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를 지은들 무슨 겁날 것이 있고,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가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지는 않는다.

에베소서 5장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재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곳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 5:1-3)
★성도가 되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성도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본분인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지금 책임져야 하고 우리가 지금 제일 민감한 신앙의 현실인 구원은 얻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신앙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우리 자신을 평가하기에서 성경적 안목을 가져야 하는 부분들이다.
여기서의 실패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관계의 실패로 보기도 하고, 여기서의 성공을 말하자면 구원 자체에서 이 성공이 한꺼번에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것이나 후자의 것이나 둘 다 구원에 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온 것이다.

구원의 양 측면이 있는 즉각적이고 완성적인 신분의 구원과 함께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수준의 구원 즉 ‘성화’라고 하는 이 부분에 대한 둘의 구별과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되어 있고, 이미 완성되었고,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혼동과 오해와 심지어 심각한 구원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회의로까지 몰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이해와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겪는 혹 안타까움이나 혹 눈물이나 혹 두려움이나 혹 절망이나 낙심마저도 따지고 보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가지는 가책인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생각해야 된다
★그리하여 이미 출발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우리의 힘이 나오는 것을 기억하여 더 큰 믿음으로 극복하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 속에서 우리의 모든 구원이 완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