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신비(2006)_구원의 완성]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연합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성화를 이루시고 그는 연합으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시다는 내용을 증언하고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구원 문제를 논할 때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전적인 은혜로 구원 얻은 것을 믿는다.
그것은 한 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작정과 일하심의 불변성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사 나를 죄에서 꺼내신 것처럼, 다시 살아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성화를 이루고 계시고 그 성화가 영원불멸할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 있다는 확신은 대부분 적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우리의 신분의 구원이 단 번에 끝나버리고 완성되는 데 비하여, ■우리의 수준의 구원인 성화는 점진적인 탓이다.
■점진적이라는 것은 단번에 완성이 되지 않아, 믿음의 현실 속에서 실패를 맛보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해 한다. 이것이 자라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이 선언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지는 신분에서의 구원이나 수준에서의 구원이나 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나를 묶어 그분의 영원하신 약속 안에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미 일어났으나,
■아직도 그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 체험되는 것을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된다.
우리가 예수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다르다,라는 생각을 한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올바른 행위를 요구해 왔고 우리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믿지 않을 때와는 달라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이렇게는 오해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올바로 살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더 쉽게 얘기하면 신앙생활에 실패하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믿지는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신분을 수준으로 자꾸 평가하려고 한다.
수준의 실패로 신분의 실패를 우려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거나 손상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
대부분 신앙생활이 만족치 못하면 뭔가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하게 되지만, 관계를 위해서 환심을 살 노력을 하면 안 된다.
구원을 얻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자체가 요구하는 수준에 미흡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꼭 해야 되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신분을 걱정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궁극적으로 신앙에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종하고 쓸 만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시작하셨고 그 과정이 있고 이루실 목표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점수를 받느냐에 따라서 보상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죽으셨는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지도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주셨다. 이것은 이미 구원에서 배웠고 확인하고 있다.
똑같다. 우리의 성화에서도 우리의 못난 것과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절망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찾아오셨고 시작하신 분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실천과 책임에 대하여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덜 사랑하시거나 우리와의 관계에 어떤 손상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인간이 가지는 끊임없는 자기 의와 자기 근거를 가지려는 발상 때문에 나온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구원 얻은 모든 자녀들을 하나님은 성화의 완성으로 인도하셔서 궁극적인 영광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푸시며 간섭하시며 사랑하시며 능력으로 이루실 것이다. 이 사실을 구원해서 확인하는 것처럼 성화에도 적용시켜 확신 할 줄 알아야 된다.
구원을 논하면서 그 구원이 오직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 것이 없지 않느냐라는 일종의 방임주의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죄에서 벗어나고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거룩의 완성과 영광의 승리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구원이 그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얻은 구원에 감사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물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낳으시고 그분께서 기르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능력으로 죄와 형벌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완성과 내용이 채워짐과 그 완성을 위하여 지금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간섭을 받으며, 인도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묶여 있다는 것을 에베소서 1장의 내용으로 확인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간섭 속에서 지금 성화의 완성을 향한, 구원의 완성을 향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할 일을 다 하셨으니 이제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할 일만 남았다는 식으로 율법주의로 갈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주의라는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하여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 것으로 은혜는 다 마쳤고, 이제부터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성화와 구원 얻은 이후의 신자된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배제하는 식의 생각이 있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갚는 개념도 아니고,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하여 내가 주님을 위한다는 그런 개념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참다운 목표인 아버지를 닮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자리까지 가는 신앙의 순종인 것이다.
선한 일에 열심하는 것은 친 백성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닮고 그분께서 주시고자 하며 그분께서 목표하시는 것으로 채우려는 신앙적인 발상이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빚을 갚는다는 개념과는 근본적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고 있지, 우리의 유용성이나 우리의 열심과 열정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이런 문제를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믿음의 문제가 된다.
우리가 생각할 때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승리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값없이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면 누구를 실족지 않게 하고 완전한 신앙을 지켜야 하고 말이나 행동이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옳은 것과 그런 것을 분별해야 되며 지켜야 되며 질서와 기준을 점 돌봐줘야 되고 그리고 한없이 용서해야만 된다고 한다. 사람을 용서하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이건 도무지 불가능한 요구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되는가? 예수께서 이 물음에 비유를 덧붙여 우리에게 이해시킨다. 눅 17:7-10은 이상한 비유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이것이다. 종이 유능하고 열심히 했다고 가족이 될 수 있느냐,라는 이야기이다. 종이 유능하면 가족 이상으로 친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훨씬 냉정한 원칙의 문제이다. 가족과 종은 다르다.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너희는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가 유능하면 기도가 받아들여지고 너희가 쓸모있으면 그 믿음의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자녀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가족에게 준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 그 사랑으로 만족과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 하시고 이루시고야 만다는 사실에 입각한 믿음이며 확신이고 감사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움직여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승리하게 하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꾸로 확인하려는 이 전후가 뒤바뀐 발상을 가지면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스스로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지, 우리에게 존재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이유와 원인을 가지시고 시작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구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성화에 대해서도 동일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축복을 받았을 때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해서 복을 받은 것이지, 잘했다고 상주시고 못했다고 벌주시는 것은 없다. 벌은 없다.
그러나 무엇은 있는가? 꾸중과 교정은 있다. 그대로 놔두면 안 되니까 꾸중과 교정을 하신다. 교정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한 만큼 혼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을 기뻐하듯이, 구원을 얻은 자의 신앙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고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못난 것을 많이 봐야 하기 때문에 괴롭고 부끄러울 것이지만, 이것을 즐거워해야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결코 놓지 않으신다. 구원에서 그랬듯이 성화에서도 성화에서도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한 지금의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심과 간섭하심에는 한 치의 오차가 없고 실패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구원의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의 실패와 못난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그 인도하심의 신실함을 확인하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