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8 / 예레미야 45:1-5 / 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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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5장이다. 짧은 장이다. 여기 나오는 바룩은 아마 당시에 서기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글을 쓰는, 필사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지식 계급이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옛날 사회에서 중요한 문서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을 책임졌고,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성경을 번역하는 일, 그리고 예레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그 모든 경고들이 이 바룩에 의하여 쓰여져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셈이다.
여호야김 4년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 쓰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예레미야 36장에서 예레미야의 경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당시 왕이었던 여호야김이 듣지 않고 예례미야가 쓴, 그 말한 내용들, 바룩이 그때도 썼는데,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왕 앞에서 읽게 하고 읽고 나면 칼로 읽은 데를 잘라서 앞에 있는 화로에 태워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제 그 이후에, 그러니까 여호야김 왕이 이 모든 못할 짓을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했던 말씀을 다시 기록해서 남기게 했다. 이 45장은 여호야김 다음에 여호야긴이 왕위 석달만에 잡혀가고 그다음에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이 되어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자기 자식들이 죽고 두 눈이 뽑혀서 잡혀간 이야기 후에 이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나오고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되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거부는, 그들이 약속의 민족이고 역사 속에 하나의 기적적인, 자기 백성을 향한 보호와 기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일 크게 출애굽 사건이 그랬고, 사사기에 반복적으로 나오고 가나안 전쟁에서 이긴 일들도 또 히스기아 왕 때의 기적적인 구원도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고, 자기 이름을 두신 성전이 헐리게 놔두고 나라가 망하고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대로 되었다.
우리는 이 45장 이전의 마지막 내용까지 알고 있다. 모두 포로로 잡혀가고 그 남아 있던 하층 백성들과 또 순순히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 고급 관료들 일부분이 예레미야와 바룩을 붙잡아서 함께 애굽으로 도망간 사실도 알고 있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애굽으로 피난 온 자들은 다 저주를 받아 칼에 죽거나 염병에 죽을 것이다라는 무서운 경고도 듣게 되고 예례미야는 거기서 죽게 된다.
이 모든 역사 끝에 바룩의 얘기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그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성경의 어떤 설명, 어떤 위로, 어떤 깨우침 같은 것이 여기 있다. 여기 본문 2절을 보면;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해서, 바룩은 예레미야같이 선지자도 아니고 예레미야와 비교하면 일개 필사본을 만든 기록자에 불과한데도 그를 지목해서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의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바로 그게 고단한 거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바룩도 공범자로서 잡으려고 했고 우리는 예레미야가 여러 번 갇혔다 풀려났다 숨었다 했던 사실들을 알고 그를 죽이려는 모든 권력들을 피해서 살아야 했고 동족들에게 미운 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바룩도 당연히 그 처지에 동참하게 됐고 그의 생애에 거의 대부분을 이렇게 나라가 망하는 것도 보았고 모든 자기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처참한 꼴도 보았고 애굽까지 도망 와야 됐었고 거기서도 자기네를 붙잡아 온 자들이 자기네를 멸시하고 저주하는 속에서 외국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자기 인생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
근데 이 바룩이 이렇게 얘기하는 데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답하시느냐 하면 4절에;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 하겠다" 그런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징벌은 전 세계적인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보통 성경을 읽으면서, 혹은 신앙인으로서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는 이분법적인 것이다. 잘하면 복 받고 못하면 벌 받는다인데, 바벨론 포로를 당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이렇게 연결을 해보면 그들은 결국 다른 대책 없이 나라가 망하며 성전이 훼파되고 포로로 70년 생활을 하게 되지만 마침내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바벨론 포로라는 이 엄청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무시무시한 재난이지만, 돌아올 것이다.
그럼 그동안에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가? 남의 나라에 가서 자기네 나라 말까지 다 잊어버리고 돌아올 때는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은 소수고 아람어를 하게 되어서 예수님 성욕신 공생애 때에도 보통 쓰는 말은 아람어였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되는 그 암흑의 시간들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여기 당장 네가 고단하고 힘들다 그러느냐? 나는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고 뽑기도 하고 깨치는 줄 모르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말하자면 바룩의 고통에 대한 답으로는 '뭘 그까짓 것 갖고 그러냐 나는 더, 더 할 거다' 이런 말이라기보다 '내 심정은 어떻겠느냐?' 그런 말씀이다.
'내가 세웠고 내가 약속했고 내가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들을 뽑아야 하고 그들을 꺾어야 하고 그들을 울게 해야 되는 내 마음은 어떻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말하자면 바벨론 포로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이라면 울 필요가 없고 가슴 아파 할 필요가 없다. 뽑아버리고 지워버리고 다시 하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시고, 우리가 구약 거기 역사 기록을 보면 불순종한 아담을 받으신다. 그에게 자식을 주어서 그가 가인이라는 이름을, 나중에 셋이라는 이름을 자식들에게 준단 말이다. '생명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대홍수가 있지만 노아가 있고, 바벨탑에서와 같이 전 세계적인 반란과 불순종이 있지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는 것들을, 잘못한 것을 다만 꾸짖고 회개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는, 앞에 있었던 우리의 잘못을 우리와 씨름을 하셔서, 얍복나루 야곱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씨름하여 우리를 항복시키기까지 애를 쓰시는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에 부모님이 우리 보고 그랬을 거다. 어머니가 '아휴, 저게 내 웬수지~' 예수를 믿으면 다르게 말한다. '저게 내 십자가지~' 그런다. 애가 고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고쳐진다. 그 자식 때문에. 그 자식은 어떻게 할까? 죽일 수가 없다. 죽일 수 없다는 건 법으로 정한 게 아니라 혈육의 정이라는 건 그렇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렇게 일하시는데 우리는 못 본다.
그냥 늘 도덕적 기준에, 그저 쉽게 매정하게 '벌 받아야 돼. 벌 받아도 싸.' 이런 얘기나 하지,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서 심혈을 기울여서 인류역사를 끌고 오고 있는지..
그러니까 바룩 보고 '네 고통이 크다고 한들 나 같겠느냐?'라고 얘기하면서 여기 뭐라 그러냐 하면 5절;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의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하리라"
이게 그 생명이 본인이 유지 보존한 생명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빼앗아서 억지로 남겨놓은 것 같은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이다.
어디든지 가면 바룩이 자기 안위를 걱정해야 되고 위협과 불안 속을 걸어야 하는 인생을 살 건데, 그 생명을 하나님이 지키리라 그런다.
바룩, 그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세워 말씀을 주신 그 말씀을 기록한 정도의 서기관에 불과한데, '대선지자가 되어 내가 이 시대와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리라' 하는 무슨 이런 웅장하고 장렬하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저는 쓴 거 밖에 없어요' 라는 정도의 사람이 이렇게 두고두고 일을 한다.
예레미야를, 이게 얼마나 오래 전 얘기인가?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람을 지금 우리가 만나보고 있지 않는가? 그의 전한 예언이 역사적으로 사실이었다는 것을 보고 있고, 또한 두고두고 약속하신 것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70년만에 회복되는 것도 보고 있는 현장까지 이 말씀들이 바룩에 의해서, 아무도 그 이름은 기억하지 않을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눈물과 한숨과 불평 속에서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신앙생활을 의기양양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쉬운 이해이다. 신앙생활은 하기 싫게 한다.
'너는 죽지 않는다' 이건 굉장한 얘기다. '이 일은 계속 후손에게 넘겨줘야 된다. 그리고 네 시대는 네가 책임을 지고 다음 세대는 그 시대에 또 너 같은 사람을 내가 붙잡아 이 일을 계속하리라' 이게 예레미아 45장의 가치인 것이다.
여기에도 지적한 것 같이, 5절 다시 보면 "네가 나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위대해져서 하나님의 일을 내가 완성해 드리겠다' 라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비전을 가져라.' 그건 사실 성경하고는 상관없는 거다. 그런 비전을 가진 위인은 성경에 없다. 모세도 갖지 않았고 당연히 아브라함도 갖지 않았고 엘리아도 갖지 않았다. 그들은 다 질색을 했다. 그들이 한 것은 위대한 해결이 아니다. 하나의 증언이 남았을 뿐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쥐고 계시다. 하나님이 약속된 나라를 지키고 있다.
■하나님이 그가 부른 백성들 개인개인들을 위하여 지금 일하고 있다. 그 일은 한 번 두 번 어떤 조건을 붙이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전 생애에 걸쳐 그리고 더 크게 전 역사에 걸쳐 세계적으로, 온 땅 끝까지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이 전파되어야 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 많은 증인들을 불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너희는 제사장 나라이고 너희 각각은 다 선지자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생애 속에서, 바룩이 이거 쓰고 하는 걸 이렇게 뭐 나와서 무슨 단상에 올라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뭘 이걸 작업을 한 게 아니라, 숨어서 끄적끄적 이 작업을 했었을 것 아닌가?
■●우리가 매일 이게 뭔가 싶은 인생, 이것도 무슨 큰 사명이란 말인가 싶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당하는 모든 일들, 우리에게는 이렇게 느껴지는 것 - 너무 사소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쓸모없는 것 같고, 존재 자체가 버거운 - 그 우리의 존재와 인생이 하나님께서 큰 일을 하시는 조건이요 방법이라고 얘기한다.
생각해 보라.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도시락으로 싸온 한 어린 아이의 점심으로 수천 명을 먹인다.
■●기적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영웅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신다. 충성된, 작은 일에 충성하는 하나하나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빗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뭘 못하느냐 하면, '이 정도는 돼야 돼'라는 우리의 어떤 기준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이상을 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과 실력 때문에, 그 이하의 사소한 것은 침묵해버린, 외면해 버린 그런 존재 그런 인생이 되게 하고 말았다.
그러니 한 번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 한국교회 초대교회 선교사들 얘기는 순교로 얼룩져 있다. 순교란 뭐냐 하면 그들이 목적하고 온 것을 다 이루기도 전에, 절반도 이루기 전에, 몇 년 안 가서 그냥 죽어버린 거다. 순교가 방법이라는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했기 때문에 된 것 이상으로,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된 것이 오늘 우리를 만들었다라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야 되는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말인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 우리 그동안의 생애에 할 수 있었을 때 뭘 했었나 한번 돌이켜 보라. 우리가 할 수 있었을 때 했던 건 시시한 일 밖에 없다. 지금 할 수 없는 것도 우리가 믿음을 방해를 받는가? 무슨 기도를 방해를 받는가?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지금만큼 깊이 도전을 받은 때가 어디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훨씬 좋은 조건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모여서 웃고 떠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고 그것이 복이고, 지금은 억울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뭘 바라는가? '너는 나를 위하여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이렇게 원망하는 그것이, 내가 일하는 가장 큰 기적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얘기한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도 우리가 얼마나 오해를 하느냐 하면, "나는 죽어야 한다". 베드로가 당장 그랬다. '그리 마옵소서. 내가 주님 죽는 거 방관하고 있지 않겠습니다. 못 죽습니다'. 무슨 꾸중을 들었다고? "사탄아!" 였다. "사탄아!" 베드로는 뭘로 쓰였나? 여태까지 베드로는 뭘로 쓰이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로 쓰이지 않는가?
●그는 세 번 부인으로 쓰이고 있다. '베드로도 했는데..'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것보다야 어떻게 더 못하겠느냐? 그걸로 충분하다.' 그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긴데, 뭐가 와서? 왜 우리를 다 기준을 높여서 할 수 없는 데까지 위인이어야 되고 전능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모두에게 주어진, 한 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신앙생활과 증인 노릇》을 포기하게 됐냐? 이거다.
그건 코로나가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아니면 한국 교회가 가진 그 꿈에 부풀렀던 솜사탕 같은 잘못된 상상일 것이다.
■●.신앙생활은 자기 몫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의 조건,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자식, 누구의 친구, 누구의 동료, 누구의 이웃을 지키는 것이 없다. 여기를 해야만 한다!!!
이런 큰, 나라가 망하고, 희망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와 적국의 이 수탈과, 도망가서 외국 땅에서 목숨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되는 그 조건 하에서, 거기서도 자기네 같은 동포들에게 미움을 받고, 원치 않는 자들의 손에 붙잡혀 타국까지 와서,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사면초가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 약속을 주는 것이다; '네 생명은 노략질해서 얻은 것 같이 내가 모두의 손에서 붙잡아 네 생명을 지킬 것이다. ■네 자리 네 지위 네 역할은 두고두고 오고오는 시대에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내가 이렇게 지켜 나를 증언하고 내 하는 일에 함께 할 것이다.' 이게 바룩이다.
우리가 가졌던 꿈. 누구를 좋아하는가? 아브라함? 다윗? 요셉을 좋아한다. 요셉. 요셉이 결국 총리가 됐으니까 좋아한다. 우리는 결과를 좋아한다. 하나님이 우시고 하나님이 애타하신 장면에는 우리는 동참을 안 한다. 가장 거짓된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면 어느 자리에 가서 섬기겠는가?
■'목사님,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무슨 위로가 필요한가? 뭐가 부족한가? 시시덕거리고 놀던 게 중단된 거 외에 뭐가, 뭐가 지금 안 되고 있는가?
■왜 아무것도 못 하는가? 이렇게 이 기간을 지나는 동안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아서 다시 만났을 때 번쩍해야 되지 않는가?
●지금이 얼마나 귀한가?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도 내 시간을 뺏지 못한다. 지금은 참으로 중요한 기회이다
교회들도 그렇다.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에 목을 맨 바람에 얼마나 많은 시험과 유혹 속에서 끌려다녔는가?
이제 그것이 없어졌다. 몇 명이면 된다고? 몇 명이면? 아브라함이 물어봤을 때 하나님이 어디까지 양보하셨나? 10명이면 된다고 양보하셨다. 무슨 더 큰 것을 노리겠는가?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뺏겼고 책임을 또 밀었는지 생각하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이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것이 짐으로 고통으로 온다면 그게 정당한 것이다. 그걸 피하지 말라. 타협하지 말라. 거기에 항복하지 말라.
●일어나 우리의 자리를 지켜, 하나님이 하시는 귀한 기적과 영광의 한 존재,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한다.
우리 현실은 모든 것을 걱정해야 되는 때이다. 그 모든 것이란 결국 쉽게 살고 쉽게 만족하는 것이다.
이 코로나로 인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뭔가?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끝은 무엇인가? 뭘 해야 되나? 어떻게 해야 되나?
진지한 답을 낼 때까지 우리의 영혼을 내리 눌러 도망가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돌이켜 이전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위대한가를 깨우치는 각각의 생애가 되도록,
이 기회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시고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