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의 구윈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긴밀하고 가장 크게 연결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의 부름'이다

nazunzaro 2020. 11. 9. 16:4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가장 큰 불신앙과 하나님을 분노케한 사건은 우상숭배였다.
그런데 이 우상숭배는 단순히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을 섬기는 그런 식의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바알(우상)을 섬기는 것이 혼합된 우상숭배였다.
뭐가 다르냐 하면,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다른 걸 순종하고 다른 신을 믿었다,라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을 섬기듯이 섬겨서, 하나님을 바알로 또는 바알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 구약식으로 얘기하면 여호와 신앙의 본질,  '여호와가 누구냐' 하는 그 유일함, 그 특별함을 저들이 혼돈하고 왜곡하는 일이 생긴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뿌리 깊은 문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것 같다.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돈 건강 형통함 등을 얻기 위하여 그 수단이나 능력으로써 하나님을 믿는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소원하는 바를 들어 주는 우상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고 있는게 된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더 확인하기 위해서 어떤 형상을 만드는 걸 금하는 데에는 ■그 형상이 가지는 제한성 이상으로 그 형상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각하여 우리 힘으로 그 작품을 만듬으로써, 신을 우리가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무엇을 조작하나?
골로새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면, '탐심은 우상숭배라' 이렇게 지적한다.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지적하는 것은, 우상이란 수단, 능력이고, 소원은 주인인 비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탐심이다.

오래된 예화 알라딘의 램프에서, 램프를 문지르면 마왕이 나온다. 이 마왕은 알라딘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지만 주인은 알라딘이다. 마왕이 나타나면 꼭 이렇게 말을 하는 것으로 그 책에 소개되고 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이게 문제다. 탐심이란 내가 가치를 정하고 내가 목적을 정하는 것이요, 신은 그것을 이루어 주는 수단과 방법에 불과함으로써, 실제적인 주인은 우리가 되는 것, 그것이 우상이다.

성경에 이스라엘은 자기네가 자기네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에 예배하면서 '이는 여화와 하나님이라'라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 속에서 이 우상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하나님의 지적과 이스라엘의 답변 사이에 늘 촛점이 어긋난다. 하나님이, "내가 누군지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뭘 잘못했습니까?'

이 가장 크게 부딪히는 문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이렇게 답변하고, 하나님은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 너희의 헛된 재물을 내가 받는데 지쳤다.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성경 말라기에 그 하나님의 당신에 대한 설명과 자기가 불러낸 백성에 대한 요구와 목적과,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고 기대하는 하나님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고 말하자면 애굽에서 구해내는 데는 이 목적이 유일한 것이다(출 6:2-7).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주인되시고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하기 위함'이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긴밀하고 가장 크게 연결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의 부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