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바울은 반대를 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활이 있다' 하는 말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거기에 바울이 묶여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왜 거기에 답을 주시지 않는가?' 씨이저를 회개시키고, 아니 여기 무슨 벨릭스부터 회개시키고, 유대인들을 다 '죽이고 회개시키고'라는 강제력을 쓰지 않으신다.
부활이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신앙의 기둥들이다.
■예수로 인한 복음,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는 죄의 용서와 죄인의 승리, 죄인인데도 죄인으로서의 가진 승리가 아니라, 죄인이고 심판 받은 자에게 주는 용서를 넘어, 그 용서 후에 가져오는 영광을 약속하고 있다. 그게 부활이다.
우리가 다 아는 예수 안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누가 하겠다는 건가? 누가? 전부 하나님이다. 전부 하나님.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우리의 체험과 우리의 감격과 헌신과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거다.
전부 하나님의 주권, 그 분만이 가지는 시작, 그 분만이 가지는 뜻 으로 모든 것이 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주권이 온전히 돌려지고 있고, 그리고 그 일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느냐 할 때, 계속 예수이다.
■그 많은 얘기들, 복, 사랑, 아들됨, 은혜, 죄사함, 비밀, 통일이 모두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구체적 증거요,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누군가?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당신이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요, 우리가 만든 죽음을(우리의 이기심, 자기중심, 자기 의, 상대에 대한 적대감이 만든 죽음, 헛됨의 가치세계를) 반전시켜,
영광의 부활을(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로 상대를 살리는 가치세계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이다(이것이 예수다)
거기에(예수의 영광의 부활, 상대를 살리는 예수의 용서와 관용 섬김 온유 겸손의 새로운 생명적인 가치체계에는) 뭐가 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이. 죄인된 자가 자기의 죄가 뭔지 모르고 그 죄를 하나님께 고스란히 터트린, 그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역사적 사실, 역사적 범죄자. 씻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모조리 받아들이사, 그 죽음을 끌어안아 그것을 새 생명으로, 부활로 반전시킨 역사적 기적이 있는 것이다. (용서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상대에 대한 구체적인 용서를 행한, 용서로 반응한 사건이 있다)
■시간 속에서, 시간을 벗어나지 않고, 말로 하는 것 아닌, 눈물로 하는 것 아닌, 고함을 질러서 하는 것 아닌, 벼락을 쳐서 하는 것 아닌, 고스란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아는 식으로 우리가 고집한 대로 따라와 만들어낸 '예수 안에서의 승리' 말이다. (죄인된 우리에 대하여 예수가 구체적으로 하신 그 용서 섬김 관용 온유의 그 거룩함의 승리) 그 얘기를 하는거다.
뭐가 위대한 거라 그랬나?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위대한 것이다.
■왜? 복음이 뭔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셨다, 그게 복음이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 아무나 오라. 이게 복음이다.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들고 다니고 가서 보여주고 외치는 그 내용, 복음이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무엇으로 증거가 되나? 그것이 위대하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역사적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십자가이다.
■예수를 믿으면 승리한다, (우리는) 그 승리가 무슨 승리인가? 보이는 승리다. 밤낮 맨날 예수 믿어서 좋은 학교 간 거, 예수 믿어서 좋은 직장 가진 거, 예수 믿어서 헌금 많이 한 거, 예수 믿어서 무슨 무슨 선한 일 많이 한 거..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예수의 죽으심이다.(자기를 부인함이다.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함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고 가질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는데, 우리는 늘 은혜 아래 있고 복 아래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 아래 있다는 걸 아는 거다.
■억울 할 수 있는 거다. 바울은 억울 하다. 비분강개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시시해 보이지만, 시시하다는 건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하는 거다, 시시하지 않다. 무시무시하다. 거기는 그 십자가의 길이다.
영광의 길이요, 능력의 길이요, 하나님의 깊으심의 길이다. ■그러나 시시해 보인다. 하나님의 일은 기다리시는 것을 가장 우선 하시기 때문이다. 기다리신다. 돌아오기까지. 그를 항복시키고, 납득시키는 시간을 주신다.
(십자가의 길은 용서, 관용, 오래 기다려 주는 길이기에 시시하고, 지루해 보인다. 그러나 그건 영광의 길, 능력의 길,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깊으심의 길이다)
이걸 우리는 모른다. 알 수도 있지만 스스로 따라갈 수가 없다. 우리는 한마디 해서 뒤집어 놓고 싶고, 고함 한번 질러서 항복을 받고 싶다.
기다리고 계신다. 기다리고 계신다.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걸로 뭘 한다고?
■쓸모있게 쓰지 않고,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기다리고 있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신가? 아니다, 일하고 있으신다. 답없는 세상, 거짓말 뿐인 세상에서, 우리가 지쳐 절망해 드디어 깊이 물어보는 자리까지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재가가 아니다. 당신의 뜻을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이게 뭔가?' 하고 사는 모든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는 그 많은 거역과 신성모독과 불순종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이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왜 거기에 답을 주시지 않는가?' 씨이저를 회개시키고, 아니 여기 무슨 벨릭스부터 회개시키고, 유대인들을 다 '죽이고 회개시키고'라는 강제력을 쓰지 않으신다.
부활이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신앙의 기둥들이다.
■예수로 인한 복음,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는 죄의 용서와 죄인의 승리, 죄인인데도 죄인으로서의 가진 승리가 아니라, 죄인이고 심판 받은 자에게 주는 용서를 넘어, 그 용서 후에 가져오는 영광을 약속하고 있다. 그게 부활이다.
우리가 다 아는 예수 안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누가 하겠다는 건가? 누가? 전부 하나님이다. 전부 하나님.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우리의 체험과 우리의 감격과 헌신과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거다.
전부 하나님의 주권, 그 분만이 가지는 시작, 그 분만이 가지는 뜻 으로 모든 것이 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주권이 온전히 돌려지고 있고, 그리고 그 일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느냐 할 때, 계속 예수이다.
■그 많은 얘기들, 복, 사랑, 아들됨, 은혜, 죄사함, 비밀, 통일이 모두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구체적 증거요,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누군가?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당신이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요, 우리가 만든 죽음을(우리의 이기심, 자기중심, 자기 의, 상대에 대한 적대감이 만든 죽음, 헛됨의 가치세계를) 반전시켜,
영광의 부활을(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로 상대를 살리는 가치세계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이다(이것이 예수다)
거기에(예수의 영광의 부활, 상대를 살리는 예수의 용서와 관용 섬김 온유 겸손의 새로운 생명적인 가치체계에는) 뭐가 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이. 죄인된 자가 자기의 죄가 뭔지 모르고 그 죄를 하나님께 고스란히 터트린, 그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역사적 사실, 역사적 범죄자. 씻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모조리 받아들이사, 그 죽음을 끌어안아 그것을 새 생명으로, 부활로 반전시킨 역사적 기적이 있는 것이다. (용서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상대에 대한 구체적인 용서를 행한, 용서로 반응한 사건이 있다)
■시간 속에서, 시간을 벗어나지 않고, 말로 하는 것 아닌, 눈물로 하는 것 아닌, 고함을 질러서 하는 것 아닌, 벼락을 쳐서 하는 것 아닌, 고스란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아는 식으로 우리가 고집한 대로 따라와 만들어낸 '예수 안에서의 승리' 말이다. (죄인된 우리에 대하여 예수가 구체적으로 하신 그 용서 섬김 관용 온유의 그 거룩함의 승리) 그 얘기를 하는거다.
뭐가 위대한 거라 그랬나?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위대한 것이다.
■왜? 복음이 뭔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셨다, 그게 복음이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 아무나 오라. 이게 복음이다.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들고 다니고 가서 보여주고 외치는 그 내용, 복음이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무엇으로 증거가 되나? 그것이 위대하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역사적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십자가이다.
■예수를 믿으면 승리한다, (우리는) 그 승리가 무슨 승리인가? 보이는 승리다. 밤낮 맨날 예수 믿어서 좋은 학교 간 거, 예수 믿어서 좋은 직장 가진 거, 예수 믿어서 헌금 많이 한 거, 예수 믿어서 무슨 무슨 선한 일 많이 한 거..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예수의 죽으심이다.(자기를 부인함이다.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함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고 가질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는데, 우리는 늘 은혜 아래 있고 복 아래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 아래 있다는 걸 아는 거다.
■억울 할 수 있는 거다. 바울은 억울 하다. 비분강개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시시해 보이지만, 시시하다는 건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하는 거다, 시시하지 않다. 무시무시하다. 거기는 그 십자가의 길이다.
영광의 길이요, 능력의 길이요, 하나님의 깊으심의 길이다. ■그러나 시시해 보인다. 하나님의 일은 기다리시는 것을 가장 우선 하시기 때문이다. 기다리신다. 돌아오기까지. 그를 항복시키고, 납득시키는 시간을 주신다.
(십자가의 길은 용서, 관용, 오래 기다려 주는 길이기에 시시하고, 지루해 보인다. 그러나 그건 영광의 길, 능력의 길,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깊으심의 길이다)
이걸 우리는 모른다. 알 수도 있지만 스스로 따라갈 수가 없다. 우리는 한마디 해서 뒤집어 놓고 싶고, 고함 한번 질러서 항복을 받고 싶다.
기다리고 계신다. 기다리고 계신다.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걸로 뭘 한다고?
■쓸모있게 쓰지 않고,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기다리고 있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신가? 아니다, 일하고 있으신다. 답없는 세상, 거짓말 뿐인 세상에서, 우리가 지쳐 절망해 드디어 깊이 물어보는 자리까지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재가가 아니다. 당신의 뜻을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이게 뭔가?' 하고 사는 모든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는 그 많은 거역과 신성모독과 불순종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