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31:31-34)
새 언약에 대한 구약의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다.
율법으로 한 약속과 다른 약속을 주신다.
율법으로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심성을 고치는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한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회복, 부활 생명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호세아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가 네 남편이 되어 모두로 하여금 내가 누군지 알게 하리라' 라는 반복되는 구약의 약속 속에서 이 내용은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 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법으로 선포하시고
공증을 증인을 불러 심판케 하는 그런 식의 정도를 넘어서,
■우리의 뼈 속깊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어떤 생각의 가장 깊은 데까지 우리를 항복시키고 설득하기 위하여 찾아오시고 들어오시고 씨름하여 기어코 이루어내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하겠다'는 그 약속의 실현을 말하고 있다.
표정들이 좋지 않은데, 우리 예수를 믿어보면, 누군가가 그 간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말씀을 한번 드렸다. 왜냐하면 간증을 들으면 내가 동일한 경험과 확인을 받고 있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구나라는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확인은 말하자면, 내가 이해하고 내가 납득한다는 것으로 밖에는 눈금이 없다.
하나님이 그 눈금을 맞추시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요구했던 어떤 확인 그 한가지 사건으로써 나를 확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인생과 한 존재로써 내가 걷는 인생의 정황과 현실의 모든 도전과 갈등과 고민과 고통 속에서, 답이 없고 이해가 안되고 하는 그런 길들이 나중에 보니까 내가 내던져진 인생이 아니라, 내가 확인해야 되고 꼭 알아야 될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어떤 문제 앞에 세우고 끊임없이 나를 두드려 생각을 중단할 수 없게 하고, 간단한 답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사,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만이 답이라는 걸 받아내는 길들로 늘 붙잡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 더 남는다. 한 두번 감격하고 한 두번 확인했다고 해서, 한 두번 아멘 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형통해지는게 아니라, 지나온 건 지나온 거고, 그것 가지고 또 답이 되지 않는 일들이 계속 앞에 있다.
우리한테는 그게 수수께끼였었는 데, 왜 그런것인가?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우리가 항복하기에는 너무나 크시다는 것이다. 항복하고 알았는데, 더 있고, 더 있고, 더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이 고달프다.
쉬운 것으로 때우려 않게 하시려는 거다.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니시다. 그게 호세아서 여기에서 말하는 '내가' 이다.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보면 우리가 당하는 어떤 현실,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과 범위를 벗어나는 건 없다.
■문제는 고통스럽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만하면, 하나님 앞에 가기만 하면 저도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안할테니까 이쯤에서 타협하시죠'를 하나님이 안 하신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 호세아서에 나오는 '나는 바알과 다르다'는 것이다. '바알이 네 남편이 아니라 여호와가 네 남편인 줄 알게 하기까지 나는 놓지 않는다'.
항복을 받아 내는게, 굴복을 받아 내는게 아니다.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이셨는가'를 다 하시기까지 놓아두지 않겠다는 거다.
어느 선에서는 타협하고 그 다음부터 회개하고 다시는 죄 짓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가 없다. 신자의 인생에는 없다.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고집이, 이런 표현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거다, 타협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사야 42장 8절에 가보면 이런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있는데 우리는 늘 놓친다. 이런 부분을 제가 예전에도 인용했던 구절인데, 이 무시무시한 부분을 보아야 된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우리 어떻게 할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가?
호세아를 하면서 뜻밖에 이런 주제를 걸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 '감사하고 놀랍게도 무시무시한 하나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새 언약에 대한 구약의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다.
율법으로 한 약속과 다른 약속을 주신다.
율법으로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심성을 고치는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한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회복, 부활 생명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호세아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가 네 남편이 되어 모두로 하여금 내가 누군지 알게 하리라' 라는 반복되는 구약의 약속 속에서 이 내용은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 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법으로 선포하시고
공증을 증인을 불러 심판케 하는 그런 식의 정도를 넘어서,
■우리의 뼈 속깊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어떤 생각의 가장 깊은 데까지 우리를 항복시키고 설득하기 위하여 찾아오시고 들어오시고 씨름하여 기어코 이루어내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하겠다'는 그 약속의 실현을 말하고 있다.
표정들이 좋지 않은데, 우리 예수를 믿어보면, 누군가가 그 간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말씀을 한번 드렸다. 왜냐하면 간증을 들으면 내가 동일한 경험과 확인을 받고 있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구나라는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확인은 말하자면, 내가 이해하고 내가 납득한다는 것으로 밖에는 눈금이 없다.
하나님이 그 눈금을 맞추시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요구했던 어떤 확인 그 한가지 사건으로써 나를 확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인생과 한 존재로써 내가 걷는 인생의 정황과 현실의 모든 도전과 갈등과 고민과 고통 속에서, 답이 없고 이해가 안되고 하는 그런 길들이 나중에 보니까 내가 내던져진 인생이 아니라, 내가 확인해야 되고 꼭 알아야 될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어떤 문제 앞에 세우고 끊임없이 나를 두드려 생각을 중단할 수 없게 하고, 간단한 답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사,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만이 답이라는 걸 받아내는 길들로 늘 붙잡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 더 남는다. 한 두번 감격하고 한 두번 확인했다고 해서, 한 두번 아멘 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형통해지는게 아니라, 지나온 건 지나온 거고, 그것 가지고 또 답이 되지 않는 일들이 계속 앞에 있다.
우리한테는 그게 수수께끼였었는 데, 왜 그런것인가?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우리가 항복하기에는 너무나 크시다는 것이다. 항복하고 알았는데, 더 있고, 더 있고, 더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이 고달프다.
쉬운 것으로 때우려 않게 하시려는 거다.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니시다. 그게 호세아서 여기에서 말하는 '내가' 이다.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보면 우리가 당하는 어떤 현실,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과 범위를 벗어나는 건 없다.
■문제는 고통스럽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만하면, 하나님 앞에 가기만 하면 저도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안할테니까 이쯤에서 타협하시죠'를 하나님이 안 하신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 호세아서에 나오는 '나는 바알과 다르다'는 것이다. '바알이 네 남편이 아니라 여호와가 네 남편인 줄 알게 하기까지 나는 놓지 않는다'.
항복을 받아 내는게, 굴복을 받아 내는게 아니다.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이셨는가'를 다 하시기까지 놓아두지 않겠다는 거다.
어느 선에서는 타협하고 그 다음부터 회개하고 다시는 죄 짓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가 없다. 신자의 인생에는 없다.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고집이, 이런 표현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거다, 타협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사야 42장 8절에 가보면 이런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있는데 우리는 늘 놓친다. 이런 부분을 제가 예전에도 인용했던 구절인데, 이 무시무시한 부분을 보아야 된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우리 어떻게 할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가?
호세아를 하면서 뜻밖에 이런 주제를 걸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 '감사하고 놀랍게도 무시무시한 하나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