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2011)_5.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믿음이 뭐냐 하는 문제가 제일 어렵다.
이것을 신학적인 기대나 설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신앙인으로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나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자신을 알리시고 약속하신 것들을 '믿음'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내 믿음이란 그렇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가지는 약속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나에겐 뭐라고 할까, 추구하거나 실천하는 것보다 우선 하는 것, 본질로 게시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심으로 하는 약속들,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신의 성품으로 부른다'는 베드로후서의 표현, 또 다른 식으로 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이런 대표적인 표현이 있다.
기독교 신앙이란 믿음, 소망, 사랑, 용기, 정의 같은 덕목들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명목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모호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덕목들이 신앙의 단계나 항목으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보이셨다고 이해하는 신앙에 대한 나의 이해는 불분명해지고 만다. ★'신앙이란 인격적인 관계다, 인격적인 앎이다'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해가 자꾸 흐려진다.
이처럼 관념론으로 흐르거나 실천규범이 되면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베드로후서 1:5-7에 보면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해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하며 쭉 나온다. 그런 것들은 내가 읽었던 주석에서도 항목을 나열하는 것이나 또는 단계로 보지 않는다고 적고 있었다.
그럼 그게 뭐냐?
★'신의 성품으로의 부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당신을 알리시는데, 자신을 알리시는 목적이 바로 [ 인격적 관계 ]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를 인격적이고 경건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 어떤 규칙인 항목으로 제한하게 되면 믿음은 경직된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격과 조건의 싸움이 아니다. 그건 내가 아는 것도 아니고 깨우친 것도 아니라는 거다
어느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그냥 본거다. 대개는 감격이라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감격의 순간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거다.
그런 경우 어느 순간을 획으로 그으라, 그 이전과 그 이후라는 식으로 그으라고 하면 답답한 거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것보다 모호하다. 의식하고 있고 공감하고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은 거다.
이 불확실성이 의심으로 작용하는데, 이 의심이야말로 무언가를 가지고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은 믿음을 놓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 '놓지 않는다'는 표현이 결국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선택이 되고 의지가 되고 자꾸 그런다.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믿음을 거부할 수 없다. 왜냐면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나서 2장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로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 말씀이 왜 좋으냐 하면 '내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라는 조건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는 거다.
하나님이 누군지 아는데 내가 어떻게 부정을 하겠는가? '나를 쫓아내셔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경지에 오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갖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확인하느냐면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에서 찾게 된다.
대부분 신자들의 믿음의 현실은 다 민망하니까, 자신의 기대만큼 못 사니까, 믿음의 의욕이나 기대만큼 못 미치니까 자책감을 가진다.
자책감을 갖는다는 게 뭐냐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본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며 뭘 약속하고 있는지를 외면할 수가 없다. 실천이 되지 않아서 당황하는 거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자꾸 조건이 되고 수단이 되고 자격이 되고 하면 그게 아주 속상하다.
믿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당신의 자녀들이 부정할 수 없게 만나 주시고, 그 만남과 관계를 중단하시지 않으시는데, 나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더 많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을 내가 떠나보낼 수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
구원이라는 말도 기독교만 사용하지 않는다. 자유라든가 평화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말도.
그러나 어쨌든 우리도 같은 언어를 써야 하고 또 자기 문화나 사회나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있으니 '신자들이 저 말을 할 때 무슨 뜻이다'라는 게 같은 신앙 공동체 내에서 의미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원의 문제만 해도 은혜로 출발해서 나중에는 조건적인 구원이 되고,
믿음도 순전히 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이 수단으로 변하고, 우리가 져야 하는 책임으로 자꾸 변질된다.
사람들은 그런 경향을 보이기 쉽다. 내가 무엇을 해야 그것이 확인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다 인과법칙에 매이는 거다.
그런데 복음이란 그게 아니다. ★조건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실수가 많다.
믿음이 삶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구원론, 교회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우리가 구원론이다 교회론이다 하는 논리를 이야기하면 어떤 연속성이나 의미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경험하는 사람은 그 경험이 토막이 나 있다. 한 줄로 어떻게 묶였느냐를 본인은 모른다.
신학과 교리의 싸움은 학문적이라 할 수 잇는데, 한 개인의 경험은 굉장히 파편적이고 단절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보니, 와 있는 거다. 그래서 본인이 찾았다는 말은 쓸 수 없다.
우리 각 개인이 고민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신앙적인 고민은 머릿속에서만 하지 않는다. 그 고민을 할 동안 삶 자체는 헤매고 있는 거다. 그 헤매는 동안은 절박하다.
이게 제일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부분이다. 그 절박한 것이 길을 잃은 것 같고 답이 없는 것 같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모든 신앙인들이 사실은 어느 시점에서 그 절박함 때문에 본인의 신자된 내용적인 고민과 현실적인 선택을 외면한다. 그게 제일 나쁘다. 그런데 그게 한 답이다.
믿음이 뭐라고 보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서 당신을 알게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가지는 계획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 쪽에서 인식하자면 하나님을 알게 된 것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가지는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럼 죄란 뭐냐? 이 두 가지가 성립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죄다.
구원이 뭐냐 하면, 모르던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밀고 당기는 것 같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순종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사이를 들락날락 하는 것 같다.
은혜란 것이 뭐냐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붙잡고 안 놓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 놓으시는 건데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이 처음에 한 번 인도해 내신 뒤로는 내가 붙잡거나 놓을 수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아브라함같이 되자' 이런 설교를 듣고 자랐고,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갖자'라는 설교를 들었다. 우리는 다 그런 요구에 공감을 한다. 공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원이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안 된다.
현재 한국 교회의 공통된 불만은 신앙인격과 교회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불만이다. 대표적으로 교회에서 사랑을 갖자고 하는 거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것은 교회가 경직되어 있고 정죄만 하고 요구만 하고 우리의 실제적인 아픔에 대해서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가 그걸 겪고 살았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답이 뭐였냐 하면, '서로 사랑하자'였다. '손잡고 복음성가 부르자', '서로 돌아보자'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위적인 것, 어떤 규율을 정해 가지고는 안된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의 첫걸음이란 상대방의 형편과 존재와 특성을 용납하는 거다.
★구원의 감격이 아무리 크더라도 결국은 내용으로서는 그것보다는 더 나아갈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된다고 한다.
우리 각자가 만족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는 게 있다.
★그런데 그 더 나아가는 데는 인격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믿음과 영성이 뭘로 나타나냐 하면 결국 인격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삶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넘겨주기 위해서 정리를 하고 표현을 하고 서술을 하려고 드는 거다. 실제로 전달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진심, 곧 인격일 것이다.
사람이 승부욕을 접고 마음이 편해지는게 아니라, 승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한테 말하거나 포기하지 못한 자신의 승부욕의 결과를 보고서 이제 승부욕에서 벗어나는 거다. ★지면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거다.
우리는 평화와 확신을 생각할 때도 짐이 모두 없어진 상태를 생각하기 쉽다.
★자유라는 것도 어떤 짐을 다 벗고 아무것도 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져야 할 고통, 짐을 당연시하는 거다.
우리는 오해받는 것, 억울한 것, 외로운 것을 제일 못 참는다. 이런 것을 다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서 짐을 벗어 버리려고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고 모두를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는 예수한테 못 배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짐 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 짐을 져야 된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이웃들에게 확인받고 점검받고 싶지만 짐을 져야 한다.
사람이란 무한할 수 없다. 사람에게 무한을 주면 사람은 공허해지고 분해되니까 어떤 한계를 그어 놔야 한다.
우리의 울타리가 폐쇄되지 않도록 늘 노력해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게 용서이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토론을 할 수가 없다. ★원래 토론이나 대화는 상대방을 이해하자는 것이요 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압도하고 납득시키고 강요하려고 한다. 그런 문화가 익으려면 밀도가 높아져야 된다. 몇 십 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지식적 가난함이나 무지한 맹신주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동시에 오직 사변과 성찰만으로는 생명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건 소수의 사람만의 일이다. 이걸 다수화하려고 의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모두에게 알려져서 한국 교회가 너그러워지고 서로를 이해하겠다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럴거다. 이 책은 누가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절대 안 본다. 그걸 각오하고 하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했나? 우리를 실패자로 인도했다. 우리는 '이게 아니다'라고 하는데 전 생애를 쓴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들, 곧 주류 세력들은 평생을 쓰임 받는 사람이니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군가에게는 '이건 아니구나' 하는 것으로 전 생애를 소위 허비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게 우리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지식인으로 한 시대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면 어떻게 되느냐 할 때 그 다음에는 욕심을 내게 된다. '내가 이야기하고 내가 진심을 기울인 것은 좀 따라와 다오'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돼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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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뭐냐 하는 문제가 제일 어렵다.
이것을 신학적인 기대나 설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신앙인으로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나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자신을 알리시고 약속하신 것들을 '믿음'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내 믿음이란 그렇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가지는 약속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나에겐 뭐라고 할까, 추구하거나 실천하는 것보다 우선 하는 것, 본질로 게시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심으로 하는 약속들,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신의 성품으로 부른다'는 베드로후서의 표현, 또 다른 식으로 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이런 대표적인 표현이 있다.
기독교 신앙이란 믿음, 소망, 사랑, 용기, 정의 같은 덕목들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명목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모호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덕목들이 신앙의 단계나 항목으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보이셨다고 이해하는 신앙에 대한 나의 이해는 불분명해지고 만다. ★'신앙이란 인격적인 관계다, 인격적인 앎이다'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해가 자꾸 흐려진다.
이처럼 관념론으로 흐르거나 실천규범이 되면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베드로후서 1:5-7에 보면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해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하며 쭉 나온다. 그런 것들은 내가 읽었던 주석에서도 항목을 나열하는 것이나 또는 단계로 보지 않는다고 적고 있었다.
그럼 그게 뭐냐?
★'신의 성품으로의 부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당신을 알리시는데, 자신을 알리시는 목적이 바로 [ 인격적 관계 ]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를 인격적이고 경건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 어떤 규칙인 항목으로 제한하게 되면 믿음은 경직된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격과 조건의 싸움이 아니다. 그건 내가 아는 것도 아니고 깨우친 것도 아니라는 거다
어느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그냥 본거다. 대개는 감격이라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감격의 순간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거다.
그런 경우 어느 순간을 획으로 그으라, 그 이전과 그 이후라는 식으로 그으라고 하면 답답한 거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것보다 모호하다. 의식하고 있고 공감하고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은 거다.
이 불확실성이 의심으로 작용하는데, 이 의심이야말로 무언가를 가지고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은 믿음을 놓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 '놓지 않는다'는 표현이 결국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선택이 되고 의지가 되고 자꾸 그런다.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믿음을 거부할 수 없다. 왜냐면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나서 2장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로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 말씀이 왜 좋으냐 하면 '내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라는 조건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는 거다.
하나님이 누군지 아는데 내가 어떻게 부정을 하겠는가? '나를 쫓아내셔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경지에 오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갖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확인하느냐면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에서 찾게 된다.
대부분 신자들의 믿음의 현실은 다 민망하니까, 자신의 기대만큼 못 사니까, 믿음의 의욕이나 기대만큼 못 미치니까 자책감을 가진다.
자책감을 갖는다는 게 뭐냐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본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며 뭘 약속하고 있는지를 외면할 수가 없다. 실천이 되지 않아서 당황하는 거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자꾸 조건이 되고 수단이 되고 자격이 되고 하면 그게 아주 속상하다.
믿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당신의 자녀들이 부정할 수 없게 만나 주시고, 그 만남과 관계를 중단하시지 않으시는데, 나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더 많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을 내가 떠나보낼 수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
구원이라는 말도 기독교만 사용하지 않는다. 자유라든가 평화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말도.
그러나 어쨌든 우리도 같은 언어를 써야 하고 또 자기 문화나 사회나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있으니 '신자들이 저 말을 할 때 무슨 뜻이다'라는 게 같은 신앙 공동체 내에서 의미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원의 문제만 해도 은혜로 출발해서 나중에는 조건적인 구원이 되고,
믿음도 순전히 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이 수단으로 변하고, 우리가 져야 하는 책임으로 자꾸 변질된다.
사람들은 그런 경향을 보이기 쉽다. 내가 무엇을 해야 그것이 확인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다 인과법칙에 매이는 거다.
그런데 복음이란 그게 아니다. ★조건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실수가 많다.
믿음이 삶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구원론, 교회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우리가 구원론이다 교회론이다 하는 논리를 이야기하면 어떤 연속성이나 의미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경험하는 사람은 그 경험이 토막이 나 있다. 한 줄로 어떻게 묶였느냐를 본인은 모른다.
신학과 교리의 싸움은 학문적이라 할 수 잇는데, 한 개인의 경험은 굉장히 파편적이고 단절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보니, 와 있는 거다. 그래서 본인이 찾았다는 말은 쓸 수 없다.
우리 각 개인이 고민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신앙적인 고민은 머릿속에서만 하지 않는다. 그 고민을 할 동안 삶 자체는 헤매고 있는 거다. 그 헤매는 동안은 절박하다.
이게 제일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부분이다. 그 절박한 것이 길을 잃은 것 같고 답이 없는 것 같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모든 신앙인들이 사실은 어느 시점에서 그 절박함 때문에 본인의 신자된 내용적인 고민과 현실적인 선택을 외면한다. 그게 제일 나쁘다. 그런데 그게 한 답이다.
믿음이 뭐라고 보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서 당신을 알게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가지는 계획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 쪽에서 인식하자면 하나님을 알게 된 것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가지는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럼 죄란 뭐냐? 이 두 가지가 성립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죄다.
구원이 뭐냐 하면, 모르던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밀고 당기는 것 같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순종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사이를 들락날락 하는 것 같다.
은혜란 것이 뭐냐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붙잡고 안 놓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 놓으시는 건데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이 처음에 한 번 인도해 내신 뒤로는 내가 붙잡거나 놓을 수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아브라함같이 되자' 이런 설교를 듣고 자랐고,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갖자'라는 설교를 들었다. 우리는 다 그런 요구에 공감을 한다. 공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원이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안 된다.
현재 한국 교회의 공통된 불만은 신앙인격과 교회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불만이다. 대표적으로 교회에서 사랑을 갖자고 하는 거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것은 교회가 경직되어 있고 정죄만 하고 요구만 하고 우리의 실제적인 아픔에 대해서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가 그걸 겪고 살았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답이 뭐였냐 하면, '서로 사랑하자'였다. '손잡고 복음성가 부르자', '서로 돌아보자'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위적인 것, 어떤 규율을 정해 가지고는 안된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의 첫걸음이란 상대방의 형편과 존재와 특성을 용납하는 거다.
★구원의 감격이 아무리 크더라도 결국은 내용으로서는 그것보다는 더 나아갈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된다고 한다.
우리 각자가 만족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는 게 있다.
★그런데 그 더 나아가는 데는 인격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믿음과 영성이 뭘로 나타나냐 하면 결국 인격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삶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넘겨주기 위해서 정리를 하고 표현을 하고 서술을 하려고 드는 거다. 실제로 전달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진심, 곧 인격일 것이다.
사람이 승부욕을 접고 마음이 편해지는게 아니라, 승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한테 말하거나 포기하지 못한 자신의 승부욕의 결과를 보고서 이제 승부욕에서 벗어나는 거다. ★지면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거다.
우리는 평화와 확신을 생각할 때도 짐이 모두 없어진 상태를 생각하기 쉽다.
★자유라는 것도 어떤 짐을 다 벗고 아무것도 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져야 할 고통, 짐을 당연시하는 거다.
우리는 오해받는 것, 억울한 것, 외로운 것을 제일 못 참는다. 이런 것을 다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서 짐을 벗어 버리려고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고 모두를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는 예수한테 못 배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짐 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 짐을 져야 된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이웃들에게 확인받고 점검받고 싶지만 짐을 져야 한다.
사람이란 무한할 수 없다. 사람에게 무한을 주면 사람은 공허해지고 분해되니까 어떤 한계를 그어 놔야 한다.
우리의 울타리가 폐쇄되지 않도록 늘 노력해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게 용서이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토론을 할 수가 없다. ★원래 토론이나 대화는 상대방을 이해하자는 것이요 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압도하고 납득시키고 강요하려고 한다. 그런 문화가 익으려면 밀도가 높아져야 된다. 몇 십 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지식적 가난함이나 무지한 맹신주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동시에 오직 사변과 성찰만으로는 생명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건 소수의 사람만의 일이다. 이걸 다수화하려고 의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모두에게 알려져서 한국 교회가 너그러워지고 서로를 이해하겠다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럴거다. 이 책은 누가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절대 안 본다. 그걸 각오하고 하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했나? 우리를 실패자로 인도했다. 우리는 '이게 아니다'라고 하는데 전 생애를 쓴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들, 곧 주류 세력들은 평생을 쓰임 받는 사람이니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군가에게는 '이건 아니구나' 하는 것으로 전 생애를 소위 허비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게 우리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지식인으로 한 시대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면 어떻게 되느냐 할 때 그 다음에는 욕심을 내게 된다. '내가 이야기하고 내가 진심을 기울인 것은 좀 따라와 다오'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돼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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