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2011)_3. 믿음은 인과율이 아니다]
- 멋있는 신자란, 현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유능하거나 업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지는 사람이다.
- 나의 못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 '그래, 내가 내 못난 거 인정하고 살겠다' 하고 사는게 신앙의 승리요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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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문제가 기초로서 튼튼히 세워져 있지 않고서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문제가 튼튼히 서면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은 운명이라는 차원에서 어떤 공간이 생긴다. 만약 인간의 책임이 운명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질식할 것같다.
●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과 믿음은, 우리에게 허락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그 신실함과 능력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 '예정론'으로 나온 거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믿음이 없어지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이 제일 낫지 않은가? 왜 제일 나으냐 하면 인간이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은 분명하게 믿을 수 있다' 이게 개혁신학이다.
기독교 신앙이 성립하고 근거하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예수 안에서만 설명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믿음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대개 하나님에 의해서만 근거하고 성립한다는 것을 놓친다. 이걸 놓치면 믿음이 자꾸 우리의 책임이 되고 수단이 되고 조건이 된다.
기독교 신앙을 다루다 보면 믿음이 인과관계 속에서 일어난다고 생각들을 한다. 자기 신앙을 확인하는 것도,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절망하는 거다.
사실 복음이니 믿음이니 은혜니 지금 말하는 소망이니 하는 것들은 다 인과관계를 벗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기독교의 소망이란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차곡차곡 뭔가 쌓아서 그것의 결과로 미래의 영광이 내개 오는 게 아니므로, ■인과법칙을 벗어나는 거다.
신앙생활을 해보면 사실 여러 가지 일로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까닭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절망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믿음을 알게 해 주신다.
그러니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만나는 절망이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소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라는 것은 사실 영광이요 승리요 자랑스러운 영광이다. 우리의 인과관계 확인법으로 한다면 지금의 나로부터 저 약속된 지점까지 상승곡선을 그려야 할 거다.
물론 우리의 인생 속에서 들쭉날쭉 하는게 있다 하더라도, 업다운이 있다 하더라도, 상승곡선을 그려야 하는데 그게 없더라는 거다.
밤낮 하향곡선을 그리든가 아니면 맴돌도록 있다는 말이다. 이게 절망이다.
■그러니까 절망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을 인과관계에서 보려는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꾸 뭘 확인해 달라고 하는 것 아닌가? 성령 충만을 요구하는 거다. 그 첫째 이유가 뭐냐 하면 자신이 편해지려고 하는 거다. 성령충만이 신앙적으로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보다는 마음의 평안을 얻어서 이 짐뿐 아니라 약속의 확인을 받고 싶은 거다. 짐과 고통을 벗어던지자고 더 많이 요구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내게는 절대 안 주셔서 할 수 없이 얻은 답이 뭐냐 하면, '그럼 내가 이 짐을 벗겨주면 나랑 관계를 유지할 거고, 이 짐을 안 벗겨 주면 나랑 관계를 깰거냐?'라는 지점까지 온 거다. 그래서 내 대답이 '그렇지 않습니다' 했더니, '그럼, 너 지고 가라' 이거다.
하나님이 나보고 적극적으로 지고 가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주일마다 네가 설교해야 뒤지 않느냐?' 하시는 거다.
사실 어느 한 주일도 내가 마음 평안했던 적이 없었다. 늘 쩔쩔맨다. 왜냐면 하나님이 계속 누르신다.
■ 멋있는 신자란 자신의 고통을 지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인을 통해 어떻게든 고통을 벗어 던지려고 한다.
그러나 멋있는 신자란, 현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유능하거나 업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지는 사람이다. 나의 못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 '그래, 내가 내 못난 거 인정하고 살겠다' 하고 사는게 신앙의 승리요 위대함이다.
전에는 반박하는 게 나의 에너지였다. 젊었을 때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극단에 서서 말하는 게 아니라 수용하고서 '내가 부족하다,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었다. 그 짐을 져야 된다.
■신앙의 주류는 없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열왕기의 잘못된 왕들처럼 밑바닥을 칠 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은 변개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면에서 언제나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신앙의 부침이 계속될 뿐 아니라 반복되는 메시지 속에서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진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은 하나님뿐이다.
메인스트림(주류)이 한 주제, 한 인물들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하면 '아브라함을 봐라, 요셉을 봐라, 비전을 가지고 믿음을 가졌다'라고 하면 메인스트림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거부하는 거다. 인간의 수단과 조건과 영웅성에 대한 것은 없는 거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과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것까지 포괄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데까지는 왔다. ■인간 속에서는 연속성을 발견하지 못하겠다. 인간이 가지는 연속성은 미련한 것과 완악한 것밖에 없다.
■ 교회는 소수파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보통은 옳고 그름의 싸움을 한다. 신앙이든 신학이든 옳고 그름의 싸움에서 제일 많이 넘어지는 것은 옳은 것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말에 어폐가 있지만, 우리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교회라는 것은 언제나 세상 속에서 '마이너리티'라는 거다. 그러니까 소수파의 지위를 지키라는 거다. 지위라는 것은 '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에 삼킴을 당하지 말라는 거다.
주류가 되어 자신의 옳음을 증명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면 그것은 소수파의 지위에 서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늘 자문해봐야 한다.
소수파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외로울 뿐만 아니라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소수가 되면 틀렸을 수 있다는 것과 외롭다는 것으로 겸손을 만들어야 한다. 고통을 지고 가야 한다. 고통을 벗어 버리면 안된다.
하나님의 판단은 종말에야 나타나니까 현실에서는 약속과 인내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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