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_4. 구원의 확실성은 예정론에 근거한다]
구원은 예정론 안에 있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반대 개념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능하심보다는 신실하심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가지신 뜻이 하나님이 그걸 포기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게 구원이고 그것을 다 포함해서 '예정'이라고 보는 거다.
'예정'이라고 보는 것이지 '결정'이라고 보는게 아니다.
예정이란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쨌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란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로 외부의 위협에 상관없이 누구에 의해서 조작되지 아니하며, 본인 스스로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셨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강요하거나 힘으로 굴복시켜서 가는 게 아니며,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락하고 우리의 선택을 허락해서 '실패' 정도가 아닌, '거부'라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다.
그것까지 하나님이 수용하셔서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는 길을 가시겠다는 거다.
우리가 사실 '예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최소한 어떤 과정과 제한이, 프로그램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시고 목적하신 운명을 혼자 결정하는 것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을 '예정'이라고 보는 거다.
★우리의 거부와 실패에서도 배우는, 그 실패까지도 승리로 싸안으시되 그러시기 위해 당신이 희생하고
또 ★우리를 기다리심으로 항복시켜 나가는 과정조차 허락하신다는 게 성육신이요 십자가라고 보는 거다.
'예정론' 하면 아무래도 '기계적 결정론'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만 나오면 제일 먼저 갖는 그러한 편견, 거부 반응이 있다 .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있고 우리 손에 다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데까지 오려면 오래 걸린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와 반반씩 나누어 가지시는 게 아니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그러면 우리의 권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완전한 권리로 인정하는 거다.
★'할 때까지 해 봐라' 이거다.
신앙과 관계없는인생에서도 '젊어서는 고생도 사서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게 모든 역사 속에서 갖는 공통적인 인류 경험이다.
실패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 고생과 실패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다.
자유라는 것이 아무런 제한도 없는 것 같이 생각되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면 거기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있게 된다.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실패'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바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풀지 못하고 그냥 덮어두고서 추상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다. ★즉, 도덕적 수준이 높아지고 마음의 평안이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의 경륜으로서 하나님의 예정이 현실 속에 있는 우리에게 시행되면,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구원의 완성을 위해 걸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는 우리의 순종뿐 아니라 불순종이라는 실패도 개입된다.
이런 실패가 뭔지 신학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예정과 우리의 구원의 관계를 기계론적으로 오해할 수 있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해서 신앙의 혼란을 겪을 것이다.
구호나 명분으로 축소된 신앙에 만족할 수 없다. ★예정론을 마치 어떤 인생 코스를 설정해 놓은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극히 평가절하하고 인간의 수준을 너무 무시하는 견해다'라고 [하나님의 설복]에서 이야기했다.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킬 수 있다. 신론이나 인간론이 엄청 곡해될 수 있다.
그 시대 한국 교회는 추상화되고 개념화하고 인격과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감성 같은 걸로 자꾸 돌아오고, 아니면 도덕주의로 간 거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다시 말해 세계관을 내놓지 못했다.
신앙의 표현이 구호나 실천 같은 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그건 좀 부족하게 느껴졌다. 어떤 당위적인 것으로 요구를 하니까 ★거기에는 전 인격이 참여하는 건 아니었다.
하나님은 군대 지휘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거다.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로 갈 수밖에 없다
■★실패를 긍정하자는 거다. 우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다.
물론 우리가 그 승리를 위해서 노력하고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를 하나 만들면 실패는 백 개쯤 만든다.
그러니까 하나의 승리도 없는 사람들은 절망한다. 하나의 승리가 있으면 백 개의 실패를 메울 수 있을 테지만, ★하나의 승리보다 백 개의 실패가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믿는다.
아무래도 신앙 연조가 쌓이면 지혜가 는다. 젊었을 때 하고는 분명히 달라 진다.
가장 크게는 신앙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실은 세상을 좇아가는 게 더 나아보여서 그런 거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기만적이냐 하는 것을 배우니까 저절로 그만두게 된다. 그래서 경험이 신앙으로 돌아오게 한다.
■★ 신앙을 지키면, 도덕을 지킨 것 같은 자기 성취나 자기 의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참다운 인간성에 대한 기쁨이 나온다.
이는 나이가 들고 신앙의 깊이가 있어야 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거다. 그 전에는 그 기쁨이 너무 은밀해서, 그 소리가 작아서 세상적인 것에 늘 압도당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운명 결정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정하고 만들 수 있는 것보다 인간을 더 크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작정하시는 대로 우리를 만들었다. 기계적 결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당신과 교제하는 대상으로 삼으신 거다. 이게 복된 것이다.
하나님과 대등한 권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자유나 선택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신이 우리와의 관계를 요구하는 데에서 계급장을 떼자는 말이 된다. 그러면 그건 상대방인 신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거다. 그러면 인간은 분해되고 만다.
●믿음 안에서 실패한 것을 실패로만 보지 않고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한 내용으로 본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자신의 무능을 더 여실히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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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예정론 안에 있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반대 개념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능하심보다는 신실하심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가지신 뜻이 하나님이 그걸 포기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게 구원이고 그것을 다 포함해서 '예정'이라고 보는 거다.
'예정'이라고 보는 것이지 '결정'이라고 보는게 아니다.
예정이란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쨌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란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로 외부의 위협에 상관없이 누구에 의해서 조작되지 아니하며, 본인 스스로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셨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강요하거나 힘으로 굴복시켜서 가는 게 아니며,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락하고 우리의 선택을 허락해서 '실패' 정도가 아닌, '거부'라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다.
그것까지 하나님이 수용하셔서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는 길을 가시겠다는 거다.
우리가 사실 '예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최소한 어떤 과정과 제한이, 프로그램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시고 목적하신 운명을 혼자 결정하는 것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을 '예정'이라고 보는 거다.
★우리의 거부와 실패에서도 배우는, 그 실패까지도 승리로 싸안으시되 그러시기 위해 당신이 희생하고
또 ★우리를 기다리심으로 항복시켜 나가는 과정조차 허락하신다는 게 성육신이요 십자가라고 보는 거다.
'예정론' 하면 아무래도 '기계적 결정론'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만 나오면 제일 먼저 갖는 그러한 편견, 거부 반응이 있다 .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있고 우리 손에 다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데까지 오려면 오래 걸린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와 반반씩 나누어 가지시는 게 아니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그러면 우리의 권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완전한 권리로 인정하는 거다.
★'할 때까지 해 봐라' 이거다.
신앙과 관계없는인생에서도 '젊어서는 고생도 사서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게 모든 역사 속에서 갖는 공통적인 인류 경험이다.
실패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 고생과 실패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다.
자유라는 것이 아무런 제한도 없는 것 같이 생각되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면 거기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있게 된다.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실패'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바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풀지 못하고 그냥 덮어두고서 추상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다. ★즉, 도덕적 수준이 높아지고 마음의 평안이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의 경륜으로서 하나님의 예정이 현실 속에 있는 우리에게 시행되면,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구원의 완성을 위해 걸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는 우리의 순종뿐 아니라 불순종이라는 실패도 개입된다.
이런 실패가 뭔지 신학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예정과 우리의 구원의 관계를 기계론적으로 오해할 수 있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해서 신앙의 혼란을 겪을 것이다.
구호나 명분으로 축소된 신앙에 만족할 수 없다. ★예정론을 마치 어떤 인생 코스를 설정해 놓은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극히 평가절하하고 인간의 수준을 너무 무시하는 견해다'라고 [하나님의 설복]에서 이야기했다.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킬 수 있다. 신론이나 인간론이 엄청 곡해될 수 있다.
그 시대 한국 교회는 추상화되고 개념화하고 인격과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감성 같은 걸로 자꾸 돌아오고, 아니면 도덕주의로 간 거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다시 말해 세계관을 내놓지 못했다.
신앙의 표현이 구호나 실천 같은 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그건 좀 부족하게 느껴졌다. 어떤 당위적인 것으로 요구를 하니까 ★거기에는 전 인격이 참여하는 건 아니었다.
하나님은 군대 지휘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거다.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로 갈 수밖에 없다
■★실패를 긍정하자는 거다. 우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다.
물론 우리가 그 승리를 위해서 노력하고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를 하나 만들면 실패는 백 개쯤 만든다.
그러니까 하나의 승리도 없는 사람들은 절망한다. 하나의 승리가 있으면 백 개의 실패를 메울 수 있을 테지만, ★하나의 승리보다 백 개의 실패가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믿는다.
아무래도 신앙 연조가 쌓이면 지혜가 는다. 젊었을 때 하고는 분명히 달라 진다.
가장 크게는 신앙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실은 세상을 좇아가는 게 더 나아보여서 그런 거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기만적이냐 하는 것을 배우니까 저절로 그만두게 된다. 그래서 경험이 신앙으로 돌아오게 한다.
■★ 신앙을 지키면, 도덕을 지킨 것 같은 자기 성취나 자기 의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참다운 인간성에 대한 기쁨이 나온다.
이는 나이가 들고 신앙의 깊이가 있어야 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거다. 그 전에는 그 기쁨이 너무 은밀해서, 그 소리가 작아서 세상적인 것에 늘 압도당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운명 결정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정하고 만들 수 있는 것보다 인간을 더 크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작정하시는 대로 우리를 만들었다. 기계적 결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당신과 교제하는 대상으로 삼으신 거다. 이게 복된 것이다.
하나님과 대등한 권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자유나 선택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신이 우리와의 관계를 요구하는 데에서 계급장을 떼자는 말이 된다. 그러면 그건 상대방인 신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거다. 그러면 인간은 분해되고 만다.
●믿음 안에서 실패한 것을 실패로만 보지 않고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한 내용으로 본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자신의 무능을 더 여실히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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