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2011)_2. 성화가 설교의 중심이 되다]
결사각오는 사실 매일의 일상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맞닥뜨릴 수 없는 거였다. 일상 속에서 순종과 인내로 실천하는 것에는 순교의 비장함이 없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다. 세상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기관이다.
교회가 자꾸 기능화되어 가면 ■용서해 주고 기다려 주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이 없다.
■믿음은 의심을 전제로 한다. 믿음에는 이 의심이라는 요소가 있는 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이미 믿음이 아니라 그냥 확인에 불과한 거다.
신앙섕활에서 밝은 쪽에 서 있으면 은혜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하면 된다'가 된다.
■실패를 자꾸 경험하고 절망을 경험하게 되면 은혜의 필요성을 본인 스스로 알게 되므로 복음의 진정한 핵심에 다가가는 데 더 좋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절망과 한계를 깨우치지 않으면 규범적인 메시지를 만든다.
현실을 담아내는 문제로 싸워 보면, 자칫하면 자기 의나 의지의 싸움으로 간다. 그러니 늘 지는 거다. 의지력의 싸움에서 진다. 의지로 신앙생활 해보면 결국은 의지로는 죄를 이길 힘이 안 나온다.
'은혜의 필요성이라는게 뮈냐?' 하는게 문제가 되었다. '성화의 신비'라는 책을 내면서 답을 하나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의존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삶의 길목마다 신자로서 승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도우심을 구하면서, 실패를 절망으로 끌고 가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실패할 때마다 이제 은혜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하고 항복을 하고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의존성을 높이게 되니까 내 힘으로 싸우려 하던 것들을 못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이기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답은 반반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이기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냐 하면, 악하게 살다가 선하게 되고, 거짓말하다가 정직하게 되고, 잘못된 세상적인 욕심이 전부 없어지는 희열에 차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실제 싸움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성질을 내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으로, 비겁하게 구는 것과 무모하게 구는 것을 중단하는 것으로 먼저 나타난다.
우리는 살면서 아주 어려운 일들을 만난다. 그 어려움들이란 우정 문제일 수도 있고 학업 문제일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 현실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한다; '저는 더 좋은 신앙을 가지려고 이러는 겁니다. 은혜를 베푸십시오. 제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떼를 쓰는 거다. 답을 주셔야 한다고, 그래서 내가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 없이도 이길 수 있는 답을 받고 앞으로 나가야겠다고 하는 거다.
★ 그런데 보니까 이렇게 답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하나님 앞에 가서 떼를 쓰고 우기는 것이 실제로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면이,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현실을 사는 거보다는 떼쓰는 게 더 쉬울 수 있다. 명분 있는 전도나 선교가 더 쉬울 수 있다.
◆ 의존성 곧 성화가 진행되는 과정이란, 지고 가는 것이요, 고통스럽고 답이 없는 현실, 오해를 받고 수치스러울 수 있는 현실로 들어가는 거다.
나는 그걸 성화라고 본다.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한 거다. 들어가면 이기는 길에 대해서도 조금씩 답을 주신다.
★은혜는 책임과 능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사랑을 만들어 낸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과 실존에 기꺼이 찾아오신 것처럼, ★나에게 요구하는 현실을, 성육신의 길을 뒤쫓겠다고 만드는 게 은혜이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목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묻고, 그것이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를 현실 속에서, 시공간과 삶의 정황속에서 구체화해야 한다. 이것이 성화에서 큰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갈 때 내가 비로소 나이다. 성육신의 길을 뒤쫓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은혜가 목적하는 것이고, 성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과정이 된다.
신앙 실천의 현실이라는 시공간의 무대가 왜 필요하냐 하면, 우리가 이론으로 준비되거나 무장이 되어 뛰어 들어가는 데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과 고민이라는 현실'이 없었으면 인도함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거다.
사변(思辨)으로 참여하지 못할 때 현실은 우리를 삼킨다. ★이런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기로 하자 거기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그렇게 만나주셨다. 미리 만나주시지 않고 내가 들어가자 거기 서 계셨다.
은혜와 책임 사이에는 늘 간격이 있고 사람은 거기서 늘 헤맬 수 있다.
★하나님은 생각과 고민을 요구하신다. 은혜가 하나님 쪽에 속한 것이라면 왜 고민하고 실패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게 무슨 은혜인가 하는 것이다.
은혜는 책임과 능력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랑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더 많이 살게 되는 과정이 성화이다.
★그걸 어디에서 알게 하시느냐 하면 일상에서 알게 하신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부단히 이 질문이 나온다; '하나님, 오늘도 이 뻔한 삶을 반복해야 합니까? 이 실패와 고민과 불안을 반복해야 합니까?' 이래서 우리는 거듭 답이 없는 길을 가는 것 같다.
★반발도 있고 체념도 있고 투정도 있다. 그러나 그 나날들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심으로 하나하나 누적된다.
한국교회는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그렇게 내용으로 막혀버리면 차별화밖에 남는 게 없다. 그게 부작용으로 나타났잖은가? '나 어느 교회 다닌다' 하는 걸로 확인할 게 아니라 ★존재가 달라져야 한다.
신앙적으로 매우 깊은 경지에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놀이 문화도 제대로 소화 못한다. ★기술적으로 말고 인격적으로 멋있게 못 진다. 바둑 같은 걸 두면 어떻게 되나? 바둑을 두면서 왜 자존심 상하느냐 하면, 그게 지능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나빠서 지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바둑을 두고 지고 나서 '잘 뒀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 말을 못한다.
그걸 가르치자는 거다. 아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크고 넉넉한 것인데 그게 잘 안 나온다. 결사각오라는 치열함은 확보했지만 그 넉넉함이라는 것은 전혀 훈련이 안 되어 있다.
하나님은 정말 '침 삼킬 동안도 가만 놓아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욥의 고백이다.
'나는 왜 이 꼴인가, 인간이 왜 이 꼴인가?'
그 답을 얻으려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다.
성화를 한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더 많이 의존적으로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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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영선-조주석 대담_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2011)_2. 성화가 설교의 중심이 되었다)
결사각오는 사실 매일의 일상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맞닥뜨릴 수 없는 거였다. 일상 속에서 순종과 인내로 실천하는 것에는 순교의 비장함이 없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다. 세상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기관이다.
교회가 자꾸 기능화되어 가면 ■용서해 주고 기다려 주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이 없다.
■믿음은 의심을 전제로 한다. 믿음에는 이 의심이라는 요소가 있는 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이미 믿음이 아니라 그냥 확인에 불과한 거다.
신앙섕활에서 밝은 쪽에 서 있으면 은혜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하면 된다'가 된다.
■실패를 자꾸 경험하고 절망을 경험하게 되면 은혜의 필요성을 본인 스스로 알게 되므로 복음의 진정한 핵심에 다가가는 데 더 좋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절망과 한계를 깨우치지 않으면 규범적인 메시지를 만든다.
현실을 담아내는 문제로 싸워 보면, 자칫하면 자기 의나 의지의 싸움으로 간다. 그러니 늘 지는 거다. 의지력의 싸움에서 진다. 의지로 신앙생활 해보면 결국은 의지로는 죄를 이길 힘이 안 나온다.
'은혜의 필요성이라는게 뮈냐?' 하는게 문제가 되었다. '성화의 신비'라는 책을 내면서 답을 하나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의존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삶의 길목마다 신자로서 승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도우심을 구하면서, 실패를 절망으로 끌고 가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실패할 때마다 이제 은혜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하고 항복을 하고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의존성을 높이게 되니까 내 힘으로 싸우려 하던 것들을 못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이기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답은 반반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이기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냐 하면, 악하게 살다가 선하게 되고, 거짓말하다가 정직하게 되고, 잘못된 세상적인 욕심이 전부 없어지는 희열에 차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실제 싸움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성질을 내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으로, 비겁하게 구는 것과 무모하게 구는 것을 중단하는 것으로 먼저 나타난다.
우리는 살면서 아주 어려운 일들을 만난다. 그 어려움들이란 우정 문제일 수도 있고 학업 문제일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 현실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한다; '저는 더 좋은 신앙을 가지려고 이러는 겁니다. 은혜를 베푸십시오. 제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떼를 쓰는 거다. 답을 주셔야 한다고, 그래서 내가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 없이도 이길 수 있는 답을 받고 앞으로 나가야겠다고 하는 거다.
★ 그런데 보니까 이렇게 답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하나님 앞에 가서 떼를 쓰고 우기는 것이 실제로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면이,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현실을 사는 거보다는 떼쓰는 게 더 쉬울 수 있다. 명분 있는 전도나 선교가 더 쉬울 수 있다.
◆ 의존성 곧 성화가 진행되는 과정이란, 지고 가는 것이요, 고통스럽고 답이 없는 현실, 오해를 받고 수치스러울 수 있는 현실로 들어가는 거다.
나는 그걸 성화라고 본다.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한 거다. 들어가면 이기는 길에 대해서도 조금씩 답을 주신다.
★은혜는 책임과 능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사랑을 만들어 낸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과 실존에 기꺼이 찾아오신 것처럼, ★나에게 요구하는 현실을, 성육신의 길을 뒤쫓겠다고 만드는 게 은혜이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목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묻고, 그것이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를 현실 속에서, 시공간과 삶의 정황속에서 구체화해야 한다. 이것이 성화에서 큰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갈 때 내가 비로소 나이다. 성육신의 길을 뒤쫓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은혜가 목적하는 것이고, 성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과정이 된다.
신앙 실천의 현실이라는 시공간의 무대가 왜 필요하냐 하면, 우리가 이론으로 준비되거나 무장이 되어 뛰어 들어가는 데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과 고민이라는 현실'이 없었으면 인도함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거다.
사변(思辨)으로 참여하지 못할 때 현실은 우리를 삼킨다. ★이런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기로 하자 거기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그렇게 만나주셨다. 미리 만나주시지 않고 내가 들어가자 거기 서 계셨다.
은혜와 책임 사이에는 늘 간격이 있고 사람은 거기서 늘 헤맬 수 있다.
★하나님은 생각과 고민을 요구하신다. 은혜가 하나님 쪽에 속한 것이라면 왜 고민하고 실패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게 무슨 은혜인가 하는 것이다.
은혜는 책임과 능력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랑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더 많이 살게 되는 과정이 성화이다.
★그걸 어디에서 알게 하시느냐 하면 일상에서 알게 하신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부단히 이 질문이 나온다; '하나님, 오늘도 이 뻔한 삶을 반복해야 합니까? 이 실패와 고민과 불안을 반복해야 합니까?' 이래서 우리는 거듭 답이 없는 길을 가는 것 같다.
★반발도 있고 체념도 있고 투정도 있다. 그러나 그 나날들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심으로 하나하나 누적된다.
한국교회는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그렇게 내용으로 막혀버리면 차별화밖에 남는 게 없다. 그게 부작용으로 나타났잖은가? '나 어느 교회 다닌다' 하는 걸로 확인할 게 아니라 ★존재가 달라져야 한다.
신앙적으로 매우 깊은 경지에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놀이 문화도 제대로 소화 못한다. ★기술적으로 말고 인격적으로 멋있게 못 진다. 바둑 같은 걸 두면 어떻게 되나? 바둑을 두면서 왜 자존심 상하느냐 하면, 그게 지능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나빠서 지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바둑을 두고 지고 나서 '잘 뒀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 말을 못한다.
그걸 가르치자는 거다. 아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크고 넉넉한 것인데 그게 잘 안 나온다. 결사각오라는 치열함은 확보했지만 그 넉넉함이라는 것은 전혀 훈련이 안 되어 있다.
하나님은 정말 '침 삼킬 동안도 가만 놓아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욥의 고백이다.
'나는 왜 이 꼴인가, 인간이 왜 이 꼴인가?'
그 답을 얻으려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다.
성화를 한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더 많이 의존적으로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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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영선-조주석 대담_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2011)_2. 성화가 설교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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