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논하는 히브리서 11장의 말미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사무엘과 같은 인물들은 왜 등장했을까?
믿음 장을 처음 시작할 때 노아, 아벨, 에녹을 언급한 이유와 같다.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아벨에게 나타나셨고 에녹에게 나타나셨고, 노아에게도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당신을 배반하고 사망의 운명을 자초한 인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간섭해 오셨음을 이들의 이름을 열거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사사(士師)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파멸의 길로 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고 간섭하여 구원하셨다.
다윗 왕의 시대에 사무엘을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 인류라는 존재와 운명과 역사에 대하여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여전히 개입하고 계셨다'를 기드온, 바락, 삼손, 다윗, 사무엘을 들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까지 보내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원래 목적 즉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기꺼이 순종하는, 책임 있는 피조물로 살도록 하기 위해, 개입하고 일 하셨음을 그렇게 예수로 증언하신 것이다.
우리 인생을 잘잘못에 대해 상벌을 받는 대가관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잘해야 되고, 못하면 벌 받는다'라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를 쫓아다닌다. 그래서 기회를 주고 시간을 주어 책임 있는 사람으로 자라 가라고 부름받았다는 생각을 놓치고, 잘잘못에 묶이는 바람에 번번이 회개로 돌아간다.
히브리서는 십자가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예수를 믿은 이후의 현실을 주목하라고 경고하며 격려한다. '너 잘 살아라. 공부 잘해라'라는 이야기이다.
매번 십자가로 돌아가 그 밑에 가서 울고 짜고 회개하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과거다, 오늘이 있다, 이렇게 가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 있는 신자로 살기 위해 분발하는 자리로 가야지, 자격과 조건을 갖추거나 무흠하고 벌 받을 일이 없는 것을 전부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혼자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어제 일은 묻지 마십시오. 오늘 멋지게 살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일은 더 잘 해보겠습니다.' 그래야 한다.
어제를 언급하려면 '오늘은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는 의미로 언급하고, 잘못을 회개하려면 결벽을 떨려고 하지 말고 거기서 일어난 일로 어떻게 나아졌는지를 돌아보는 의미로 돌이켜야 한다.
자격이나 환경이나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티끌과 재처럼 한심한 존재라도 상관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의 동반자로 부르셨으니 하나님이 목적하신 영광의 자리에 기꺼이 서겠습니다, 이렇게 나가야 한다.
이런 사람들을 소개한 장이 믿음 장이다. 믿음이 좋아서 무흠하고 완벽하고 걱정할 일이 없고 죄책감이 들지 않는 자들을 소개한 장이 아니다.
'성경은 추상적 원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대신 원리를 구현하고 거기에 실체를 부여하는 생생한 삶과 구체화된 역사적 실존을 담고 있다'
추상명사를 말하고 명분을 주장하고 규칙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콩나물을 무치고 비빔밥을 만들어 그렇게 우리의 피와 살이 되는 일용할 양식을 만들고 먹어 몸소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영광과 책임과 위대한 것을 분별하고 실제로 살아내야 한다.
이렇게 행하려면 당연히 짐을 져야 한다.
■그 짐을 질 실력이 있고 근력이 있는 존재를 만들려는 것이 믿음을 도입한 이유이다. 말로 때우라고 준 것이 아니라 실체가 되라고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역사이다.
역사 내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잘잘못, 인과율, 보응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너희를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하려고 만들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를 복되게 위대하게 하여 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대하려고 불렀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등한 관계라는 의미이다. 물론 신과 피조물은 결코 대등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에서는 대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역사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보며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 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왜 아직까지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이어져 왔을까? 하나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빨리 답을 내리시지 왜 이렇게 질질 끌고 계실까?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 길어야 한다. 소설이 길어야 한다. 절정에 이르려면 곡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본문을 담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가 없고 명분만 돌아다니게 된다. 스토리가 없으면 전후가 없고 전후가 없으면 곡절이 없고 곡절이 없으면 절정이 없다. 이 절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도록,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니님이 역사를, 경우를, 육체를, 고민을, 갈등을, 도전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갈등 없이 정답만 내놓는 것을 '비정하다, 무정하다'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죄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 큰 세력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런지 객관성을 갖추고 사심이 없는 것을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덕목일 뿐이다.
■성경은 더 해 보고 더 나아가라고 한다.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괜찮다. 해 봐라. 해 보고 넘어지면, 실패를 통해 배워라. 실패가 너희로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가졌으나 핍박을 받아 죽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 일이 열거되어 있다.
머치 예수의 생애와 똑같다. 무한하신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오셔서 가난한 자와 죄인의 친구로 사셨고,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이 지냈다.
■많은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런 기적이 십자가의 길을 막지 못했다. 그는 십자가를 져야 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치욕이자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어버리고 마는 일을 해야 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은 부활을 담으셨다. 무덤에다 영광을 담으신 것이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이 영광을 우리의 어디에나 담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에 하나님이 기적을 담을 수 있고, 죽음에도 영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과거에 묶여 있지 마라. '어제 못나게 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잘난 척을 해?'와 같은 과오에 붙잡히지 말고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라.
'너, 어제는 와서 지랄을 떨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웬 그럴듯한 낯짝을 하고 왔어?' 라는 말을 듣더라도, '흠,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지' 라고 웃으며 넘기라.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왜 사소하고 이상한 데서 연속성을 고집하는가?
'어제 그랬는데, 오늘 뭘 유난을 떨겠어?' 유난을 떨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못한다.
한번 해 보라. 계속 못해도 되니까 한번 도전해 보라. 실제로 해 보면 우리 것이 된다. 우리의 살이 되고, 우리의 실력이 되고, 우리의 명예가 된다. 성경은 그것을 요구한다.
(*히브리서 p271 - 279)
믿음 장을 처음 시작할 때 노아, 아벨, 에녹을 언급한 이유와 같다.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아벨에게 나타나셨고 에녹에게 나타나셨고, 노아에게도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당신을 배반하고 사망의 운명을 자초한 인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간섭해 오셨음을 이들의 이름을 열거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사사(士師)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파멸의 길로 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고 간섭하여 구원하셨다.
다윗 왕의 시대에 사무엘을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 인류라는 존재와 운명과 역사에 대하여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여전히 개입하고 계셨다'를 기드온, 바락, 삼손, 다윗, 사무엘을 들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까지 보내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원래 목적 즉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기꺼이 순종하는, 책임 있는 피조물로 살도록 하기 위해, 개입하고 일 하셨음을 그렇게 예수로 증언하신 것이다.
우리 인생을 잘잘못에 대해 상벌을 받는 대가관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잘해야 되고, 못하면 벌 받는다'라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를 쫓아다닌다. 그래서 기회를 주고 시간을 주어 책임 있는 사람으로 자라 가라고 부름받았다는 생각을 놓치고, 잘잘못에 묶이는 바람에 번번이 회개로 돌아간다.
히브리서는 십자가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예수를 믿은 이후의 현실을 주목하라고 경고하며 격려한다. '너 잘 살아라. 공부 잘해라'라는 이야기이다.
매번 십자가로 돌아가 그 밑에 가서 울고 짜고 회개하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과거다, 오늘이 있다, 이렇게 가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 있는 신자로 살기 위해 분발하는 자리로 가야지, 자격과 조건을 갖추거나 무흠하고 벌 받을 일이 없는 것을 전부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혼자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어제 일은 묻지 마십시오. 오늘 멋지게 살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일은 더 잘 해보겠습니다.' 그래야 한다.
어제를 언급하려면 '오늘은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는 의미로 언급하고, 잘못을 회개하려면 결벽을 떨려고 하지 말고 거기서 일어난 일로 어떻게 나아졌는지를 돌아보는 의미로 돌이켜야 한다.
자격이나 환경이나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티끌과 재처럼 한심한 존재라도 상관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의 동반자로 부르셨으니 하나님이 목적하신 영광의 자리에 기꺼이 서겠습니다, 이렇게 나가야 한다.
이런 사람들을 소개한 장이 믿음 장이다. 믿음이 좋아서 무흠하고 완벽하고 걱정할 일이 없고 죄책감이 들지 않는 자들을 소개한 장이 아니다.
'성경은 추상적 원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대신 원리를 구현하고 거기에 실체를 부여하는 생생한 삶과 구체화된 역사적 실존을 담고 있다'
추상명사를 말하고 명분을 주장하고 규칙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콩나물을 무치고 비빔밥을 만들어 그렇게 우리의 피와 살이 되는 일용할 양식을 만들고 먹어 몸소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영광과 책임과 위대한 것을 분별하고 실제로 살아내야 한다.
이렇게 행하려면 당연히 짐을 져야 한다.
■그 짐을 질 실력이 있고 근력이 있는 존재를 만들려는 것이 믿음을 도입한 이유이다. 말로 때우라고 준 것이 아니라 실체가 되라고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역사이다.
역사 내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잘잘못, 인과율, 보응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너희를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하려고 만들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를 복되게 위대하게 하여 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대하려고 불렀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등한 관계라는 의미이다. 물론 신과 피조물은 결코 대등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에서는 대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역사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보며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 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왜 아직까지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이어져 왔을까? 하나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빨리 답을 내리시지 왜 이렇게 질질 끌고 계실까?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 길어야 한다. 소설이 길어야 한다. 절정에 이르려면 곡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본문을 담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가 없고 명분만 돌아다니게 된다. 스토리가 없으면 전후가 없고 전후가 없으면 곡절이 없고 곡절이 없으면 절정이 없다. 이 절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도록,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니님이 역사를, 경우를, 육체를, 고민을, 갈등을, 도전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갈등 없이 정답만 내놓는 것을 '비정하다, 무정하다'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죄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 큰 세력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런지 객관성을 갖추고 사심이 없는 것을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덕목일 뿐이다.
■성경은 더 해 보고 더 나아가라고 한다.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괜찮다. 해 봐라. 해 보고 넘어지면, 실패를 통해 배워라. 실패가 너희로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가졌으나 핍박을 받아 죽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 일이 열거되어 있다.
머치 예수의 생애와 똑같다. 무한하신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오셔서 가난한 자와 죄인의 친구로 사셨고,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이 지냈다.
■많은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런 기적이 십자가의 길을 막지 못했다. 그는 십자가를 져야 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치욕이자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어버리고 마는 일을 해야 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은 부활을 담으셨다. 무덤에다 영광을 담으신 것이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이 영광을 우리의 어디에나 담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에 하나님이 기적을 담을 수 있고, 죽음에도 영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과거에 묶여 있지 마라. '어제 못나게 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잘난 척을 해?'와 같은 과오에 붙잡히지 말고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라.
'너, 어제는 와서 지랄을 떨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웬 그럴듯한 낯짝을 하고 왔어?' 라는 말을 듣더라도, '흠,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지' 라고 웃으며 넘기라.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왜 사소하고 이상한 데서 연속성을 고집하는가?
'어제 그랬는데, 오늘 뭘 유난을 떨겠어?' 유난을 떨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못한다.
한번 해 보라. 계속 못해도 되니까 한번 도전해 보라. 실제로 해 보면 우리 것이 된다. 우리의 살이 되고, 우리의 실력이 되고, 우리의 명예가 된다. 성경은 그것을 요구한다.
(*히브리서 p271 -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