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내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잘잘못, 인과율, 보응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너희를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하려고 만들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를 복되게 위대하게 하여 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대하려고 불렀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등한 관계라는 의미이다. 물론 신과 피조물은 결코 대등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에서는 대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역사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보며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 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왜 아직까지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이어져 왔을까?
하나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빨리 답을 내리시지 왜 이렇게 질질 끌고 계실까?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 길어야 한다. 소설은 길어야 한다. 절정에 이르려면 곡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본문을 담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가 없고 명분만 돌아다니게 된다. 스토리가 없으면 전후가 없고 전후가 없으면 곡절이 없고 곡절이 없으면 절정이 없다. 이 절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도록,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나님이 역사를, 경우를, 육체를, 고민을, 갈등을, 도전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갈등 없이 정답만 내놓는 것을 '비정하다, 무정하다'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죄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 큰 세력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런지 객관성을 갖추고 사심이 없는 것을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덕목일 뿐이다.
■성경은 더 해 보고 더 나아가라고 한다.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괜찮다, 해 봐라. 해 보고 넘어지면 실패를 통해 배워라. 실패가 너희로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가졌으나 핍박을 받아 죽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 일들이 열거되어 있다.
마치 예수의 생애와 똑같다.
무한하신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오셔서 가난한 자와 죄인의 친구로 사셨고,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이 지냈다.
그는 많은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런 기적들이 십자가의 길을 막지 못했다. 그는 십자가를 져야 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치욕이자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어버리고 마는 일을 해야 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은 부활을 담으셨다. 무덤에다 영광을 담으신 것이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이 영광을 우리의 어디에나 담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에 하나님이 기적을 담을 수 있고, 죽음에도 영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과거에 묶여 있지 마라. '어제 못나게 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잘난 척을 해?' 와 같은 과오에 붙잡히지 말고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라.
'너, 어제는 와서 지랄을 떨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웬 그럴듯한 낯짝을 하고 왔어?' 라는 말을 듣더라도,
'흠,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지' 라고 웃으며 넘기라.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왜 사소하고 이상한 데서 연속성을 고집하는가?
'어제 그랬는데, 오늘 뭘 유난을 떨겠어?'
유난을 떨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못한다.
한번 해 보라. 계속 못해도 되니까 한번 도전해 보라.
실제로 해 보면 우리 것이 된다. 우리의 살이 되고, 우리의 실력이 되고, 우리의 명예가 된다.
성경은 그것을 요구한다.
(*히브리서 11장 강해중에서)
너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잘잘못, 인과율, 보응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너희를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하려고 만들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를 복되게 위대하게 하여 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대하려고 불렀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등한 관계라는 의미이다. 물론 신과 피조물은 결코 대등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에서는 대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역사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보며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 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왜 아직까지 역사가 멸망하지 않고 이어져 왔을까?
하나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빨리 답을 내리시지 왜 이렇게 질질 끌고 계실까?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 길어야 한다. 소설은 길어야 한다. 절정에 이르려면 곡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본문을 담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가 없고 명분만 돌아다니게 된다. 스토리가 없으면 전후가 없고 전후가 없으면 곡절이 없고 곡절이 없으면 절정이 없다. 이 절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도록,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나님이 역사를, 경우를, 육체를, 고민을, 갈등을, 도전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갈등 없이 정답만 내놓는 것을 '비정하다, 무정하다'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죄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 큰 세력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런지 객관성을 갖추고 사심이 없는 것을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덕목일 뿐이다.
■성경은 더 해 보고 더 나아가라고 한다.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괜찮다, 해 봐라. 해 보고 넘어지면 실패를 통해 배워라. 실패가 너희로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을 가졌으나 핍박을 받아 죽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 일들이 열거되어 있다.
마치 예수의 생애와 똑같다.
무한하신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오셔서 가난한 자와 죄인의 친구로 사셨고,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이 지냈다.
그는 많은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런 기적들이 십자가의 길을 막지 못했다. 그는 십자가를 져야 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치욕이자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어버리고 마는 일을 해야 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은 부활을 담으셨다. 무덤에다 영광을 담으신 것이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이 영광을 우리의 어디에나 담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에 하나님이 기적을 담을 수 있고, 죽음에도 영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과거에 묶여 있지 마라. '어제 못나게 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잘난 척을 해?' 와 같은 과오에 붙잡히지 말고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라.
'너, 어제는 와서 지랄을 떨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웬 그럴듯한 낯짝을 하고 왔어?' 라는 말을 듣더라도,
'흠,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지' 라고 웃으며 넘기라.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왜 사소하고 이상한 데서 연속성을 고집하는가?
'어제 그랬는데, 오늘 뭘 유난을 떨겠어?'
유난을 떨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못한다.
한번 해 보라. 계속 못해도 되니까 한번 도전해 보라.
실제로 해 보면 우리 것이 된다. 우리의 살이 되고, 우리의 실력이 되고, 우리의 명예가 된다.
성경은 그것을 요구한다.
(*히브리서 11장 강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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