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복음 자체가 이런 형태로 모양새로, 섬기고 품고 용서하는 것으로, 다정한 방법으로 찾아 온다

nazunzaro 2020. 4. 14. 04:34

 복음 자체가 이런 형태를 취한다, 이런 모양새를 취한다, 권력으로 폭력으로 이 복음이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으로, 품는 것으로, 용서하는 것으로, 다정한 방법으로 찾아 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우리가 기대하는 폭력성이나 그 권세에 있지 않고,

이런, '섬김과 낮아지심으로 찾아오는 하나님의 다정하심, 온유하심, 오래 참으심,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비우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 그 하나님의 자기증명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절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걸로 하나님이 뭘 하시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게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우리의 기대와 비교할 수 없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고 하나님의 권능이었다]

 

우리의 삶은 후회와 눈물로 얼룩져 있다. 눈물나는 날, 불안한 날, 말이 안되는 날, 그날을, 그날을 감수하라. 하나님이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지금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지지 말라. 이 믿음이 우리를 승리케 하고 나중에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찬송하는 날이 올 것을 믿는다.

 

(*일병목회강좌_고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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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고린도후서 편지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꾸중에 대하여 반발하여 또 평소에도 가졌음직한 의심들을 노골적으로 꺼내어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고린도후서 4:7-15)

`당신은 신의 사자로써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신의 사자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신적 권세와 어떤 크기 외형같은 것이 너무 부족하고 볼품도 없고 게다가 우리에게 전해준 말씀들도 우리 실생활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하는 식의 반발을 낳았다.

 

이 반발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복음 자체가 그런 형태를 취한다, 그런 모양새를 취한다, 권력으로 폭력으로 이 복음이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으로 품는 것으로, 용서하는 것으로, 다정한 방법으로 찾아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자기가 참된 종인 것>과, [복음의 특징]과, 더더욱 크게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한 소개]를 여기에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도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그가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소원과 간구를 올렸고 그리고 그의 경건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그렇게 증언하는 것을 인용한다.

 

생각해 보라,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땅에 육체로 오신 것으로 이미 하실 어떤 정성과 그 메세지는 충분했을텐데,

<그 분의 사역이 심한 통곡과 눈물이 필요했다는 것>은 우리로써는 감히 상상이 가지않는다.

 

그리고 5장 8절 9절 그 유명한 구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셔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들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렇게 증언하는 것을 인용한다.

생각해 보라, 성자 하나님께 무슨 부족함이 있었으며 그의 사역에 감당치 못할 무슨 일이 있었겠는가마는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얘기한다]

 

순종이란 굴복한다는 뜻도 아니며 맹종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 요구하는 뜻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을 통하여 인내를 배웠다`라고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관용구로 사용하듯이, 여기서 순종은 다만 기꺼운 복종, 또는 넘치는 충성 정도가 아니라, <순종이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내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을 뜻한다>.

 

이미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만 해도'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 요구를 언제 말씀하셨나?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반박 거부하고 충성을 다하여 만류한, '주여 이 일이 주께 일어나게 내가 놔두지 않겠습니다. 주께서 죽으시면 안됩니다. 제가 모든 위기와 어려움에 방어막이 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꾸중으로 베드로르 내치셨을 때이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 이렇게 나오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주요 심판자로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큰 권력으로 일을 쉽게 해결할 거라고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성육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다>

 

빌립보 5장에서 11절까지 말씀에서, <예수의 낮아지심, 육체로 오심, 죽기까지 복종,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던 것>을, <성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사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이다.

'과연 이 예수는 성자 하나님이시다'라고 항복시켰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가, 우리가 기대하는 폭력성이나 그 권세에 있지않고, 이런, '섬김과 낮아지심으로 찾아오는 하나님의 다정하심, 온유하심, 오래 참으심,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비우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 그 하나님의 자기증명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생각해 보면, `자신의 사명 시작에서부터 이런 환란과 고난이 예고되고 있었다`라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을 상기시킨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께서 사울을 만나고 사울이 묻는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기다려랴'

아나니야를 보내서 바울을 사도로 세운다.

아나니야가 사울에게 가서 안수할 것을 거부하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내가 택한 그릇이며 그가 이방과 임금들 앞에 서야되며, 그가 얼마나 많은 해를 받아야 할지를 그에게 보이리라'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는 이방과 임금들 앞에 설 대사도로 부름을 받지만 그때로부터 동일하게 그가 가진 위대한 소명과 함께 그가 얼마나 큰 환란을, 많은 해를 입어야 할 지를 처음부터 그에게 선언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부인하고 비난하고 돌아선 데 대하여 사도바울은, '내가 진짜다. 사도들은 다 그 [사도된 특징]을 환란과 고난으로 가지며, 힘으로 가지지 않고 섬기는 자로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르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라고 말한 것같이, <'우리는 죽임을 당하는 자같이 조건이 약속되어 있다'>라고 말하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는 사도바울의 설명은 그렇게 하여 사도바울이 '자기가 진짜 사도다' 라는 걸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기 13절에 나오는 것같이,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라는 이 말씀은,

 

시편 116편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의 의미를 조금 깊이 생각하면, 사도바울의 자기 사도직 변명이, 우리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그 경계를 지나서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걸 알게 된다;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내가 믿음으로써 말하였노라`가 여기 시편 116편 10절의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를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때, 우리가 가지는 본성적 종교심으로 다가갈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러니까 우리의 '잘하고 못하고'의 이분법이 우리에게 크게 하나의 본성적 종교심이라서, 이런 시를 읽을 때에도 '그가 많은 기도와 많은 절규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답을 받았다'로 쉽게 읽기 쉬운데,

시편에는 많은 간구의 시가 나오는데, 그 간구는 탄식이다. 탄식을 우리 좋게 생각, 오해, 왜곡하기 마련인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가장 깊은 진심을 꺼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할텐데, 시편에 나오는 탄식들은 거의 그럴 수 없는 표현인 것이 많다.

막말을 하듯이,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 나 죽어버릴거에요. 나 죽으면 누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요? 나 없으면 하나님이 혼자 뭐 하실래요?` 하는 식의 어투까지 나오는 탄식의 시들이 있다. 저주의 시도 있다.

 

116편에서 나오는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었다` 116편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에서 순진하다는 것은 진실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저 철없는 소리까지 다했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다 용납하셨다' 이다.

그러니까 `내가 진심으로 눈물 많이 흘려 모든 것을 내려놓아서 받은 보상이 아니라, 받을 수 없는 얘기, 절망과 외면, 거의 모욕적인 반발도 하나님이 감싸셨다`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고 싶었던 건 뭐냐하면, 본문 4장 10절에 보면;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를 우리가 죽였다. 우리가 예수를 죽여서 십자가가 생겼는데, 그 십자가가 오히려 우리를 구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음으로 우리를 구했다`는 것은 그의 헌신, 그의 지극하신 어떤 희생, 이런 조건으로 몰고가지 말고, 우리가 자초한 죽음, 우리가 만든 죽음이 우리를 구했다고 한다.

'요셉을 팔아먹는 바람에 그 형들이 요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그게 여기도 그것이다. '너희는 또 나를 죽이는구나, 그러나 너희가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너희의 지금 이 못난 짓도 믿음 안에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는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죄지어 죽게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재창조에 도입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법칙이다.

 

그래서 이 4장 13절에 있는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이다. 그러니까, '우리도'이다.

 

`나도 너희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복음은 죽는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사실은 그게 생명을 전달하는 방법이란다. 너희가 나한테 못할 말 했는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이 비난과 이 왜곡도 너희에게 유익을 결과시킬 줄 내가 믿는다.

그래서 14절이 나온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사도바울을 죽인다고 해서 복음이 죽지않고, 사도바울을 죽인다고 해서 그 죽인 자들이 죽이는 것으로 벌을 결과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저들의 못난 이 반발, 이 못난 비난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저들에게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그래서 15절에 이렇게 나온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놀랍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어디서 제일 컸느냐`하면, 후회스러운 과거가 우리를 제일 많이 키운다.

그때 못났던 것이 오늘 우리에게 성숙과 위대함을 만든 하나의 디딤돌이 된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생명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자라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자라고, 해가 뜨면 해가 나서 자라고, 사망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썩고, 해가 뜨면 해가 나서 썩는다.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이 결론이 나온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의 분노, 우리의 절망이 보이는 것이다. 그걸로 하나님이 뭘 하시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게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우리의 기대와 비교할 수 없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고 하나님의 권능이었다.

 

히브리서 5장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가 그렇고,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그렇고, 우리 인생 자체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의 수준, 지금의 자리를 그저 윤리적 이분법, 완벽의 이분법, 잘잘못의 이분법으로 밖에는 판단할 수 없어서,

이 막막하고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지금의 상태를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한다.

 

아니다. 본인이 '자책과 자괴와 자멸의 마음이 들 때, 이것이 일을 한다. 나를 손해보지 않게 한다' 라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입하신 믿음>이다. <재창조의 가장 큰 원리>이다.

 

예수는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고, 구원하러 오셨으며,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있으며,

로마서 8장식으로 해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이다.

 

●눈물나는 날, 불안한 날, 말이 안되는 날, 그날을, 그날을 감수하라. 하나님이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지금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지지 말라. 이 믿음이 우리를 승리케 하고 나중에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찬송하는 날이 올 것을 믿는다.

 

●우리의 삶은 후회와 눈물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러셨다니까 한결 마음이 놓인다.

우리가 가는 길이, 잘하고 분명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잘못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생각에는 아닌 것같은, 답이 없는 것같은 날들이 우리에게 현실로 주어지는 것은, 갈 길이 멀고 그 먼 것은 더 크고 더 위대한 목표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하여 위로 받는다.

 

그러니 오늘 하루를 충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과 자책의 마음을 안고 하루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우리의 생애에 기어코 보이는 자리까지 이르게 하시고, 우리의 한숨과 눈물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감사하는, 성경의 모든 믿음의 찬송에 참여하는 우리 인생되게 하실 것이다.

 

(*목강-고후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