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신 놀라운 재창조>의 행위이다.
이전에는 우리가 죄 아래에서 신음하고 부끄럽고 거짓되고 헛되게 살았지만, 이제는 <복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참되고 아름답고 그리고 복되고 영광되게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복음을 어떤 식으로 전하는가? 그의 아들을 보내셨지만 권력과 폭력으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폭력을 고스란히 감수하여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는 것같은 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세상은 그를 삼켰으나,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 심으셨다. 그래서 '우리'라는 열매가 나왔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늘 시험에 시달리고 그리고 시험에 질 것이다. 정신차려서 자세히 봐야 한다.
약한 것같고, 지는 자같고, 없는 것같고, 욕을 먹고, 힘이 없어 보이는 그 모든 것,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과 승리와 영광을 이런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아닌 것 같은 것, 지는 것 같은 것, 망하는 것 같은 데다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도전에 대해서는 이미 벗어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마저도 일을 한다고 믿어야 된다.
<내가 형통하냐, 내가 어려우냐?> 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도, 큰 조건도 아니다.
어떠한 조건 속에 있을지라도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신 <그 부름의 핵심되는 내용>이며, 주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셨던 <성육신에서의 모범>이었다.
사도 바울이 믿는 것은, 복음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 믿고, 그 복음이 진정한 열매를 맺기까지 그 복음을 받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으나 <얼마나 많이 넘어졌다 일어났다 돌아섰다 다시 돌아오는 일들이 반복되는지>, 그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그 모든 것을 감사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의 비난을 그 억울함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이 복된 삶을 기뻐하고, 예수 안에서 보여진 성육신과, 고난과 배신과 수치와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의 일하심의 위대하심을 기억하여,
우리가 우리를 변명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자책하고, 하는 모든 시험을 넘어서는,
울 수 있고 한숨 쉴 수 있지만 그것에 얽매여서 스스로 자책하고 소멸되는 헛된 슬픔과 자책 안의 사로잡히는 시험을 벗어나는 귀한 위로와 힘을 오늘 얻어야 한다.
복음은 이상하게도 가장 위대한 구원의 소식인데, 순하게 받는 이도 없고, 그 구원을 기뻐해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일정 수준에 일어서는지 우리 마음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의 수고도 헛된 것같고,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쓴 것들이 그냥 헛된 것 같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할 수 없는 하나님이니라, 내 아들을 주었고 다시 살렸고 하늘 보좌 우편에 내 아들이 나를 위하여, 나에게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한, 나는 너희에게 허락한 구원을 헛되게 하거나 실패할리 없다' 하신 이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힘을 내어 하나님과 함께 이 귀한 영광을, 복을 우리의 생애 속에 담아내는 하나님의 진정성을 우리가 기쁨으로 감수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일병목회강좌_고후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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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신 놀라운 재창조》의 행위다.
이전에는 우리가 죄 아래에서 신음하고 부끄럽고 거짓되고 헛되게 살았지만, 이제는 복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참되고 아름답고 그리고 복되고 영광되게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할 때 각종 위협과 환란 속에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늘 감사하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이 《복음이 가지는 성격》과 《그 복음을 현실로 살아내는 일》에 하나님이 위로로 쓰기 위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킨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복되게 살아라, 위대하게 살아라, 생명과 구원과 진리의 삶을 살아라, 시비걸고 싸우는 일로 헛되게 복음을 왜곡시키지 마라`》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는 훨씬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로 인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셨다`라는 이 말씀을 사도바울이 하필 이 자리에서 하는 이유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든지,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거나 지금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현실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그거다.
바울은 저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복음을 받았고 위대한 인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예로운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반대하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오해했고, <예수를 믿고 사는 현실에서의 복된 기회>를 너희가 놓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분을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일을 하는가 봐라>.
'형제들아 내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렸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인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죽음과 절망의 끝까지 내몰아서 우리가 세상의 위협에 어떤 큰 도전 앞에 설 지라도 겁내지 말라》고 가르쳐 준 것이며, 우리가 가진 힘으로 주를 돕는 게 아니라,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경험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당한 《환란이, 고난이 너희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일꾼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 살아내는 것》을 보면 너희도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우침에 와야 된다. 하나님이 그의 복음을 어떤 식으로 전하는가? 그의 아들을 보내셨지만 권력과 폭력으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폭력을 고스란히 감수하여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는 것같은 식으로》 열매를 맺지 않았느냐?'
세상은 그를 삼켰으나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 심으셨다. 그래서 우리라는 열매가 나왔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늘 시험에 시달리고 그리고 시험에 질 것이다! 정신차려서 자세히 봐라` 이거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목숨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하고 패배하고 망하고 아닌 것같고'를 사망이라는 결과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현실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약한 것같고, 지는 자같고, 없는 것같고, 욕을 먹고, 힘이 없어 보이는 그 모든 것,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과 승리와 영광을 이런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아닌 것 같은 것, 지는 것 같은 것, 망하는 것 같은 데다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도전에 대해서는 이미 벗어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마저도 일을 한다고 믿는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놀라운 고백이다.
`내가 살아있으면 하나님이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써 일하시고,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나의 죽음으로 일하실 것이다`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형통하냐, 내가 어려우냐' 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도 큰 조건도 아니다. 그 모든 도와주는 조건 혹은 반대하는 조건 속에 있을지라도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셨던 성육신에서의 모범이었고,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신 그 부름에 핵심되는 내용이다》
사도 바울이 믿는 것은, 복음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 믿고, 그 복음이 진정한 열매를 맺기까지 그 복음을 받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으나 <얼마나 많이 넘어졌다 일어났다 돌아섰다 다시 돌아오는 일들이 반복되는지>, 그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그 모든 것을 감사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의 비난을 그 억울함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복음은 이런 식으로 전파되고 이 복음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도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를 그 과정으로 가져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이 복된 사명을 기뻐하고, 예수 안에서 보여진 성육신과, 고난과 배신과 수치와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의 일하심의 위대하심을 기억하여, 우리가 우리를 변명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자책하고, 하는 모든 시험을 넘어서는, 울 수 있고, 한숨 쉴 수 있지만,》
《그것에 얽매여서 스스로 자책하고 소멸되는 헛된 슬픔과 자책 안의 사로잡히는 시험을 벗어나는》 귀한 오늘의 이 말씀이고, 우리 일상에 더 귀한 위로와 힘이 되기를 바란다.
복음은 이상하게도 가장 위대한 구원의 소식인데, 순하게 받는 이도 없고,
그 구원을 기뻐해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일정 수준에 일어서는지 우리 마음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의 수고도 헛된 것같고, 내가 전한 복음도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쓴 것이) 그냥 헛된 것 같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할 수 없는 하나님이니라, 내 아들을 주었고 다시 살렸고 하늘 보좌 우편에 내 아들이 나를 위하여, 나에게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한, 나는 너희에게 허락한 구원을 헛되게 하거나 실패할리 없다' 하신 이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힘을 내어 하나님과 함께 이 귀한 영광을 복을 우리의 생애 속에 담아내는 하나님의 진정성을 우리가 기쁨으로 감수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일병목회강좌 09_고후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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