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없다, 이렇게 성경은 얘기한다.
신자들이 죽으면, 그 죽음이 생명을 만들더라는 거다.
사도바울이 겪어보니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버린 바 되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그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릴 수 밖에 없었던 그런 극한의 상황까지 가더라는 거다.
사도 바울같은 이렇게 큰 사도가 그의 전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데 늘 가장 최악의 조건 속에서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그의 복음과 그의 뜻을 이루는 필요한 방법이라면,
그 방법을 우리 모두가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 아니냐 이거다.
우리가 봤던,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짓밟혀 짖이겨진 이런 길을 간다.
그게 무슨 비참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이런 것만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가치와 우리 존재의 이유를 방해할 수 없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이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안에 영광을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 영광을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걸 이루시는 방법은 예수의 성육신에서, 십자가 고난에서 보듯이, 그것은 정말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하는, 참으로 비참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자랑으로 여기신다.
인간의 진정한 영광이 세상이 말하는 부귀영화냐?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냐? 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된다.
그것이 성경 고린도 후서의 가치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실의 어려움은, 세상은 더 발악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하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일하신다, 내 존재와 함께 하신다,고 믿음으로 감수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고난을, 부족을, 한계를 사는 거다. 그게 믿음이다.
'하나님이 오늘 나와 일하신다, 내가 당하는 모든 조건, 울어야 하고 아파야 하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조건들이 무의미하거나 헛되지 않다`라는 것이 신자의 오늘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우리 존재의 가치이고, 내가 살아내야 할 나의 책임이며 나의 명예이다.
이 부분이 꼭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신자의 명예로운 하루가 되어야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외면하고 싫어하는 이 고난은, 사실은 우리에게는 기회이고 자유이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격려가, 고난이 우리에게 동일한 것어었듯이, 우리에게 동일한 위로가 되어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귀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일하시는 탓이요, 우리가 고단한 것은,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거이다.
고난을 벗어나는 걱정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 순종하고 인내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가 메시야가 되거나 우리가 보석을 만들어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 보석을 담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내 생애와 내 조건 속에서 기적으로 일한다고 믿는 충성을 바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일병목회강좌_ 고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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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된다. 세상식으로 오해하지 마라.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적인 기대가 가지는 번쩍번쩍하는 세상적 가치로 치장하거나 증거로 삼지 않고,
세상의 권력이나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것, 그래서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며,
또한 그것은 그가 은혜로 그의 복음을, 그의 구원을 그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놀라운 지혜라는 것을 너희들 기억하라.'
메시야는 예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먼저 잘 알아야 한다.
사도바울의 이 각오, `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없다》 이렇게 얘기한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알고 나서야 잘하는 것과 잘못하는것이 구별이 된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잘못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때는 뭘 잘못하느냐 하면, 예수를 모르니까 세상적으로 사는데, `더 악하게 살았느냐, 덜 악하게 살았느냐? 순진하게 잘못했느냐, 악랄하게 잘못했느냐?` 밖에 없다.
우리만이 잘 할 수 있다. 잘 할 수 있다는 건, 예수 안에서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자라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쿠오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로마 네로 황제시대에 이제 그 마지막에 예수 믿는 사람들 붙잡아서 운동장에서 십자가형에 처하고 화형을 시키고, 맹수들 한테 먹히는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다 죽는다.
그런데 어려서 그 영화를 볼 때 어린 마음에도 굉장히 불쾌했다. 부끄럽고, 지는 것같고, 세상사람들이 볼 때 예수 믿는다는 것들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다 어떤 열매를 맺느냐 하면, '저 사람들은 무얼 믿길래, 예수가 누구길래 목숨도 불사하는가?' 이렇게 되곤 했다.
《신자들이 죽으면, 그 죽음이 생명을 만들더라는 거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신자들은 좀 다르게 살아야 된다. 종교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르지 않다. 종교성이라고 얘기하면 우리는 기복적으로 생각을 한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시대에 '신앙이 좋으면 이 병에 안 걸린다. 이 병에 걸려도 기도하면 낫는다' 이런 식의 종교성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살아있는 것이 영광의 기회이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 우리의 죽음은 헛되지 않다'라는 걸 아는 거다. 이렇게 신자는 다른거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고, 진실하게 산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쓰는 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만이 없는 거다..
사도바울이 겪어보니까 여기 있는 것같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버린 바 되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그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릴 수 밖에 없었던 그런 극한의 상황까지 가더라는 거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떤 확신, 어떤 안전망, 어떤 넉넉함을 보이는 것으로 주지 않더라는 거다.
그러면서 이 얘기는 왜 하냐 하면, `이러한 방법이 예수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 안에 열매맺는 일, 이 둘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실을 살아내는 분명한 이해여야 한다. 우리가 당한 환란이 너희에게도 있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받은 위로가 너희에게도 있을 것이다.` 이다.
●우리가 지금 후세가 되어 보면 그렇다.
이렇게 큰 사도가 그의 전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데 늘 가장 최악의 조건속에서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그의 복음과 그의 뜻을 이루는 필요한 방법이라면, 그 방법을 우리 모두가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 아니냐 이거다.
우리 오늘 봤던,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짓밟아 짖이겨진 이런 길을 간다.
그게 무슨 비참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이런 것만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가치와 우리 존재의 이유를 방해할 수 없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이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안에 영광을 만든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실 수 있고, 그 수를 끝없이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서부터 준 약속이다; '내가 네 자손으로 하늘의 별같고 바다의 모래같게 하겠다'
●그러나 그걸 이루시는 방법은 예수의 성육신에서, 십자가 고난에서 보듯이, 그것은 정말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죽임을 당하는, 참으로 비참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자랑으로 여기신다》
빌립보서 2장에 있는 고백과 같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되어 있다.
●인간의 진정한 영광이 세상이 말하는 부귀영화냐?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냐? 에서 선택을 해야 된다. 그것이 고린도 후서의 가치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실의 어려움은, 세상은 더 발악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일하신다, 내 존재와 함께 하신다,고 믿음으로 감수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고난을, 부족을, 한계를 사는 거다. 그게 믿음이다》
☆●'하나님이 오늘 나와 일하신다, 내가 당하는 모든 조건, 울어야 하고 아파야 하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조건들이 무의미하거나 헛되지 않다`라는 것이 신자의 오늘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우리 존재의 가치이고, 내가 살아내야 할 나의 책임이며 나의 명예이다
이 부분이 꼭 기억되어야할 것이다. 신자의 명예로운 하루가 되어야할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서 총독 앞에 섰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 `변명을 해봐라` 하자;
'여기 서있는 모든 여러분, 이렇게 손이 결박된 것만 빼놓고 여러분 모두가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 내가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나의 사역에 대하여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겠습니다'
그 변명은 이제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내가 전하는 복음이 뭔가를, 내가 얼마나 억울한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증언하고 다니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여러분이 잡아죽인 예수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귀한 기회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외면하고 싫어하는 이 고난은 사실은 우리에게는 기회이고 자유이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격려가, 고난이 우리에게 동일한 것어었듯이, 우리에게 동일한 위로가 되어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귀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일하시는 탓이요, 우리가 고단한 것은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거이다》
《고난을 벗어나는 걱정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 순종하고 인내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가 메시야가 되거나 우리가 보석을 만들어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 보석을 담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내 생애와 내 조건 속에서 기적으로 일한다고 믿는 충성을 바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일병목회강좌-고후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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