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고난과 가장 사소한 일상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일을 한다

nazunzaro 2020. 4. 16. 06:42

《그가 당한 고난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난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기대에 차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오늘은 나와 함께 무슨 일을 하시려는가? 모두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일상이다.

일상, 여기가 많이들 무슨 특별한 무슨 초월적인 명분있는 임무가 생길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일상이다.

어떤 일상? 지지고 볶는 일상. 애들 기르는 것, 한 가정을 지키는 것.

매일 웃고 기뻐하는 그런 가정은 없다. 왜냐하면 삶은 버겁다. 일상은 하루를 빵꾸내면 빵꾸낸 걸로 메꾸어지지 않는다.

가장 우리를 소모시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밥을 해먹고 다시 설겆이를 해야 되고, 청소를 해야 되고 다시 어지러워지고, 옷을 빨아야 되고 다시 더럽혀지고..

그러나 그것이 일을 한다는 거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뭐냐?

하나님이 가장 사소한 일들을,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일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코로나 사건 때문에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그러나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의 시점에서 보면 이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거의 차이가 없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다. 낙심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쉽게 체념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가 보통 칠팔십을 산다고 할 때 그 칠팔십의 인생이 우리가 부여받은 기회인데, 결국 궁극적으로는 주와 함께 영원한 나라에 가는 경로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이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영원무궁토록 살 사람들도 아니었고, 어떤 훌륭해지는 일이 이걸로 인해서 방해를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일에서도 자원봉사자나 또 요즘 우리 국민들 서로를 돌아보는 사람들로 인해, 평소에 몰랐던 배달민족의 뛰어남을 서로 나누는 일이 되기도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사망이 공포와 위협을 가하지만, 부활의 영광과 권세는 어느 것에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법이다.

 

40년이 지나서야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모세가 반발했다; '하나님, 뭐 하시다가 이제 오셨어요? 당신은 누구세요? 여태껏 뭐하셨어요?'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답을 하시는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여호와의 일을 중단 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다'

지난 40년 동안 모세는 죽어났고 반발했고 원망했고 체념했고 절망했고 통곡했고, 그런 날들이 그에게 아코디언의 주름같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된다.

우리의 잣대로 원망과 감사가 교차하는 변덕이 죽끓듯 하던 신앙의 자리에서 부터,

견고하고 무한하고 위대하고 그리고 오늘을 책임지는 자리로 와야 된다.

 

우리 몸둥아리를, 우리의 오늘을, 우리의 현실을 책임있게, 분별있게,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 일에 충성하기를 주 앞에 약속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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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지금 장막집에 있다.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는 집에 장착할 것이다'

●☆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는다라기 보다 덧입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보통 가지는 내세적 신앙관으로 인하여, 이 현실은 빨리 지나가야 되고 소용없는 시간이고 가치없는 장소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종말관과 다르다.

우리가 겪는 이 세상에서의 현실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빨리 지나가야 되는 소용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중요한 기회로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물론 주님과 함께 거하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지만, 성령이 보증으로 주시고 이 세상을 살게 하는 현실이 지금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얘기이다.

 

'몸으로 행한 것을 심판받는다' 라는 말은;

'우리는 주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책임은, 주께서 기뻐하실 일을 지금 내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주와 함께 사는 것이 기쁨인 것같이, 지금 현실에서는 주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가 살아있고 순종하고 위대해야 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게 전부가 아니다.

그러니까 자유란 무엇으로 부터의 해방이 전부가 아니고, 무엇을 위한 자유다.

구원이 그렇다.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에서, 생명과 성령으로, 그 열매와 영광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역사적 BC, 기원전 천 사백 몇년 몇월 몇일이 아니고, 오늘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오늘인 것이다. <오늘 너희 인생의 오늘, 내일 무슨 염려가 있든지 내일에 대하여 어떤 불안이 있든지, 어떤 위협이 있든지 오늘, 오늘을 살아라. 오늘을 순종해라.>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 앞에 회개를 나열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회개할 것들을 넘어서는 한걸음을 내디디라>고 얘기하는 것이 오늘 광야에서의 삶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못난 짓을 한 건 우리를 위하여 남겨진 교훈이라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이 증언한다. <그들의 실패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들이 구원을 못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구원을 명예와 영광으로까지 승리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예수와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사는 것이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몸으로 여기를 살게 하신다. 그러면 내가 죽어서 주와 함께 사는 것이 기쁜 일이라면, 주께서 나를 오늘 여기서 살게 하는 일이 주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을 내가 수용하여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책임 아니겠느냐?` 이렇게 사도 바울이 얘기한다. 놀랍지 않은가?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도 감옥에 갖혀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내가 살아서 나갈지, 죽어서 나갈지 아직 알수 없다. 그러나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우리가 쉽게 살아있는게 고통인데 빨리 죽는게 복이 아니냐 그럴텐데, 바울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살겠다. 내가 살아있는게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 우리를 위하여 오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쁘심이었다.

《우리 못난 것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이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요구. 어떤 요구?

로마서 12장 1절만 해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즉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라는 뜻이다.

 

☆●그러니 하루라는 시간과 정황을, 내 몸둥아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기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후 4장에서 얘기한바대로 우리는 어떤 때는 원망을 할 수도 있고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요구한다.

사도바울 자신도 고린도후서 1장에서 나오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의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렸노라`

완벽하게 절망했다 그러나 살아나다. 그가 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하심이라`이걸 배운다.

 

그리고 바울이 당한 고난을 우리의 오고 오는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어떤 고난을 당할 때, 바울의 증언과 그 앞에 예수의 증언으로 우리의 힘으로 삼는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런데 거기에는 늘 그는 하나님이시니까 쉬웠겠지, 하나같이 이 유혹이 들러붙는다. 거기에 바울이 따라 오는 거다. '바울은 인간이었다. 그도 이것이 하나님의 기쁜 뜻으로 알고 이 길을 걸었다' 그게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가 당한 고난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난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기대에 차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오늘은 나와 무슨 일을 하시려는가? 모두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일상이다. 일상. 여기가 많이 무슨 특별한 무슨 초월적인 명분있는 임무가 생길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일상이다. 어떤 일상? 지지고 볶는 일상. 애들 기르는 것, 한 가정을 지키는 것.

매일 웃고 기뻐하는 그런 가정은 없다. 왜냐하면 삶은 버겁다. 일상은 하루를 빵꾸내면 빵꾸낸 걸로 메꾸어지지 않는다.

●가장 우리를 소모시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밥을 해먹고 다시 설겆이를 해야 되고, 청소를 해야 되고 다시 어지러워지고, 옷을 빨아야 되고 다시 더럽혀지고.. 그러나 그것이 일을 한다는 거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뭐냐? 하나님이 가장 사소한 일들을,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일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명한 가수가 되거나 유명한 예술가가 되어 사람들과 앞에 박수갈채를 받고 이렇게 존경을 한 몸에 가지는 그런 것들이 위해한 게 아니라, 가장 복된 일은 관중이 되는 거다.

노래 잘하는 사람의 노래 들으러 가고, 좋은 예술가의 작품보고, 운동 잘하는 뛰어난 천재들의 경기를 보는 것이 그것이 복이다.

그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가장 놀라운 특권, 그런 것을 누리고 살고 즐기는 인생을 주셨다는 거다. 노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글에서 이렇게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세상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충만하도다' 우리가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봤던 세상은 공포스럽다.

《지금도 코로나 사건 때문에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그러나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의 시점에서 보면 이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거의 차이가 없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다. 낙심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쉽게 체념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가 보통 칠 팔십을 산다고 할 때 그 칠팔십의 인생이 우리가 부여받은 기회인데, 결국 궁극적으로는 주와 함께 영원한 나라에 가는 경로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이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영원무궁토록 살 사람들도 아니었고, 어떤 훌륭해지는 일이 이걸로 인해서 방해를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일에도 자원봉사자나 또 요즘 우리 국민들의 서로 돌아보는 이들로 평소에 몰랐던 배달민족의 뛰어남을 서로 나누는 일이 되기도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사망이 공포와 위협을 가하지만, 부활의 영광과 권세는 어느 것에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법이다.

 

모세가 물었던 것을 기억해 보라. '모세야,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내 백성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꺼내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보내겠다` 하자, 모세의 반발이 뭐였나?

'하나님 뭐 하시다가 이제 오셨어요? 당신은 누구세요? 여태껏 뭐하셨어요?' 얼마나 놀라운 답이 나오는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여호와의 일을 중단 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다'

 

그러니 모세가 죽어났고 반발했고 원망했고 체념했고 절망했고 통곡했던 날들이 그에게 아코디언의 주름같이 켜켜이 쌓여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된다. 우리의 잣대로 원망과 감사가 교차하는 변덕이 죽끓듯 하던 신앙의 자리에서 견고하고 무한하고 위대하고 그리고 오늘을 책임지는 자리로 와야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7절이하 마지막에 《우리 몸으로 한 일을 따라 심판한다》 이 말의 아주 무서운 성경의 설명이 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날선 검같다하는 얘기는 뭐냐 하면, '너희 오늘 이핑계 저핑계 대고 빠져나갈 수 없다. 네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슬쩍 도망을 가든가 원망이라는 이름으로 반발이라는 카드를 꺼내서 슬쩍 책임을 회피하는 것 내가 다안다. 너 제대로 해라` 그게 이 무서운 경고다.

겁 주려고 한 게 아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오늘, 우리 모두의 오늘, 각각의 지금의 인생, 현재를 신앙인으로 실력만큼 살아내는,

그리고 그것이 두려운 경고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예수 안에서 주신 위대한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승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된다.

 

우리는 저 광야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래야 된다. 그리고 우리의 진심이 주 앞에 상달될 뿐만 아니라,

●우리 몸둥아리를, 우리의 오늘을, 우리의 현실을 책임있게 분별있게, 할 수 있는 만큼 충성하기를 주 앞에 약속해야 된다.

 

●◇반복되는 하루를, 매너리즘이나 변명이나 비겁함으로 도망치지 않게 붙들어야 된다. 하루를 사는 기쁨과 위대함을 알아,

 

우리의 나이가 복되게 알차게 먹어가는 한해한해 한달한달 하루하루 정작 오늘이 되는 그 승리를 누려야 된다.

 

(*일병목회강좌-고후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