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곧 은혜이고 복음이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후회만 한다. 당연히 우리도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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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하는 일 / 5장. 순교보다 일상]
- 추상적 삶에서 구체적 삶으로 -
마태복음 26장 36절 이하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제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로 가야 한다. 겟세마네에서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기 전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무언가? 그분은 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건가? 이러한 기도를 왜 하시는 걸까? ★기적보다 십자가가 더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들에게 죽음이 최종 권세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주와 구원자로서 우리의 인생에 복과 승리를 약속하시며, 실제로 행하신다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는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즉 우리의 실패와 절망이 절대로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욕 먹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고 그것보다 훨씬 큰 존재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고난이 담긴 인생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도록 다듬기를 원하신다.
★고난이 곧 은혜이고 복음이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만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선 주일예배 공동기도 때 지난 주간에 지은 죄에 대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한다. 지난 주간에 지은 죄를 회개하지 말고, "이번 주에 잘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은혜 주시고 정신 차리고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라고 한다. 얼마나 멋있는가?
'지난 주간에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속에서 헤매다 왔습니다' 하는 그런 기도를 왜 하는가? 창피하지도 않은가? 혼자 있을 때 하면 되는 기도를 교인들 앞에서 뭐 하는 건가? 꼭 껍질을 벗겨야 0하는가? 그 자리에서 나와야 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이시고 행하셨는지 보라. ★그분이 왜 공생애를 사셔야 했는가? 그 콘텍스트(문맥 혹은 정황)을 가져야 한다.
요한복음 13장부터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 이런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실제로 그릇에 담기지 않고 명분이나 좋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걸 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심으로써 뒤에 나오는 이야기 전부, 기적을 행하시고, 마태와 함께 하시고, 나사로와 함께 하시는 콘텍스트에 우리를 끌어당긴다. 이것이 없으면 성육신은 없고 십자가와 부활만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이 자꾸 추상화된다. 추상화가 되어 콘텍스트에 담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면 소통이 되지를 않는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하소연을 할 때가 많다. 그 예로 동창 모임이나 교회 모임을 생각해 보라. '요새 난 이만저만한 일로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라고 하면, 다짜고짜 '임마, 너 늙어서 그래'라고 한단 말이다. 누가 모르는가? '요새 난 눈도 잘 안 보이고'라고 하면 '그거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래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 '얼마나 힘드세요? 어디 갈 일이 있으시면 저를 부르세요. 제가 옆에 따라다니면서 눈이 되고 발이 될게요' 라고 하면 된다.
이런 거 없이 정답만 얘기하는 것을 '설교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비아냥댈 때 '설교하네'라고 한다. 정황도 없고 동정심도 없이 정답만 아무데나 남발하면 '기관총 쏘냐? 그러는 거다. 이는 자기 인생을 멋지게 안 살아봐서 못하는 거다. 자기 인생을 멋지게 살았으면 말할 때 추상명사들만 나열할 수 없다.
그런 걸 본 적도 배운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겪은 의심과 고난과 불평 등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어떻게 재료로 써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넉넉한 마음으로 -
채소나 나물 같은 거 먹다 보면 쓴 게 맛있다는 거 알 것이다. 달면 못 먹는다. 써야 맛이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쓴 것은 원래 약이라고 한다. 그런데 쓴 것이 맛을 낸다.
내 제일 친한 친구 중에 고등학교 동창이 있다. 그 친구가 아주 주당이다. 술을 아예 짝으로 갖다 놓고 마신다. 어느 날 하도 한심해서 내가 물어봤다. '야, 그걸 왜 먹냐?'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나를 동정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영선아, 이건 약이야. 써서 애들은 못 먹어'라고 했다. '오죽하면 먹겠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멋있잖은가?
★우리는 왜 이런 걸 못 하나? 기독교는 훨씬 크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다.
'못해도 돼'라는 말을 무책임으로 끌고 가는 것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거다
이러한 말은 기독교가 얼마나 넉넉한지, 회전반경이 얼마나 넓은지를 가르쳐 주는 거다.
요즘 나는 나이가 드니까 주차를 못 하겠다. 후진해서 주차를 하면 내 차가 비스듬히 서 있다. 차에서 내려서 주차된 차를 보고 놀라서 다시 주차를 하면 원래 그 자리이다. 나는 이게 정말 웃긴다. 다시 똑바로 주차를 한다고 했는데 차는 여전히 비스듬이 주차되어 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차를 뺄 때는 '삐~' 하고 소리가 난다. 다른 차를 긁을 수 있다는 적신호다. 이제는 반응이 제대로 안 된다. 이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것을 감수하는 게 실력이다. 얼마나 용량이 크고 얼마나 짐을 지고 갈 수 있느냐가 실력이다.
해설하거나 심판을 보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뛰는 애들이 내 자식이기에 음료수를 준비하고 응원도 하고,
운동이 끝나면 데리고 와서 목욕도 시키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젊었을 때는 선수로 뛰고 심판이나 중계나 해설은 하지 말라. 그냥 선수로 뛰고 그리고 커라.
모든 운동은 육체 단련으로만 그치지 않고 정신을 키운다. 2019년 윔블던 테니스 결승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가 결승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난다. 마지막 세트에서 12대 12까지 승부가 나지 않자 결국 타이브레이크를 해서 페드로가 졌다. 페더러가 매치 포인트를 세 번이나 땄지만 그는 결국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약 5시간 동안 혈전을 벌렸고 윔블던 역대 최장시간 경기로 기록될 만큼 명승부였다. 경기가 끝나고 아나운서가 우승한 조코비치에게 한마디 하라고 마이크를 건넨다. 조코비치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위대한 경기를 승패로 나누는 건 비극 아닙니까?'
이겨서 기쁜 감격보다 훨씬 더 나아간 거다.
경기에서 지고 그 진 자리를 체념이나 비극으로 끝내지 않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이다. '결국 이겨냈잖아요' 라고 쉽게 이야기하지 말라.
★체념이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만나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부활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대강 봐주시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최선으로 최고의 능력으로 우리 편이시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이 거기까지 쫓아 들어오신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그러는 거다.
★우리가 보통 기독교가 복음이기보다는 유교 같다고 하는 것은 '네 이놈, 교만하고 게으르지?'라고 꾸짖지, '얼마나 고생이 많니?'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소외된 자와 병자를 고치시는 길을 가실 때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나온다. 예수님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이 늘 있다. 심지어 예수님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요 8:48)고도 하고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 라고도 한다. 심지어 그분께 죄를 덮어 씌우기까지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라고 소리칠 때만 해도 그들의 기대는 당연히 권력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0-25)라고 분노했다.
왜? 속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 생각에는 예수님이 자기들을 속인 것이다. 너무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교인들에게 찾아오는 제일 큰 시험이 배신감이다. 자신은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 보상이 없다는 점에서 시험에 든다.
그런데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에 보상이 없다는 그런 얘기를 안 한다. 목사가 굳이 교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
★질서를 위해 잘잘못을 가릴 규칙은 필요하지만 결국은 다 끌어안고 가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끌어안으시고 감당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라고 했던 것처럼
★그분을 믿는 우리도 그래야 한다.
- 순교보다 더 큰 삶 -
이러한 반전을 위해서 복음서의 초반부에는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겪으신 다양한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그 반대편에 있는 자의 갈등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것 같이 사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이 마지막에 화해를 이루고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우리도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아들이 살았던 삶을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삶이 곧 우리 인생의 거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빌립보서 3장이 바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0절) 부활에 이르려 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절)라고 고백한다.
★당연히 우리도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부르시는 권능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꺼이 죽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죽는 것은 그 옛날 순교라는 하나의 미사 여구처럼 쓰인 것이 아니다. 순교는 지금 우리가 할 게 아니다. 우리는 고난을 짊어지고 오해와 왜곡과 부당함 속을 걸어가야 한다. 한 번 죽고 마는 것은 쉬운 거다. 한 번의 순교는 쉽다. 한 번이면 되니까.
그 안에서 몸부름 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인생 끝자락에서 믿고 금방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제일 좋지'라는 생각이 들면, 이런 생각을 해 보라. '지금이 기회인가?' 라고 말이다.
연예인들에게 작품에서 무슨 역을 맡았는가 하는 고민은 사치이다. 그들에게 제일 큰 걱정은 극 중에서 배역이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극 중에서 군대를 가거나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거나 죽으면 큰일이다. 그건 배역이 사라지는 것이다. 계속 눈에 띄어야 작품을 계속하는 거니까.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나와 내 인생을 쓰신다.
그런 자부심과 그런 책임감을 느끼며 실제로 그 일을 해야 한다. 작은 만남과 작은 일에서도.
톰 라이트와 월터 브루그만이 오늘날 팬데믹 상황에 대해 쓴 책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어려움을 겁 주는 데 쓰지 말라. 그리고 이 상황을 '예수 안 믿어서 그렇다'라고 갖다 쓰지 말라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애통해 하고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 빌고, 속히 끝내 주시기를 빌라.
겸손하고 무릎을 꿇어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때는 아무도 모른다.결과가 나와야 안다. 서둘지 마라'고 하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그런 고난과 도전이 없으면 그건 가짜다'라고 이야기한다.
톰 라이트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아마도 당신에게 회개를 요청하신다는 뜻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들에게 욥기를 읽으라고 얘기해 주라. 내 말인즉, 그 말이 틀렸다는 뜻이다.(『하나님과 팬데믹』 32면)
우리 각각의 현실과 정황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이 숨 쉴 시간을 기간을 주셨다가 적당한 때에 도전해 오신다. 부르시고 또 한 계급씩 올라가는 그런 좋은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마태복음 20장 20-28에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그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톰 라이트는 이 내용을 그의 책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에서 아주 멋지게 풀어낸다;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한 예수님의 좌우편에 대해 마가복음 10장 40절에서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분의 오른쪽에 오른쪽과 왼쪽에는 두 강도가 있었다(310면).
이는 유머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경의로움이기도 하다.
또 이런 비교도 있다. 요한복음 13장 27에는 27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를 톰 라이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간 거 맞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라고 불렀다. 누가 더 악당이었겠나?' 굉장하다.
★쉽게 생각하지 말라.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놀랍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온 우주와 그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 그리고 그 견디는 것은 쉽지 않다. 울어야 한다.
우리는 유교적 전통에 사로잡혀 있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한 거다. 그런 것들을 배워 나가야 한다. 신앙생활 속에서 현실적 도전 앞에서 하나씩 배우게 된다.
- 고난을 누리는 삶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막막하고 단순한 생각들을 자꾸 깨야 한다. 깨고 나와야 한다.
미국을 갔다 온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다. 보고 오면 달라진다.지리 시간에 배운 것하고는 다르다.
땅도 크고 인구도 많다. 기독교에 들어오면 뒤집어질 것이 많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것은 자연주의다.
자기도 모르게 자유주의가 체득되어 있다. 경쟁적으로 살다가 복음이 들어왔는데,
★이 복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놀랍다. '너희는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다. 너희는
자신의 힘으로만 살지 않는다. 훨씬 큰 보호자가 있다. 걱정 마라'가 복음안에 있다.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그때그때 사용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모르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르고 있으면 밤낮 똑같은 이야기만 하다 만다. 그러면 만나기 싫어진다. 왜? 밤낮 싸우다 말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은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배우고 넉넉해질 수 있는 때이다.
이 고난의 시기를 정답으로 때우지 말고, 묵묵히 몸소 배우며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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