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박영선목사 / 다시 보는 열왕기(12) / 2021.12.26. (2부)]

nazunzaro 2021. 12. 30. 04:50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실패하는, 악한, 고통스러운 인생을 허락하는가? 기독교신앙의 최고 특징인 '사랑과 믿음'이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 대등한 자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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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다시 보는 열왕기(12) / 2021.12.26./ 2부]

< 왕상 21:17-29 >
열왕기에서 북 왕국과 남 왕국의 왕들의 통치에 대한 성경의 평가를 만나게 된다. 누구는 몇 살에 왕이 되어 몇 년간 통치하고 조상들하고 함께 잠드니라, 라는 짧은 기록 속에 남북 왕조의 역대 왕들의 연대표가 나오는 셈이고, 짧은 평들과 업적, 그는 여로보암을 따라 죄를 행하고 악을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심히 부족했다, 또는 드물게, 그는 다윗의 길을 따라가서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다, 라는 평가를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왕들을 세워 사사기에서 한 걸음 더 간, 어떤 지위를 부여하여, 인류에게 인간의 올바른 도리가 무엇이냐,를 가르치는 역사를 열왕기에서 만나고 있다.

사사기에서는 그것이,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한 개인의 책임의 차원이었다면, 그리고 그 차원을 실패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하는 이기주의로 망해버린 역사가 사사기 였다면, 이제 열왕기에서는 왕권까지 주어진 조건에서 하나님이 모든 왕들의 일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또 안타까운 마음으로 꾸짖고, 또 기록을 남겨 후대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여주고 있다.

왕권을 가진다는 것은 알다시피 예수님 오셨을 때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도 주고받았던 질의 응답처럼, '나라가 임할 때 우리 둘을 좌우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께서 '내 좌우에 누가 앉을지는 아버지께서 정할 것이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내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이렇게 되었다.
'왕은 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열왕기에서 보는 열왕들의 실패는, 그들은 통치하고 섬김을 받는 자라, 라는 굵은 차원에서 실패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제일 실패하고 제일 욕을 먹을 최고의 악왕이 아합이 된다.
아합은, 북왕조는, 워낙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왕이 없는 나라이고 왕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이 되어 후손들에게는 여로보암의 길, 아합의 길, 이렇게 표현되는 것은 최악의 선택, 최악의 운명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면 아합은 왜, 어떻게 극악무도한 왕이 되었을까, 하는 것이 우리한테 관심사인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그런 문제에 대한 더 따질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치 않고, 쉬운 답을 늘 반복한다.
'왜 너는 그랬어?' 이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가지는 교훈이면, 인생을 살면서 '인생이 뭐야?' 할 때, '뭐긴 뭐야? 그냥 사는 거지' 이렇게 말도 안되는 답을 하는 것과 똑같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하는 도전, '너는 누구야? 뭐야? 이렇게 사는 건 무슨 가치가 있어? 아무 생각도 없이 산단 말이야?' 하는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 답을 접고, 영웅주의 역사관으로 답을 찾는다.

영웅주의 역사관이란 모든 인류나 국가가 가지는 역사에 대하여 잘한 사람을 칭찬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지는 질문들에 대하여 답을 교묘히 회피하고 자신을 속이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 한국에는 딱 두명의 위인이 있는데 그 첫째가 세종대왕이요, 둘째가 이순신이다. '나는 이순신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때 이렇게 성경이 묻는 거다. '넌 어떻게 살고 있는데? '난 이순신을 존경한다니까?' '글쎄 걔는 죽었다니까? 넌 지금 살아 있잖아, 이 웬수야.' 이게 성경이 하는 말인데, 통 대답을 안한다.

'왜 아합은 그렇게 됐을까, 왜 이순신은 그렇게 했을까, 나는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도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모두에게 넘겨서,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정치에다 다 넘겼다. '누구를 뽑을 것이냐?' '하나님, 제가 기도 많이 할 테니까 답안지에 도장 좀 대신 찍어주십시오.' 이게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여러분들은 저에게 항의할 수 있다. '목사님,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대 안 한다. 우리 각각의 삶이다.
누구를 저주하고 누구를 편들고 누구를 숭배하고, 누구에게 원한을 갖는 것 모두가 우리에게 유익으로 오라고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성경을 읽으면 인류, 인간, 역사, 인생, 현실에 대한 무궁무진한 사례들이, 경우들이, 거기서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들이 나열되고 있고, 이유가 나열되고 있다.
아합은 왜 이렇게 됐는가? 아합은 자기를 남에게 팔아먹었다고 한다. 아합은 자신을 하나님께 묶지 못하고 자신을 팔았는데, 그를 충동한 것은 이세벨이라고 한다. 그게 오늘 본문에 가장 중요한 증언이다.
25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왜 그 충동을 받았어? 왜 자신을 팔아먹었어?' 이렇게 얘기하는 건 너무 간단한 얘기이다. 왜 팔았을까, 왜 이세벨의 말에 그렇게 휘둘림을 받아서 제대로 된 왕 노릇 한 번 못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야 된다.

우리는 이 부분이 아합은 국왕이고 그래서 최고로 악마 같은 왕이었을 거라 하는 생각을 가지기 마련인데, 오늘 본문에서도 보듯이 그는 우상을 섬겼고 아내의 말을 따라 궁전과 성전에도 신당을 세웠고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적하고 엘리야의 하나님의 응답을 보았으나 회개하지 않고, 그런 모든 문제,
그리고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뺏고 그를 죽이고 하는 모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를 통한 저주의 예언의 앞에 그는 떨고 엎드리고 그리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나약한 모습으로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는 남과 달리 심지가 강하고 강철 같은 비정한 마음을 가져서 극악무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는 거다. 모든 악인은 분별이 없는 거다. 모든 악인은 그때 할 수 있는 것 중에 본인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로 내몰리고 있다,라고 성경은 얘기한다. '그를 불쌍히 봐라'가 아니라 '그의 처지가 우리의 처지와 흡사하다'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합왕이다.

신약으로 와서 에베소서 4장 17절에 오면 이 무엇에 팔렸으며 무엇에 충동됐으며 무엇에 이렇게 분별도 지혜도 없이, 그의 인생을 헛되히 악한 왕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았을까?
에베소서 4장 17절에 정확히 인간의 존재와 운명과 실력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17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모든 인간의 현주소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처지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인 되었던 것이 용서를 받아서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정체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자격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 죄인들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허락되기 전에 인생의, 모든 모습은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는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부끄러움이다.

두려움이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살 이유, 살아낼 힘, 살아야 할 목적이 없으면 그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겁을 낼 수밖에 없다.
모든,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유는 그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강한 자는 독을 가지지 않는다. 독은 언제나 연약한 존재가 가진다.

부끄러움이란 뭐냐 하면, 인간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기독교가 주장하는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특징, 《사랑과 믿음》을 할 수 있는 자로 불렀다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을 누구와? 하나님과 하나님과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신뢰의 관계로 부름을 받는다.
그것이 인간성이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복 주심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한 그 모든 나눔과 용서와 기다림과 아량과 자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인간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가졌던 인간에 대한 창조 목적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대로 멈춰 섰으니까, 회개가 잘못을 지우는 데서 끝나지, 그 ​회개가 잘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인생을 사는 데로는 못 나오고 있더라, 이거다.

★'용서해라, 너는 섬겨라' 이것은 윤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거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지으신 그 인간,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모든 권한을 주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응답하겠다."
★예수가 기도를 우리에게 맡기신, 그의 생애 그의 모범은 무엇인데? 용서이다. 사랑이다. 섬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강요되는 규칙들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성이, 세상이,
발견하지도 만들지도 못한 인간임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루셨고, 우리의 생애 속에서 우리에게 선택지로 늘 주어진다.

아담이 범죄하고 스스로 두려워서 도망을 간다. 숨는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너 여기 왜 있느냐?'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아직 실력이 없는 존재인 것을,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두려움 속에 살고 부끄러움 속에 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예수 없이는 이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결국 스스로 강하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속이며, 배신하며, 더러우며, 부끄러우며, 그리고 무정하다. 그 마음이 굳어진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다. 방탕은 도덕성을 얘기하지 않는다. 일관된 목표, 일관된 가치를 추구할 수 없다. 방임한다. 그때마다 멋대로 할 수 밖에 없다.

우린 다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우리는 사사기에서부터 출발해서이 열왕기에 이르도록 ★가장 중요한 주제가 '자유와 책임의 문제'라고 열왕기 시작 서두에 밝혔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인생, 실패하는 인생, 악한 인생, 고통스러운 인생을 허락하시는가?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특징인 '사랑과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등한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랬다.
사랑이 대등한 자격을 가지지 않으면 동정이 되고, 믿음이 대등한 자격을 가지지 않으면 공갈이 된다, 그랬다.
우리가 하는 기도 속에 얼마나 많은 공갈이 들어 있나 보라.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뭐든지, 하라 그러는 대로 할게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준 하나님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가장 무식한 기도를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놔야 된다. 그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거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 앞에 예수만 세우고 그 옆에 하나님이 서시고 '누구를 택할래?' 이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여태껏 끌어왔던 하나님 없었던 삶, 방탕하게 내 마음대로 답 없는 길을 이리저리 살았던 삶을 놓아둔 채,
그것과 이제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 이 새로운 기회와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한다.

★왜 그럴까?. 이것은 한 번의 구호, 한 번의 기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생겨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 내내, 신약 교회사 내내 이 시련, 이 훈련, 이 경험이 역사에 그리고 우리 각 개인의 인생에 펼쳐진다.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할래?' '제가 지난 주엔 이렇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럼 이번 주엔 어떻게 할래?'
이게 반복되는 인생이다. 왜 반복인가? 다시 해보자는 거 아닌가? 어저께는 쉬웠는데 오늘은 어려운 게 아니라,
어저께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나아지지 않지 않는가?
매번 와서 회개를 하지 않는가? 매번 주일 아침마다 '지난 주에도 병신같이 지냈습니다.'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니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어제나 오늘이랑 똑같았는데 어제보다는 나아져야 되지 않느냐? 거긴 못 나가고 있지 않은가.
'난 엘리야가 좋아.' 개 썅, 무슨 엘리야야? 내가 살아야 될 거 아니야? 내가 누구냐가 아니야? 뭐 때문에 성경을 읽는 거야?
이게 고함 질러서 될 문제야? 우리 각각이 살아내야 되는 문제인데, 왜들 덮어버렸나? 어디서 그렇게 된 건가?
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이, 이제껏 아무렇지도 않게, 처음 믿었을 때 보다도 못한, 그땐 감격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감격마저도 없어진, 모든 것이 다 유야무야가 된 자리에 너무나 당연하게 나와 앉아 있는 여기에 대한 현실적 도전이다. 매일 묻는 거다. 매일.

우리는 시편 1편에서 이런 놀라운 구절을 읽는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으니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도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이게 아합이다.

​아합은 왜 그랬냐고? 그는 영혼에 닻이 없었다. 그에게는 용서를 받을 데도, 새 힘을 얻을 데도, 새 사람이 될 어떤 기적도 은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 뭐 때문에 아합을 이렇게? 그러니까 아합을 꺼내놓고 그를 저주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 이거다.

★'이렇게 사는 게, 이게 사는 거냐?'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거다. '이것보다 낫게 살아야 될 거 아니냐?'
그렇다. 이것보다는 낫게 살아야 된다. 갈멜산에 선 엘리야, 거기까지 갈 필요 없다.
★내 생에, 내 현실, 내 조건에서, 나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나으냐? 나한테는 일관된 신앙과 목표와 가치가 있느냐? 그리고 그 은혜를 매일 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멋진 사람이 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셀 수 없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된다.
그러나 그 훈련이 일관된 목표와 일관된 방법과 규칙이 없으면 우리는 늘 '쌓고 허물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네가 누구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며, 어떻게 그 일을 이룰 힘이 있는가 구하라. 매달려라. 내가 응답하마. 네가 기도하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필요한 거 뭔지 알고 있다. 구해라'

'왜요? 네가 커야 되니까. 네가 돼야 되니까.' 기도하고 실패하고, 기도하고 실패하고, 기도하고 실패하고.
해보고 안 되고, 해보고 안 되고, 좌절하고, 울고 통곡하고.
그러니 순종이라고 나를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내놓는 것은 책임을 넘기는 거다.
나라는 존재가 필요 없어지는 거다.

엘리야 선지자 노릇하면서 가장 핵심 되는 게 뭐였나? 엘리야가,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를 떠나서 먼저, 자기가 먼저 아합을 불러, '내가 허락하기 전에, 내가 말하기 전에는 이 가뭄이 그치지 않는다.'
갈멜산 전투도 자기가 거기에서도 꿇어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우리 하나님인 것과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을 보여 주옵소서' 여기에 응답하시는 것으로 이 사건이 기록돼 있다.

거기에 비하면 아합은 방탕의 주인이다. 방탕은 성경에서는 늘 헛된 일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방탕이다. 아무 생각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을 한다고 할 때는, 지혜를 깨달은 것 같이, 소원을 가지게 된 것 같이, 어떤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 같이, 그가 가치와 목적에서 정당한 실력을 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가 말이다. 그의 자발성, 그의 실력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계가 되어 하나님 손에 이끌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가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결정에 응답하시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거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오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로 도전받고 있다.

★우리 쉽게 이 코로나가 끝나 달라, 일상으로 돌아가자, 건강과 복을 주십시오, 라는 기도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건너 뛰어 버린, 무책임한, 허망한, 예수와 십자가를 모독하는, 기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존재하는 곳, 내가 살아내야 할 하루하루가 나와 내가 속한 이웃, 사회 앞에 금 같은 일이 일어나는 기적의 기회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된다. 내가 증인이다. 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내 인생에 담아내야 하는 것이 나의 영광이다, 내 소원이다, 내 책임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시작으로 돌아가서, 영웅주의 사관, 영웅이 되려는, 영웅을 숭배함으로써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자리는 내가 살아내야 된다,라는 각각의 자리에 서야하는 거다
성경이 그토록 많이 말하는 '소자' 하나, 이름 없는 한 사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어떻게 큰 일들을 만들어냈는가,를 기억하는 우리의 오늘 하루 어야 한다.

(기도)
우리는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너희는 무슨 배짱으로 사냐? 무슨 근거로 사냐? 무슨 소원을 가지고 있느냐?
내일은 뭘 할 거라고 기대를 하느냐?'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우리 저 앞에 십자가를 갖다 붙여놓고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음대로 생각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주의 도전 앞에서 핑계댈 것이 없다.
이 도전은 깨우시는 것이요, 돌이키게 하는 것이요, 우리로 기쁨과 자랑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인 줄 깨달아, 우리로, 우리 교회로 그리고 이 나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귀한 책임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