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고난이 하는 일_박영선 著_2021.11. 刊_3장. 답이 없는 시대]​

nazunzaro 2021. 12. 25. 20:31

● 그 일은 악한 자들에게 심판으로 올 뿐 아니라 의인들에게도 오는데, 의인들에게는 이 어려움 곧 고난이 일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희는 멋있게 살라'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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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하는 일_3장. 답이 없는 시대]

욥은 까닭 모를 고난을 겪고 있다. 사탄의 시험으로 그는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는다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한다.이에 욥은 아내에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10절)라고 대꾸하며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욥인 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비참한 지경이었다. 밤낮 이레 동안 욥과 함께 있었다. 친구들 중 아무도 욥에게 일어난 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욥기 중.후반부에 가면 친구들이 욥의 속을 긁는다. 이에 욥은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최소한 내 친구들이 아니냐?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한테 와서 내게 잘못이 있다고 속을 박박 긁기나 하고, 너희들이 내 친구가 맞냐?'라고 성을 내기도 한다.
​또한 친구들은 욥에게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고난이 있냐?'라고 묻기도 한다. 욥은 '그게 내가 궁금한 부분이다'라고 대꾸한다.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욥기 3장에서 친구들은 욥을 보고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지난한 시간 동안에 욥이 하나님께 원망을 하지 못해서 나온 대안이 '자살'이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1-10) 하며 자살을 수사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상황은 예레미야에게서도 반복적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심으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렘 20;7)라고 한다.
본문을 직역하면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절 속이셔서 제가 속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저보다 고집이 세시고 저보다 힘이 세셔서 하는 수 없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너무 절절해서 그동안 풀지 못한 응어리에 대한 서광이 비친다. 예레미야 20장 7절 이하에 나온다.

우리도 다 겪는 고생이다. 예레미야는 욥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다 해 주신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요?'라고 묻고 있다.

★고난이 일을 한다. 고난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았다. 하나님이 '이 방법밖에 없다. 이렇게 하는 게 너희에게 복이다'라고 하신다.
★우리는 고난의 효과가 얼른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힘든다.

히브리서 5장 7절 이하를 보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7-9)

★우리가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곧 '십자가'도 어떤 지극한 정성으로 묻히고 만다. 십자가는 지극 정성보다 훨씬 큰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셔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는가? 이 일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내가 그때 공부를 더 잘할걸' '그때 그 시험에 꼭 붙었어야 했는데' '그때 이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쉽게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내 실력이 모자랐던 것에 대해 후회나 자책을 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 실력으론 이길 수 없었던 것들이 남아서 우리의 힘이 된다.
자신이 잘한 것은 기억에 남지 않고 잘못한 것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잘한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못한 것을 씻어버리려고 하지 말라. 그 잘못한 것 때문에 네가 어디로 더 나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더 밀어내시는지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이에 걸맞은 선지자가 하박국이다. 하박국은 유다 왕국 말기에 그 사회 전체가 최소한의 신앙심도 없고
행악자들이 너무 많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했다. 이렇게 많은 악행과 악인으로 말미암아 의인들이 고통을 받는데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신지를 묻는다.(합 1:5-10)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내가 왜 가만히 있겠느냐.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너희 나라를 다 심판하겠다. 너희를 싹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하박국이 다시 하나님께 항변한다. '아니 하나님, 어떻게 악당들을 심판하는데 의인들까지 죽이려고 하십니까?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이때 하나님이 '의인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말씀하신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 일은 악한 자들에게 심판으로 올 뿐 아니라, 의인들에게도 오는데, 의인들에게는 이 어려움 곧 고난이 일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희는 멋있게 살라'고 하신 것이다.

교회가 모든 문제를 이렇게 맞고 틀리고, 상과 벌을 받는 것을 구별하여 잘못했으면 해결하라고 쉬운 답을 내는 바람에 더 나아갈 수 없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게 무슨 어떤 어느 사건이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냥 21세기 전 인류를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도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다르게 대주시지 않는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벌하시는 걸로 신자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지금 하나님은 전체를 향하여 역사와 온 인류를 향하여,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인생을 더 깊이 생각하라,
너희가 지금 만족하는 것은 너희에게 답이 되지 않는다' 라고 도전하신다.

우리는 알게 되었다. 강대국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전염병이 돌고 전 세계에 팬데믹이 선포되자 군사력, 경제력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우리가 알던 어떤 선망의 대상들과 내용들이 다 무너졌다.
지금 방역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나라는 우리나라이다. 가진 게 없는데 무엇이 최고인가? 코로나19 유행 초기에는 우리나라에 오면 산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오면 코로나19 감염자도 금방 파악되고 코로나 19 확진자가 되면 국가에서 다 치료해준다. 어느 나라에서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했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가 '좋다' '잘났'다라고 할 것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라고 드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단순한 신앙으로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

욥기 서두를 보면, 욥은 결벽증에 사로잡힌 것 같다.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고, 혹시라도 모르는 죄를 지었을까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가족 모두를 위해 제사를 지내서 충분한 보험을 들어놓는다(욥 1:4-5).
욥은 자기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나오는 싸움의 내용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 거의 전부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욥에게 친구들을 위해 중보자가 되라고 하셔서 그 뜻을 따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다시 말해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단어를 끌어들여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을 다 같이 겪어야 하고 인류라는 공통된 어떤 가족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때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힘을 줄 수 있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그들을 정죄하고 우리는 무슨 면죄부를 받은 듯이 여기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교회가, 이 나라가, 이 민족이 지금 현실과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정죄할 방법을 찾지 말고, 서로 동정하고 섬기고 함께 가는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또 그렇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겸손과 눈물어린 기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으로서 자신을 생각하고 교회를 인도하기 바란다
지금은 악인들이 심판받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목적과 내용에 다가가는 자로 일어나야 할 때이다.

야곱의 말년은 시시하다. 얍복 나루 사건 이후의 야곱의 이야기는 쓸 만한 게 거의 없다. 디나 사건이 있고 요셉이 행방불명될 뿐이다. 그러나 총리가 된 요셉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온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할 때, 인생의 최고 정점을 찍는다. 바로가 기가 막혀서 야곱에게, 피난민 주제 왕에게 축복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때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고 답하며 바로를 축복한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에서는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축복을 받느니라'(히 7:7)라고 전한다.
이 부분은 개역개정파보다 개역한글판이 더 의미가 잘 다가온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히 7: 7 개혁한글)

기독교 신앙을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단순 공식이나 논리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의 한계를 깨우치실 때마다 우리는 자책하고 어떤 결벽 같은 것으로, 원래 자리로 쉽게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일을 하여 인간성과 인생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갖도록 한다.

★그러므로 짐을 지고, 인내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결론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발전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