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고난이 하는 일_위드 코로나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_박영선 著_2021.11. 刊_1. 왜 고난이 있는가?]

nazunzaro 2021. 12. 25. 01:00


●우리는 잘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만 된다. 지금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개혁만이 아닌 고난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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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하는 일_1. 왜 고난이 있는가?]

오늘날 세계는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고 이 세대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에 처했다.
이 팬데믹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난이 어디에서 왜 왔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은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때이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이분법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잘하면 복받고, 잘못하면 벌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신앙관이 우리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대면하든 '잘못했으니까 벌받는 거야. 회개해'라는 말이 으레 나온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같은 우리의 신앙관과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
특히 '고난'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는 구약 성경의 예레미아서는 우리의 이해나 기대와 사뭇 다르게 펼쳐진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예레미아는 왜 그렇게 울었을까? 그 이유가 예레미아서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아주 놀랍고 커다란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는 사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된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이해하거나 적용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사건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망했다. 그러나 다윗 왕조를 유일한 왕권으로 인정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북 왕국은 정통 왕권이 아니다. 북 왕권은 왕조가 계속 바뀌지만 남 왕국 유다는 다윗 왕조의 명맥을 이어간다.
주전 609년에 요시야왕이 죽고 주전 586년에 남 왕국 유다가 망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다. 므낫세의 폭정이나 잘못이 유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면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으로 남 왕국 유다는 큰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고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면 삼, 사대까지 죄를 갚는다고 하셨다(출 20:5, 34:7, 신 5:9).
그러나 남 왕국 유다는 종교개혁을 한 요시아 왕 이후 23년 만에 망했다.

예레미아는 이렇게 요시아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셋과 손자 하나가 죽는 남 왕국 유다의
비극적인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백성들은 반문하며 예레미야의 예언을 거부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하는
무시와 고초를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할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껴서 조롱거리가 되고 있음을 한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시는 이유가 백성을 회개시키는 것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려는 것이지,
잘잘못을 일일이 따져 잘하면 복을 주고 못하면 벌을 주려고 선지자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예레미야는 은혜를 입었으니 잘 해야 한다는 은혜 우위론과 잘못하면 언제든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정의론 사이에서
그 둘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예레미아는 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예레미야가 감성이 풍부해서 울었다고 이해하지 말라.
하나님과 인간의 고집이 충돌할 때는 도대체 어떤 해법이 있는가?
'나는 해법이 없다'라는 것이 예레미야의 답변이다.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회개해야 할 때에 남왕국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빌론 포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라는 것이 포로된 자들에게는 사뭇 이상해 보인다.
포로가 된 후손들이 볼 때,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여전히 자신들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율법이 자신들에게 생생하게 전수되고 있으며 자신들은 그 약속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데,
현실은 계속 포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들을 힘들게 한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기 전에 선지자가 경고한 메시지에 회개를 했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셨어야 맞는가?'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내버리는 것이 맞는가?'
'다윗의 왕권도 끊어지고 성전도 훼파되었는데, 여전히 백성들은 살려놓으시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그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이 포로 이후 후손들이 겪는 고민이요 문제였다.

모세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그런데 그 출생의 비밀로 인한 갈등은 모세가 몇 살 때 일어났나?
자기가 히브리인이고 물에서 건져 올린 자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느냐'의 갈등은 40세에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답을 주시지 않았다. 그는 너무 혼란스러워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다.
매일매일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나를 살려 놓았는가?'
'그분은 왜 아무런 답변이 없으실까?'
매일 반복되는 고민이었고 답은 없지만 질문을 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포로 생활을 하도록 하실 거라면 성전이 무너지고 다윗의 왕건이 끊어질 때
우리 민족을 완전히 없애시지 왜 우리 민족을 이렇게 존속시키고 계시는가?'
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기대와 논리를 넘어선다. 역사에는 '글쎄 그런 일이 있었어.'가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없었으면 좋았을 일이 일어나는 것이 역사이다
어떤 난해함이나 돌발성에 대해 놀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살면서 저지르는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런 역사를 계속 이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와서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우리를 포기하실 것이 아니라면 그 일에 그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라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내버릴 정도의 행동을 취하신 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가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때 그들의 형편에 따라, 수준에 따라 행하신 것이고 실력만큼 커나가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매를 때리고 심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사랑과 승리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벌을 받는 징계나 고난은 그 약속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왜 고난이 있는가? 우리가 잘못해서 고난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을 회개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다. 회개하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면 되잖아?'는 정답이 아니다.
'회개를 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들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앞서 언급했던 이분법으로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잘못했다고 하면 되잖아'라고
쉽게 얘기하는 것은 요시야이다.
말하자면 요시아는 선한 왕이고 종교개혁을 이루었으나, 하나님은 요시아의 개혁으로 끝내지 않으셨다.
그보다 더 들어가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만 된다.
그래야 그분이 목적하시는 내용을 다 담을 수 있다고 해석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개혁만이 아닌 고난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