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미안해, 잘해 볼게!_박영선에게 묻다 (2021.11.刊)]​

nazunzaro 2021. 12. 23. 00:36

● 인생이 형통하기만 하면 잘못된 것이다. 형통하면 누가 하나님을 찾으며, 행복하면 누가 고민을 하겠는가? 사랑해라, 희생해라, 네가 져라, 섬겨라, 라고 말한다. 그것이 영생이고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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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잘해 볼게!_박영선에게 묻다 (2021.11.刊)]

1.
우리 마음속에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이분법'이 있다.
우리는 우선 이 이분법에 따른 판정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의 구별을 다 통과하여 도달하게 되는 진전된 이해와 실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에게는 '왜 현실이 고단한가?' 하는 물음이 있다.
우리의 신앙은 진정한 것이고 우리는 선한 소원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일까?

신앙을 인과 응보로 설명하려는 것은 너무 일차적이다.
은혜와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복음은 크고 깊은 것이어서 이 내용은 언제나 감사와 찬양으로 표현된다.
감사와 찬양은 고난을 면제해 주실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실패와 후회를 무대 삼아 펼쳐지는 작품이 있음을 깨달을 때 감사와 찬양으로 노래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요 기쁨이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실하심에 더 크게 기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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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신앙 여정을 기독교에서 출발하게 하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출발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말이 신자들에게는 느닷없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가 비신자들과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일에 다소나마 공통점이나 접촉점을 갖게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삶에서 겪는 여러 문제를 기독교 신앙 안에서 끌어안으며 답을 궁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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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그 모든 종교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은 왜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을까?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 의미를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막연히 '행복하게 살자, 성공하자'라고 다짐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우선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삶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당장 이 논의를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 하나가 우리 앞에 등장한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누구나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고 싶어 함과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데도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차원도 있지만, 조금 더 넉넉히 이해하면, 소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영혼의 그리움이나 갈증 같은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만족을 종교가 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기대를 한껏 가져도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복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니까 말이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너무 크다 보니,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반감마저 품게 된다는 데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가 신본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본주의는 중세 시대에 기독교와 권력을 폭력으로 행사하며 강요했던 종교 행위에 저항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밤낮 공포에 떨면서 신을 섬기는 생활은 못하겠다. 인간은 그보다 가치 있는 존재다' 라며 돌아보게 된 것이 휴머니즘이고 계몽주의이다.
이로 인해 인간의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기대와 소망이 생겼는데, 문제는 신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데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20세기에 와서 깨지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되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가능성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무시무시한 현실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죽음은 단지 소멸이 아니다. 우리 삶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호화롭고 성공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사람도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살이 일어난다 현실 속에는 늘 자폭이나 분노 같은 것이 있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되면 괜히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분노가 아니다.
인생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더 나아지게 만들 수도 없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분노이다.

그런 분노와 자폭은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정말 신이 있는가?
신이 있다면 세상은 왜 이렇게 부조리한가?​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대다수의 동물들이 부모를 찾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울음소리를 내거나 비명을 지르듯이 분노에 찬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며 요구라고 생각한다.

과거 서구에는 인간이 처한 이런 곤경을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던 이들이 상당히 있었다.
그 시대는 이성, 합리성, 낭만주의 같은 것들로 대표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런 모든 기획이 실패한다. 결국 포스트 모든 시대까지 왔다.
전에는 이것이 답이라고 했다가 좀 지나서는 저것이 답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진정한 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모든 것이 허망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내세우는 최고의 조언은' 뭐가 됐든 각자 알아서 선택하고 책임져라'가 되어 버렸다.

군대에 징집되어 모든 훈련을 열심히 다 받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휘관이 와서 '군대 해산! 각자 집으로!'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물론 집으로 가면 되지만 집에 갔더니 집에서 또 '해산!' 그런 꼴이 됐다.

역사가 인류의 시행착오를 증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착취당하던 노동자가 혁명을 이루어 권력을 쥐게 되면, 그 권력은 또 다른 노동자를 못 살게 군다.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가 뒤바뀔 뿐 착취는 내내 이어진다.
이 문제는 정치나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종교가 들어와야 하는데, 역사가 증언하듯,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어떤 답이 있는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굉장히 긴 답을 해야만 한다
이런 대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천천히 더듬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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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금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오늘 우리가 내 뱉듯 '이게 뭐야?' 하고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해?'에 대한 답이 즉각 나온다면, 지금 상황은 지금 상황은 도전도 아니고, 질문이나 반성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과 실력으로는 답을 내지 못해 모두 당황하고 있는 이 시간을 반드시 겪어내야 한다.

서구 교회가 부흥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를 살펴보면,
잘 먹고 잘 살게 되어 봤자 아무 쓸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성실하게 살면서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게 복이고 기쁜 일이다, 라는 것이 알맞은 답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고 난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는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서 요셉은 풀려날 때까지 눈앞이 캄캄한 채 지내야 했다.

넓게 보면 모든 종교는 인류가 겪는 보편적 고난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위로를 건네고 있다.
기독교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결이 현실에서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훌륭해지거나 보상을 받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종교나 교파를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신자들이 있다.
사람들은 어쨌든 종교인이면 보다 나은 사람이기를 바라는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험한 말을 더 많이 하고 사납게 구는 경우가 많다. 그게 참 불편하다.
고귀한 가치를 말하는 종교인들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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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역설'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큰 기적은 이 역설인데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호의로 받아들일 결과만 기적이라고 하고, ​말이 안 되는 역설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편견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인데, 십자가에서 죽어버렸다는 역설에서 세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턱 막혀버린다.
◆​세상이 가진 기대를 깨고 넘어오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기독교의 궁극적 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수하여 불가능한 영역을 뚫고 넘어오시기까지 사랑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하면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내가 사랑한 만큼 상대도 나를 사랑해 주길 원한다.

나는 교회를 사랑하는데 교회는 왜 그렇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다양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목사로 세우신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 중에서 뽑기도 하시고 학벌이 낮은 사람 중에서 뽑기도 하신다. 눈치가 있는 사람을 세우기도 하시고 눈치가 없는 사람을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담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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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내포하는 내용과 약속을 다른 종교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나마 가장 낫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만이 법을 넘어선다.
​법은 매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강제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훨씬 긍정적으로 사랑해라, 희생해라, 네가 져라, 섬겨라, 라고 말한다.
■그것이 영생이고 영광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일을 하나님이 예수 곧 당신의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셔서 본을 보이심으로 실현하셨다.
오직 예수에게서 법을 넘어서는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난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를 섬기는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류 대학이고 너희는 삼류 대학에 불과하다, 이렇게 다른 종교나 사상을 깎아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이런 주장의 확실성을 다른 종교나 종파를 비난하는 것으로 확보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운명과 정체성과 명예에 관하여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
우리가 그것을 겸손히 증언하고 지켜내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의 필요, 우리의 소원, 우리의 각오보다 큰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속에 중요한 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생애를 통해 영광 받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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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경이 말하는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이며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지경은 어디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 중 하나는 성경을 하나의 규범으로 삼아서 신앙생활을 안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 확보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번씩 감격하고 만족하는 일이 끝이 아니라, ◆​다음으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사실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면 끝이 아니라 다음 학교로 진학하듯이 말이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만족할 만한 요구와 순종 또 그에 대한 보상이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는 풀 수 없는 그다음 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여태껏 가졌던 자랑과 자신감이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고 새로운 자리로 다시 나아가게 된다.
이전의 것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이제 내가 컸으니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거다.

초등학생과 중학생과 대학생이 하는 게임이 다르다. 중학교 1학년과 2학년이 하는 게임이 또 다르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내가 자라감에 따라 성경에 보이는 것들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이 율법이다. 처음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안심하는 일이 최고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를 단련하고 우리의 기초를 단단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율법은 최저선이다. 거기서 은혜, 믿음, 사랑, 이렇게 훨씬 적극적인 데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들은 율법처럼 분명하지 않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작은 것도 은혜고, 큰 것도 은혜여서 단계를 정할 수가 없다.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모호함'이다.
매우 모호하다. 그러니 '열려 있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내용은 한계가 없어서 이걸 설명하려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고, 그 지점까지 끌어안는 반전이 얼마나 큰지를 묘사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만 감격해도 되니까 너무 깊이는 내려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성경은 그 부분에 대한 강조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홍수로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고 노아의 식구만 남겼는데, 그의 후손도 결국 실패하여 바벨탑을 세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시 흩어버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마치 앞의 이야기들을 다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편한 대로 해석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여기에 연속성이 있다고 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읽히지 않다가 어떤 사건으로 무너져 봐야 잘한 것과 잘못한 것들, 복 받은 것과 고생한 것들이 서로 대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혹은 더 큰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성경의 수사법을 배우게 되고,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성경을 그렇게 볼 수 있으려면 꽤 읽어봐야 한다. 꽤 살아봐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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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대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받은 기합이 '선착순 집합'이다.
선착순 때문에 숨이 차도록 달린 것을 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체력 훈련이었다.
선착순 몇명 안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심장을 튼튼하게 하고 체력을 키우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원래 자기가 가진 능력보다 더 좋은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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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일이 간절하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많은 떨림과 낙심 실패와 공포 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믿음이나 은혜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착각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담대하다는 것은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것이다.
담대함이란 공포를 끌어안는 것이다. 공포로부터 도망가는 게 아니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부족하거나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계속해서 할 일을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위대한 것이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금 살아있을 때 누려야 하고 책임져야 할 각자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33년의 생애를 지내셨다.
그 생애가 절대 헛되지 않다. 참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비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와 평범한 인생 속에 한 실존이 되신 것 같이,
◆​각각의 억울하고 답답하고 말이 안 되는 조건들이 바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특별한 자리이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인류 전체를 동원해서 크고 위대한 드라마로 만들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이 하는 이야기이다.
이 시간을 통해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며 멋진 신앙인으로서 위대한 인생을 살아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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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오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라고 말한다.
그들이 자녀이다. 그들을 키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바울을 동역자로 불렀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최고 경지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데 동참하는 것이다.

장차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실 것이다.
그 종말의 날까지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한다.
그것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너희가 가서 저들을 불러내라. 내가 와서 너희를 부른 것처럼 너희도 가서 불러내라.'
예수님이 다 이루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작해 놓고 가시면 제자들이 이어받아서 하는 것이다.
2천년 동안 교회가 해온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받는 고난이 우리를 더 위대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를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부르신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태도와 반응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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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현대 사회는 물신주의가 팽팽해졌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있다.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현실이지만 그런 특권은 극소수만 누리기에 보통 사람들이 갖는 상대적 박탈감도 점점 커지는 것 같다.

부와 건강을 소망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돈 없이 살 수 없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일에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말은 경제적 바탕이 없으면 살기 어렵다는 뜻이지, 돈이 우상이 돼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돈에 빠져 더 깊고 가치 있는 인생의 질문을 하지 않을 때 돈이 우상이 되고 맘몬이 신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 지경은 아니더라도 돈을 최고의 가치이자 사상으로 삼는 일은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다.
하나님을 모르면 짧은 인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대의나 희생 같은 가치를 가치를 받아들이겠는가?

치열한 경쟁에서 내가 낙오했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물신주의를 비판하며 위안을 받으려고 하는 건 조심해야 할 태도 중 하나이다.
오히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돈보다 더 큰 가치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과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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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치 기준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거나 표현할 때 세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가져와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온 단어의 정의도 세속적이다.

대표적으로 '믿음'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다.
원인에 따른 결과라는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법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성경에서 법과 대비되어 쓰이는 단어는 은혜인데, 은혜에는 책임이라는 뜻이 없다.
그런데 믿음에는 책임이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들어 있다.

◆나는 믿음이란 '은혜에서 시작하여 책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책임이 조건이 아니라 결과, 열매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셔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길은 결국 내가 걸어서 도달해야 하는 신앙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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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하나님의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경우가 다양할수록 유익이다.
그러니까 일찍 끝내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게 여러 개 있다.
그런 추리 영화를 볼 때 다들 누가 진범인가에 꽂혀 있는데,
영화를 다시 보면 살인을 왜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감춰 있던 살인 동기가 밝혀져야 한다.
우리는 살인범을 찾느라 나머지를 놓치고 만다
누가 원한을 갖게 되며,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가 없으면 진범을 가려내는 일은 의미가 없다.
범죄를 저지르게 된 동기, 즉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관계에서 발생한 원한이 드러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과정을 지나게 하신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우여곡절이 있게 하시는데, 그때마다 반전과 놀랍고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기대하지 않았던 열매들이 맺힌다.
이런 과정을 모르고, 쉬운 결론으로 빨리 끝내자고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

어른이 되지 않고, 진지한 열정으로만 뭉쳐서 자기가 아는 것 하나만 붙잡고 끝까지 우기는 일은 삼가야 한다.
특히 자신과 처지가 다르고 견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내 인생이 있듯이 상대방의 인생이 있다.
​피해자가 있듯이 가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보상을 받으면 끝이 아니다.
◆가해자는 왜 가해자가 됐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공감하는 일이 우리 인생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피해자의 처지에 있을 땐 피해자일 수밖에 없고, 가해자의 입장일 땐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둘을 다 공감하고 포용하려면 우선 나이가 들어야 한다.
지식이나 논리를 빨리 익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에서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가지려면 오래 살아야 한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 돈도 벌어야 하고..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끝까지 봐야 한다.

노방전도를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게 다라면 곤란하다.
순교적 열심을 보이는 것 역시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만이 신앙에서 최고의 내용과 방법이라면 곤란하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최고의 내용이다.
죽음만도 못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열매를 맺으시는지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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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단이 통상적인 사회 도덕이나 윤리 질서를 벗어나 있을 때는 강제력을 동원해야 한다.
다만 그들 나름대로 갖는 종교적 신념이 우리와 달라서 긴장관계를 일으키는 경우라면 괜찮다.
이단이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이단이란 신앙의 균형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 건강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도 우리 마음은 왔다 갔다 한다.
그럴 때 참된 신앙을 가진 이들이 넉넉함을 보여야 한다.

너무 강하게 반대하면 상처가 더 커진다. 특히 가족 간의 상처가 커지면
돌아올 명분을 잃게 되고 돌아올 기회는 더욱 축소된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단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지속되지도 않는다. 이단은 역사성이 없다.
신앙의 다양한 면모 중 어느 특정한 사항 하나에 꽂혀서 열심을 내는 경우가 허다한데,
시간이 지나면 상식과 교양에서 큰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에는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 돌아올 수 있게 문을 좀 열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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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 모두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인생이 형통하기만 하면 잘못된 것이다.
형통하면 누가 하나님을 찾으며 행복하면 누가 고민을 하겠는가?

우리가 원통한 것은 우리가 가진 영혼의 갈증을 세상에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고통과 비명에 하나님이 답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답을 만들어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 앞에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커다란 기적으로 서야 한다.

고난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와 교회와, 오늘도 진리와 생명과 기적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갈급한 심령으로 함께 모인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그 날까지 견딜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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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안해, 잘해 볼게!_박영선에게 묻다 (2021.11.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