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가 나온다. 이 갈등이 옛날에는 죽음과 삶이었는데, 지금은 영광과 기회의 이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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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결정을 내버리지는 말자. 더 기회를 주자.' 하는 답을 내신다. 놀라운 답이다. 엘리야는 여기서 결판을 내고 싶고, 하나님은 그러고 싶지 않다.
- 대단하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명. 그 무지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한 번 더 기다리기로 하는 것이다.
- 엘리야를 아낌은 보상이 아니라 그의 약점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시는 보호, 사랑,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깊은 애정을 우리로 보게 한다.
- 이스라엘을 깨우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떤 지식으로나 어떤 노력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구약에서는 내내 심판의 기준, 잣대가 율법이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이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것이 은혜로 바뀐다. 은혜로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가 등장을 해야 된다
- 하나님이 세상 역사에서 하시는 일은 사망이 왕노릇하던 역사를 생명이 왕노릇하는 역사로 바꿔놓았다.
- 갈등이 해소되어 있지 않은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가 나온다. 이 갈등이아니라, 이 갈등이 옛날에는 죽음과 삶이었는데, 지금은 영광과 기회의 이 자리인 것이다. 거기에는 사망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잘못하면 지옥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더 잘하는 데로, 이제 신자들에게 기독교라는 것은 이렇게 바뀌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신자라는 것이 권력을 갖지 않는 외적인 불만, 그리고 또 하나의 불만이 있다. 내적으로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자책, 이 두 가지가 다 이 사망의 잣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 갈등이 해소되어 있지 않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가 나온다. 이 갈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이 갈등이 옛날에는 죽음과 삶이었는데, 지금은 영광과 기회의 이 자리인 것이다.
- 여기의 승리는 자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성이다. 이 명예를 누리라고 한다. 이 잘난 척을 해보라고 한다.
- 우리 못나게 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우리의 현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자의 영광들은 너무나 풍성하다. 그 일들에 우리의 현실이, 신앙생활이 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 우리의 삶이 은혜 위에 있고 승리와 영광의 기회라는 것을 알게 하셨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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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 다시보는 열왕기(11) / 열왕기상 19:8-18 / 2021.12.12]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구약을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대표 인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하나님의 종, 그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아를 대표로 내세울 수 있다.
엘리아에 대한 우리의 그 이해는 매우 도덕적이고 매우 경직된 지도자로 각인되어 있다. 갈멜산에서의 승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맞상대를 한 주인공,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신 종, 이런 식으로 이제 이해가 되는데, 엘리아는 그 사건 이후에 이방 우상 선지자들 850인을 죽인 그 큰 사건이 자기가 기대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데 대하여 몹시 불만을 토로하고 하나님 앞에 그 토라진 모습을 보이고, 그리고 그 엘리아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응이 좀 강조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엘리아는 등장부터 상당히 돌연한 출현이 된다. 디셉 사람 엘리아가 등장하자마자 하나님께 어떤 명령을 받고 소명을 받는 게 아니라 아합에게 도전을 한다.
'내 말이 없으면 이 우로가 다시 오지 않을 거다.' 해서 3년 간의 가뭄을 선언하고 갈멜산에서도 그 대결을 엘리아가 주도권을 쥐고 아합과 또 그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어찌 보면 대단히 무모해 보이는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모세 때에는 '지팡이를 내밀어 뱀이 되게 하라. 나일강을 피로 물들여라. 홍해를 갈라라.'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식으로 엘리아가 멋대로 규칙을 정한 식으로 대결이 일어나고 엘리아는 다 응답을 받는다.
'여호와로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응답해 주십시오.' 해서 답을 받고 또 갈멜산에 올라가서 일곱 번이나 기도해서 구름이 오게 하고 드디어 비가 내리게 하는 일들은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한 것보다 엘리아가 강청을 해서 하나님이 종속적으로 이 일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담대한 엘리아의 사역이 본인이 저지른 일에 응답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목적,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아합 왕권의 몰락을 가져오지 않은 현실에 대하여 엘리아는 불만을 가지고 도망을 하게 된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도 도망을 하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 때문에도 자기의 사역을 다 팽개치고 광야길로 들어왔고 그리고 호렙산까지 이른다. 그때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물론 '엘리아야 너 왜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시지만 그 광야에서는 뜻밖에 천사를 보내서 그를 먹이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힘을 내서 가라.'라고 그의 토라진, 삐진 현상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가 호렙산에 이르자 하나님이 그에게 묻는다. '엘리아야, 너 왜 여기 있느냐?'
그 엘리야가 답하는 답을 보면 '하나님이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런 식의 빈정거림이 묻어난다.
'아합이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죽이고 나 하나 남았는데, 나도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수가 있습니까? 도망오는 수밖에요?'
그렇게 답을 한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 산에 굴 앞에 나와 서라.' 그리고 하나님이 등장하실 때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엘리아야, 너 왜 여기 있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안 하셔서 내가 여기 있는 거 아닙니까?' 답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강한 바람도 보이시고 지진도 보이시고 불도 보이시지만 거기는 안 계시고 세미한 음성 속에 등장하셔서 아람왕 베나닷을 폐하고 후임을 하사율을 왕 세워라. 북왕조 이스라엘의 아합을 제거하고 예후를 왕으로 세워라.그리고 네 후사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워라.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 일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엘리아의 그 불만에 대한 답이다.
엘리야의 불만, '왜 하나님께서 나의 진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 갈멜산 전투에서 보이시고도 결과를 운명을 다 바꾸지 않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얘야, 역사를 더 연장하자. 여기서 끝내지 말자.' 하는 답이 된다.
하나님이 이 엘리아에게 역사를 여기서 끝내지 말자는 것은, 이렇게 불을 내려 하나님이 누구신 것과 그의 종이 하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인지를 보이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백성들의 회개하지 않음과 그 왕권에 회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
★'지금 결정을 내버리지는 말자. 더 기회를 주자.' 하는 답을 내신다. 놀라운 답이다.
이 답에 대하여 엘리아는 그 후에도 불만이다. 그래서 그는 물러나서 잠시 무대에서 떠나고 아합과 베나닷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 이름없는 선지자들이고, 엘리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아들 아하시아 때 그가 죽게 되어 엘리아에게 물으러 왔을 때, 그의 도움을 청했을 때는
엘리야가 안 내려오고 찾아오는 오십부장과 오십인의 병사들을 다 불태워 죽인다. 하늘에 구하여 하늘에서부터 불벼락이 내려서 죽어버리고 두 번째도 똑같이 그렇게 되고 세 번째는 오는 그 오십부장이 빈다. '제발 전과 같이 나를 죽이지 마시고 우린 심부름을 온 졸병에 불과하니 용서하시고 저랑 따라 가십시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고 가라.' 그래서야 나선다.
게다가 후사인 엘리사를 만났을 때도 그는 하나도 친절하게 굴지 않는다. 겉옷을 벗어서 집어던지고 엘리사가 아무리 친근하게 굴고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다.
그래서 이 사건에서 엘리아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습은 굉장히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선지자의 그때 의식과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서 반응하는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에 진지한 내용이 흘러나오는데, 엘리아의 얘기에서는 이런 얘기를 그 우리 모두 기대하지 않는다. 엘리아는 말하자면 단순 무식한 선지자이다. 순진하고 진지하고 진지하고 무식하다. 뒤에 무식은 붙이고 싶지 않다. 엘리아의 명성에 누가 되니까.
★그는 여기서 결판을 내고 싶고 하나님은 그러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여기서 엘리야에게 엘리야가 한 일을 꾸짖지 않고 칭찬하시지만, 엘리아가 원하는 조급함과 지금에 결판을 내자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폭풍 속에도, 지진 속에에도, 또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다. 엘리아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는 사건을 요구했고 그를 부르러 온 아하시아 왕의 그 부하들을 불로 징계하여 말하자면 폭력적 결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는데 하나님은 이 엘리아를 꾸짓지 않는다.
엘리아를 통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꾼다. 엘리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엘리아의 주장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한 번에 그 변심, 변환을 가진다. 그는 역사를 이어가기로 결심을 한다.
하나님도 갈멜 산에서 끝장을 내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증명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엘리아가 '왜 그걸 끝장을 내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그러지 말자. 역사를 이어가자'고 얘기하시는데 그것이 엘리아의 사역의 가장 위대한 내용이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엘리아는 순진한 사람이고 조급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증거와 자신의 사역이 정당한 것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었지만 ★그는 불쌍히 여길 마음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서에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면서 니느웨에 그 성을 멸망하겠다고 가서 외치게 했다. 니느웨성이 회개를 한다. 앗수르의 수도이다. 장차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주적이 될 큰 제국이 될 나라이다.
마땅히 멸망시켜야 되는 나라인데 그 왕과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멸망을 철회하신다. 요나가 화가 나서 동산에 앉아서 언제 망하나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뙤약볕 아래서 기다리는 것이 고역이 되자
하나님이 옆에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그늘을 지어준다. 그래서 시원해졌는데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어 박넝쿨이 시들자 다시 뜨거워지자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난 죽고 싶습니다.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너 왜 그러냐?' '박넝쿨 하나 허락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난 못 믿겠습니다.' '야, 니가 박넝쿨 하나로 목숨을 건다면 이 백성 니느웨 성에는 좌우를 분변 못하는 이가 12만 명이나 있다. 내가 그들을 아끼는 게 당연하지 않냐?'
★대단하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 명. 그 무지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한 번 더 기다리기로 하는 것이다.
그 무지함은 엘리아에게서 본 거다. 엘리아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하고 있다. 그들이 무지하다.
그들이 불순종하고 있고 그들이 벌 받아야 마땅한데, 그들에 대하여 무지한, 정의를 실현한다고 무지한 심판을 내리자고 하는 데서 하나님의 마음이 뜨끔해졌을 수도 있고 이렇게 아우성치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대해서 하나님이 감격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엘리야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듣는 위대한 얘기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우리 마음속에 자신감으로 가져야 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그 순진함이 가지는 약점들에 대해서는 상처를 주지 않고 뭐라고 꾸짖지도 않고 그래서 마지막에도 하나님이 직접 품에 안고 데려가신다.
★그의 상처는 영광스럽기보다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아끼셨나를 보이는 것으로 그의 아낌은 보상이 아니라 그의 약점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시는 보호, 사랑,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깊은 애정을 우리로 보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엘리아를 통해서 이 역사 속에서 어떤 분인가를 드러낸 일이다.
그럼 도대체 역사를 연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길래 하나님은 그런 결정을 하셨고, 이렇게 하사에를, 예후를, 엘리사를 세우는 이 뒤 역사를 연장하자고 하시는가?
하나님은 이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을 깨우치고 싶어 한다.
★그들을 깨우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떤 지식으로나 어떤 노력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기어코 완성하기로 이때 그 마음을 중요하게 바꾸셨다.
그래서 이 바꿨다는 게 어떤 구체적인 이해로 우리를 인도하느냐 하면, ★그들을 깨우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떤 지식으로나 어떤 노력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구약에서의 지금 상황, 구약에서는 내내 심판의 기준이 잣대가 율법이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이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것이 은혜로 바뀐다. 은혜로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가 등장을 해야 된다.
예수가 등장을 하여 은혜의 시대를 열었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고린도전서 15장 말미에 나오는 부활장이다.
부활장의 결론같이 사망을 조롱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승리이다.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는 사망이 운명이 아니라, 생명이 운명이 되는 데로 예수로 인하여 세상이 바뀐다.
인류의 운명이 바뀐다.
이렇게 사망을 조롱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곳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렇다. 율법을 잣대로 쓸 때는 율법을 어기면 죽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로라"
여기 전부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로 인하여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예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우리의 인생,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니까 ★'헛되지 않다. 이김을 주신다.' 이런 말들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질 수밖에 없다》 하는 전제를 달고 있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 우리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헛되지 않은 삶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이 갈멜산에서는 사망이 끝장인 현장이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자,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불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리였는데
이제 역사를 더 끌어 예수를 보내고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그리고 성령의 오심으로 인한 이제 법이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은혜가 심판의 잣대가 되는, 은혜가 잣대가 되면 우리의 잘못과 우리의 미흡함이 예수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한다라는 데로 세상이 옮겨왔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로마서 5장 식으로 얘기하면, '예수는 누구냐?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죄인 된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다 은혜 아래에 있게 되었다.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게 대조이다.
아담의 실패가 법의 잣대가 자기 잘못을 나누어 심판하는 것 같이, 이제 예수의 순종이 자기 잘못을 넘어서는 은혜 아래 잣대를 가지게 됐다.
은혜 아래 잣대를 가지게 됐다는 건 이것이다. 우리가 씨를 심어 결실을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한다. 거기는 30배와 60배와 100배를 나누지 않는다. 결실의 풍성함이 있을 뿐이다. 이쪽엔 사망이 없다.사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사망은 이제 우리의 잣대가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생명이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한 것 같이, 예수 이전에는 다 죽음이 끝이었던 것 같이, ■이제 예수로 인해서는 은혜가 왕노릇하여 모두 영생으로 간다. 생명이 이긴다 이렇게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아가 그 율법으로 말미암는 잣대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갈멜산 전투를, 하나님은 엘리아 때문에 마음을 움직여 이렇게 생명이 이기는 자리에까지 역사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역사라 그러면 우리 쉽게 세상에서 역사는 반복되며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 텐데 그건 세상 역사이고 ■하나님이 세상 역사에서 하시는 일은 사망이 왕노릇하던 역사를 생명이 왕노릇하는 역사로 바꿔놨다.
우리가 믿고 있지 않는가?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생명이 왕 노릇하는 데로 이걸 바꿔놓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생명은, 사망과 다르다.
사망은 모든 것을 헛되게 한다. 끝이 사망이니까 소멸시키고 망하는 것이다.
생명은 자라는 것이다. 끝없이 자라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것은 시간적 개념보다 더 크게, 존재의 그 가치, 보람, 영광의 무한한, 무한한 풍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얘기이다.
역사가 이어진다는 게 무엇이냐? 하나님이 이제 인류를 법을 근거로 하는 대상에서
은혜를 근거로 하는 대상으로 만들겠다고 하시므로 은혜가 근거가 되자,
우리에게 '명예로워라. 영광되라. 한번 해봐라. 이 기회를 너희가 유용하게 써라.' 하는 데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잘못하면 지옥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더 잘하는 데로, 우리가 탁구를 치다가 실점을 하면 실점이지 죽여버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탁구는 이기고 지는 것으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제 신자들에게 기독교라는 것은 이렇게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신다. 자신의 죽음을 얘기할 때, 요한복음 12장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죽음이 끝인 우리의 운명을 거기 사망이라는 자리에서 부활로 꽃 피우는 거다.
그 부활이란 생명이 사망을 겪어야 가는 자리, 사망이라는 자리가 없으면 생명과 부활이라는 얘기가 필요 없다.
생명이 계속 승리로 가야 되는데,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는 분명히 생명이 불순종을 겪음으로써 사망을 겪고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로 오는, 그리고 부활의 시대를 우리의 인생에 갖게 하는 이런 역사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신자라는 것이 권력을 갖지 않는 외적인 불만, 그리고 또 하나의 불만이 있다. 내적으로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자책, 이 두 가지가 다 이 사망의 잣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명의 잣대로 갈 때는 못했으면 다시 한 번 더 하는 것이다. 손흥민이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애국자인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오른발 왼발을 가리지 않고 차게
너무 심하게 훈련을 시켜서 이렇게 훌륭해졌다고 한다. 그 훈련은 당연히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는 거다.
잘하는 사람은 슛을 때리기만 하면 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많은 골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가 실패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신자들이 가지는 근거 기회 지위 운명인 것이다.
이런 일들이 성경에서 이렇게 분명히 나온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내 마음에 뭐가 있다? 육신을 따르는 죄의 법칙이 있고, 영을 따르는 진심이 있다. 그러나 늘 죄 아래 잡혀간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인데, 그가 뜻밖에 로마서 7장 2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감사가 터져나오고 '내 마음으로는 주의 법을, 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르노라.'
갈등이 해소되어 있지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가 나온다.
★이 갈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이 갈등이 옛날에는 죽음과 삶이었는데, 지금은 영광과 기회의 이 자리인 것이다. 거기에는 사망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래서 8장 1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으니라" 여기이다.
그러면 우리가 갈멜산 전투를 기억하고 엘리야를 높이고 한 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해야 맞다고?
하나님이 '더 가자'는 이야기, 더 가는 것이 다만 한 번이라도 잘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라는 우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옛날의 조건, 선택의 여지에서 늘 실패하는 율법의 기준에서 끌어내어 은혜의 기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은혜 아래 내려갈 수가 없다는 사실로 우리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우리가 속한 자리에서 승리하라고 한다.
★여기의 승리는 자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성이다.
이 명예를 누리라고 한다. 이 잘난 척을 해보라고 한다.
근데 다 와서 회개만 하고 잘난 척을 한 번도 못 해보는 게 신자들의 현실이 되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복음일 수 없다.
그러니 엘리야에게 감사해야 될 건 이거다. 우리들 가정에서 최고의 비극은 부부가 이혼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 자식들이 보통 공포에 질리는 것이 아니다. 막판의 싸움에서 이제는 끝장을 내자 할 때 그 돌이킨 많은 경우가 어린애가 우는 거다. 어린애가 울 때 부모가 자기의 자리를 자기의 책임을 각성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했다고 우리를 위로하신다. 말라기 4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한다.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를 것이라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엘리아를 보내리라 그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리라 만약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징벌로 칠까 내 마음이 근심이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못나게 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우리의 현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자의 영광들은 너무나 풍성하다. 그 일들에 우리의 현실이, 신앙생활이 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기도)
우리의 삶이 은혜 위에 있고 승리와 영광의 기회라는 것을 알게 하셨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복되게 하시고 우리 입술에 찬송을 주시길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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