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2001)_17. 인격의 성숙으로 나타나는 믿음]
한국 교회에서 믿음에 관하여 가장 혼동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생기는 믿음'과 ●'책임져야 하는 믿음'의 구별이 모두에게 모호하다는 것이다.
'은혜로 받는 믿음'이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복시키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성품과 인격에 대한 우리의 책임있는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그리고 바울을 닮는 것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품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전체적인 이해와 긴 안목을 갖고 보자면 신앙이 좋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초월성이나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일반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 말은, 더 이상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데, 우리의 좋은 신앙이 초월로 자꾸 주장되는 것을 교정하려는 표현이다.
●신앙이 좋으면, 일반과 자연이라는 것으로, 상식으로 나타난다.
이미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에 속하는 것들을 지금 누리는 것같이, 변화된 신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적으로 자연을 보는 눈, 일반을 보는 눈, 자연과 일반을 쓰는 시각과 목적과 내용에서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하면 자꾸만 초월과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경계선을 그어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으로 자꾸 나누는 버릇이 있다.
자연과 일반에 속한 것은 다 속된 것이고 종교적인 형태와 명분을 가진 것만이 초월에 속한 것이고 신앙의 영역과 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는 것을 자꾸만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안목과 부요함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중시키고 폐쇄시키는 것으로 알고, 수도승 같은, 그래서 자꾸 기도원으로 숨어드는, 원리와 내용에서가 아니라 형태에서 세상과 자꾸 분리를 하려는 신앙관을 가지는데, 이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신앙의 고급한 경지에 가면 어디에서 다르냐 하면, ●표정에서부터 다르다.
기도를 해야 신앙인된 것이 증명이 되고, 성경을 들어야 신자인 것이 표가 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만이 가지는, 온 천하 만물을 주장하시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복되심에 참여한 자의 시각, 변화, 이런 것들이 우리를 모든 것에서 다르게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일반과 상식, 자연이라는 형태로 신앙이 좋다는 것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할 때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이 윤리 도덕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예수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정직하냐?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착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지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갖는 윤리와 도덕은 어쨌든 그 기준이나 목표가 자기의 의에 있다. 자기 잘난 것의 한 증명으로 윤리와 도덕을 지킨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키는 일반과 상식 혹은 자연에서의 우리의 의로움과 선함은,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가 아니고《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발현》이다.
믿지 않는 자의 정직함, 불신자들의 성실함의 배후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자기 증명, 자기 자랑이 있고,
우리 믿는 자들의 윤리나 도덕 또는 상식이나 교양이나 이런 차원에서의 아름다움과 그 선함이 있을 때는 그 배경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서 이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구원하사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얼핏 봐서는 차별이 없어 보이나 믿는 자와 믿지않는 자는 ●근본에 있어서, 윤리 도덕 일반상식 예의범절에 있어서, 또한 그 의와 선과 어떤 덕목들이 행해지는 동기와 이유와 목표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이 좋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이요 또한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 신자의 신앙이 검증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하다 보면, 기독교 종교를 하나의 관념론으로 바꾸려는 도전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자연과 상식, 교양, 이런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정직할 수 있다. 예수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약삭빠르고 교활하고 음흉하고 거짓말 잘하고 엉터리인 사람이 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것은 분명히 예수를 믿어야 된다. 착해서 가지 않는다. 이건 어렵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신앙도 말하자면,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성경을 많이 본다든가 특별히 헌신을 많이 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본인의 신앙을 점검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을 때를 비유하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물기둥들이 다 담아져서, ●일반적인 것, 자연적인 것, 상식과 교양에 속하는 것들을 채우고 올라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수준이다.
●그것이 쌓여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갖는 지, 정, 의가 그가 사는 사회에서의 문화와 정신과 삶의 모든 면에서의 생각과 반응과 책임을 지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고 이런 모든 것을 채우기까지가 우리의 수준이다.
●줄서는 것, 차타고 가다 성질내는 것, 이런 모든 것에 우리의 수준이 있는 것이지,
몇가지 물기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잘못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쓸모있는 기계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목적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쓸모있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겠는가?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쓸모 있는 것으로 인하여 꼭 해야 되는 다른 부분들을 놓치면서도 본인은 좋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쓸모있어야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신앙인이 아니다. 그저 누가 알아주지 않고 특출나지 않지만 ●속이 조금씩 차여가고 자라나고 있으면 그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다운 백성이요 하나님 안에서 복 받은 자녀들일 것이다.
●신앙이란 한 평생을 놓고 만들어 나가는 싸움이지 어느 한 순간에 앞섰다고 해서 일등인 것 아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있는가? 그러면 그 이후도 기대를 하라는 말이다. 십자가는 이제 《시작》인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날 뛰는 게 아니다. 묵묵히 자라나는 것이다. 멋지게 자라나야 한다.
씨름하는 소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유 잘 나오고 살찌는 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과 그 인도하심과 마침내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목표에 대한 이해가 있음으로써》, 그에 감사하고 충성하고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출처: 믿음의 본질(2001)_17. 인격의 성숙으로 표현되는 믿음]
한국 교회에서 믿음에 관하여 가장 혼동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생기는 믿음'과 ●'책임져야 하는 믿음'의 구별이 모두에게 모호하다는 것이다.
'은혜로 받는 믿음'이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복시키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성품과 인격에 대한 우리의 책임있는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그리고 바울을 닮는 것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품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전체적인 이해와 긴 안목을 갖고 보자면 신앙이 좋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초월성이나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일반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 말은, 더 이상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데, 우리의 좋은 신앙이 초월로 자꾸 주장되는 것을 교정하려는 표현이다.
●신앙이 좋으면, 일반과 자연이라는 것으로, 상식으로 나타난다.
이미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에 속하는 것들을 지금 누리는 것같이, 변화된 신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적으로 자연을 보는 눈, 일반을 보는 눈, 자연과 일반을 쓰는 시각과 목적과 내용에서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하면 자꾸만 초월과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경계선을 그어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으로 자꾸 나누는 버릇이 있다.
자연과 일반에 속한 것은 다 속된 것이고 종교적인 형태와 명분을 가진 것만이 초월에 속한 것이고 신앙의 영역과 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는 것을 자꾸만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안목과 부요함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중시키고 폐쇄시키는 것으로 알고, 수도승 같은, 그래서 자꾸 기도원으로 숨어드는, 원리와 내용에서가 아니라 형태에서 세상과 자꾸 분리를 하려는 신앙관을 가지는데, 이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신앙의 고급한 경지에 가면 어디에서 다르냐 하면, ●표정에서부터 다르다.
기도를 해야 신앙인된 것이 증명이 되고, 성경을 들어야 신자인 것이 표가 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만이 가지는, 온 천하 만물을 주장하시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복되심에 참여한 자의 시각, 변화, 이런 것들이 우리를 모든 것에서 다르게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일반과 상식, 자연이라는 형태로 신앙이 좋다는 것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할 때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이 윤리 도덕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예수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정직하냐?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착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지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갖는 윤리와 도덕은 어쨌든 그 기준이나 목표가 자기의 의에 있다. 자기 잘난 것의 한 증명으로 윤리와 도덕을 지킨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키는 일반과 상식 혹은 자연에서의 우리의 의로움과 선함은,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가 아니고《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발현》이다.
믿지 않는 자의 정직함, 불신자들의 성실함의 배후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자기 증명, 자기 자랑이 있고,
우리 믿는 자들의 윤리나 도덕 또는 상식이나 교양이나 이런 차원에서의 아름다움과 그 선함이 있을 때는 그 배경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서 이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구원하사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얼핏 봐서는 차별이 없어 보이나 믿는 자와 믿지않는 자는 ●근본에 있어서, 윤리 도덕 일반상식 예의범절에 있어서, 또한 그 의와 선과 어떤 덕목들이 행해지는 동기와 이유와 목표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이 좋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이요 또한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 신자의 신앙이 검증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하다 보면, 기독교 종교를 하나의 관념론으로 바꾸려는 도전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자연과 상식, 교양, 이런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정직할 수 있다. 예수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약삭빠르고 교활하고 음흉하고 거짓말 잘하고 엉터리인 사람이 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것은 분명히 예수를 믿어야 된다. 착해서 가지 않는다. 이건 어렵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신앙도 말하자면,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성경을 많이 본다든가 특별히 헌신을 많이 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본인의 신앙을 점검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을 때를 비유하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물기둥들이 다 담아져서, ●일반적인 것, 자연적인 것, 상식과 교양에 속하는 것들을 채우고 올라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수준이다.
●그것이 쌓여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갖는 지, 정, 의가 그가 사는 사회에서의 문화와 정신과 삶의 모든 면에서의 생각과 반응과 책임을 지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고 이런 모든 것을 채우기까지가 우리의 수준이다.
●줄서는 것, 차타고 가다 성질내는 것, 이런 모든 것에 우리의 수준이 있는 것이지,
몇가지 물기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잘못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쓸모있는 기계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목적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쓸모있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겠는가?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쓸모 있는 것으로 인하여 꼭 해야 되는 다른 부분들을 놓치면서도 본인은 좋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쓸모있어야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신앙인이 아니다. 그저 누가 알아주지 않고 특출나지 않지만 ●속이 조금씩 차여가고 자라나고 있으면 그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다운 백성이요 하나님 안에서 복 받은 자녀들일 것이다.
●신앙이란 한 평생을 놓고 만들어 나가는 싸움이지 어느 한 순간에 앞섰다고 해서 일등인 것 아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있는가? 그러면 그 이후도 기대를 하라는 말이다. 십자가는 이제 《시작》인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날 뛰는 게 아니다. 묵묵히 자라나는 것이다. 멋지게 자라나야 한다.
씨름하는 소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유 잘 나오고 살찌는 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과 그 인도하심과 마침내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목표에 대한 이해가 있음으로써》, 그에 감사하고 충성하고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출처: 믿음의 본질(2001)_17. 인격의 성숙으로 표현되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