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2:1-51 / 2021.03.31.]
다윗은 종종 우리가 인용하는 대로,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 가장 분명한 고백을 한다; `너는 창과 방패로 나에게로 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는 정말 담대하고 완전하고 자랑스러운 고백으로 그 전투에 임한다. 그러나 그때는 어쨌던 그것은 그의 고백이었다.
아직 연륜과 고백이 부족한 때, 확실하지만 순수한, 그리고 아직 때가 묻지 않아서 아름답지만, 켜켜이 경험과 지혜에 의해서 잘 쌓여진 무게와 깊이를 가진 고백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22장에 와서는 그가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사울에게 미움을 받고, 사울에게 쫓겨 목숨을 구하러 블레셋으로 도망가고, 돌아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이 죽자 슬픈 노래를 부르고, 왕이 되고, 나라를 크게 만들어 모두에게 칭송을 받는 즉,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다윗이나 사울의 핍박에서 보복하지 않는 그의 모습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며, 사무엘하 7장에 오면 그가 성전을 지을 마음까지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다윗` 하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다윗과 그의 생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밧세바 사건이다. 밧세바 사건은 우리가 알고 기대하는 다윗의 모든 명성과 모든 우리의 흠모할 만한 존경심을 다 뒤집어 놓은 사건이다.
그리고 그후 밧세바 사건 이후에 회심하고 돌아왔으나 그에게는 반역이라는 가족들과의 골육상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 모든 일 후에 이 고백이 나온다. 그의 생애는 결단코 평탄치 않았다. 그는 고단한 인생을 살았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극단의 좌절과 자책과 절망에까지 갔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다윗의 생애 속에서 골리앗 사건, 사울왕을 살려준 사건, 혹은 성전을 짓겠다고 한 사건으로 다윗을 대표하지 않고, 밧세바로 대표하는, 이 모든 것은 결국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나온다.`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렇게 참으로 역사에 잊을 수 없이, 비켜갈 수 없이, 변명할 수 없이, 이 사건은 그에게 대표적인 역할이 된다.
■다윗의 이 밧세바 사건은, 그가 그 앞에서 너무나 복되고 너무나 자랑스럽고 너무나 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치명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윗이 회복이 되며, 더 깊은 자리로 가게 되는 것, 그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다윗의 생애이다.
■다윗의 영웅성이 아니라 다윗의 좌절, 다윗의 실패, 절망 이것이 골리앗을 이긴 것이나 사울을 살려준 것이 만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 하나님의 깊으심! 하나님의 깊으심을 측량할 수 없다든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런 말들로 종종 언급된 것같이, 그것이 비밀스럽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이하심은, 그 모든 것으로 선으로 열매 맺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두려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선을 행하시지만 그 과정이, 그걸 만들어 내는 방법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 뜻을, 그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들이 목숨을 걸어야 되는, 모든 절망과 수치와 어리석음을 통과해야 되는 것 때문에 우리는 두렵다고 얘기한다.
우리 인생에 우리도 지금 말년에 와 있다.
과거에 잘하고 못한 일은 고사하고 지금이 참으로 기이하다. 지금은 나설 수도 없고 나설 힘도 없고 역할도 없고, 그래서 뒤로 감추어진 말년을 우리가 살고 있는데, 이것이 뭔가 싶을 때마다 다윗의 생애는 우리에게 커다란 증거가 된다.
아까도 언급한 대로, `예수님은 그의 탄생에 있어서 그가 믿음과 은혜의 주인이다`로 그 족보에 소개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대표하고, 다윗은 은혜를 대표한다.
우리가 다윗을 아무리 영웅시 해도 거기에는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그의 모든 영웅성을 삼켜버린, 앞서 한 모든 것들을 무효화한 정도가 아니라,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더욱 절망스럽게 만드는 그 사건을 하나님이 진정 다윗의 생애에 묻어두고 보여주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라고 보여주시는,
그러니까 오늘 이 사무엘하 22장도 끝절 두절도 이렇게 되어있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후손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이란 `여기서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영생을 주고` 이렇게 간단한 몇 마디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원이란, 다윗의 생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장 영웅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그리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수치스러운 실패, 후회에다가 담아내는, 이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우리의 생애를, 우리가 자책하고 외면하고 도망가고 언급하기 싫은 모든 과거와 현실에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며 하나님이 지금 더 큰 일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세가 그랬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왜 이제야 오셨냐, 여태껏 뭐 하셨냐, 지난 사십 년간 나 죽어 지냈는데 그때는 어떤 낌새도 어떤 조짐도 어떤 희망도 주지 않으셨다가, 이제 다 늙어빠졌는데 이제 와서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뭐라 하셨나? "나는 하나님이기를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기적의 시간이다. 우리가 겪어야 할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 오십 대, 육십 대를 지나왔다. 겪었다. 그리고 지금 칠십 대를 겪고 있다.
■예전에 후회스러운 일과 예전에 불만인 것들이 있는가? 지금 만회해야 한다. 지금은 어른답게 굴어야 한다. 경험이 있지 않은가! 지혜가 생기지 않았는가!
우리가 가졌던 믿음이, 고백적으로 우렁차게 울려 퍼진 골리앗 사건에 그치지 않고, 그 모든 우여곡절을 지나 인생의 황혼기에 드디어 맺게 된 열매로, 이 놀라운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우리의 생애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고 성경은, 다윗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생애가 이 다윗의 생애보다 더 엄청날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금 현실이 더 놀라운 찬송과 고백으로 이어지는 기적의 생애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 자손들과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적을 증언하는 자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세상이 하는 일과 다르다.
그것은 권력이 아니며, 그것은 경쟁이 아니며, 폭력일 수 없으며,
■그것은 섬기는 것이며, 기도하는 것이며, 기다리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사셨고 우리도 그 길을 걷고 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바로, 예수께서 요구하신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지니라` 바로 그 본문이다.
그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과 힘과 지혜와 우리 삶의 은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021.03.31. 사무엘하 22:1-51 ㅅㅁ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