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2001)_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_9. 은혜와 동시에 책임으로서의 믿음]
빌립보서 2장에 가면 이런 설명이 등장한다. 은혜로 얻은 구원이 언제나 '책임'의 믿음을 구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을 본다.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에서 말하는 구원은 보통 말하는 '칭의'의 구원이 아니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구원의 완성을 말하는 '성화'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 12절은 5절 이하와 연결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우시고 복종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느니라"
너희는 이렇게 너희 구원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원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의 본을 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믿음의 표준과 모델을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렇게 하라는 '책임'이 늘 요구된다.
예수를 믿고 나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갖기 위해서 구하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기계적으로 다뤄 달라는 기도를 꼭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상하게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내가 결정하기까지 요구하실 뿐, 하나님은 절대 조종하시지 않으신다.
어떤 외적 조건으로 내가 조종당해서 믿음이 지켜지는 것을 하나님이 목적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당황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인가를 아는 차원에서, 그것을 지키는 자리까지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신다.
이것은 '책임지는 싸움'이다. 이 부분을 기도해서 넘어가려고 하면 안 된다.
물론 그렇게 기도해도 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언제나
이 '책임'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요 노력으로 등장하는 것일 뿐, 기도하는 것만으로 '책임과 결과'를 떠넘겨서는 안된다.
머리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사실에서는 '은혜'이고, 그것을 내가 해야 된다는 사실에서는 '책임'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믿음에서는 아는 것과 함께 '연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런데 '노력하거나 연습해서 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꾸 위에서 뭔가 뚝 떨어지는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를 믿는다고 고백한 것을 가지고 '주를 사랑하는 일을 연습하는 것'이 하나님이 볼 때 제일 아름답다.
'연습하고 노력하며 애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받는 제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발적이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으고 '노력'하고 애쓰고 연습하여 만든' 자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그 완성의 자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로 받지 않는다. 내가 '붙잡아야' 되고 내가 '결정하고 노력하고 '연습해서' 그 자리에 가야 되는 '책임'의 자리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이다.
이 믿음의 '책임'과 은혜성을 우리가 분명히 해서 늘 은혜를 구하되, 그 은혜를 '납득'하고 '확인'하고 '항복'하고 '결정'해서 그렇게 '실천'하려는 의도에서 그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의 양면성인 ■'우리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연습하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출처: 박영선목사_믿음의 본질(2001)_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_9 은혜와 동시에 책임으로서의 믿음]
빌립보서 2장에 가면 이런 설명이 등장한다. 은혜로 얻은 구원이 언제나 '책임'의 믿음을 구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을 본다.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에서 말하는 구원은 보통 말하는 '칭의'의 구원이 아니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구원의 완성을 말하는 '성화'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 12절은 5절 이하와 연결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우시고 복종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느니라"
너희는 이렇게 너희 구원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원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의 본을 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믿음의 표준과 모델을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렇게 하라는 '책임'이 늘 요구된다.
예수를 믿고 나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갖기 위해서 구하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기계적으로 다뤄 달라는 기도를 꼭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상하게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내가 결정하기까지 요구하실 뿐, 하나님은 절대 조종하시지 않으신다.
어떤 외적 조건으로 내가 조종당해서 믿음이 지켜지는 것을 하나님이 목적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당황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인가를 아는 차원에서, 그것을 지키는 자리까지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신다.
이것은 '책임지는 싸움'이다. 이 부분을 기도해서 넘어가려고 하면 안 된다.
물론 그렇게 기도해도 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언제나
이 '책임'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요 노력으로 등장하는 것일 뿐, 기도하는 것만으로 '책임과 결과'를 떠넘겨서는 안된다.
머리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사실에서는 '은혜'이고, 그것을 내가 해야 된다는 사실에서는 '책임'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믿음에서는 아는 것과 함께 '연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런데 '노력하거나 연습해서 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꾸 위에서 뭔가 뚝 떨어지는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를 믿는다고 고백한 것을 가지고 '주를 사랑하는 일을 연습하는 것'이 하나님이 볼 때 제일 아름답다.
'연습하고 노력하며 애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받는 제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발적이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으고 '노력'하고 애쓰고 연습하여 만든' 자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그 완성의 자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로 받지 않는다. 내가 '붙잡아야' 되고 내가 '결정하고 노력하고 '연습해서' 그 자리에 가야 되는 '책임'의 자리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이다.
이 믿음의 '책임'과 은혜성을 우리가 분명히 해서 늘 은혜를 구하되, 그 은혜를 '납득'하고 '확인'하고 '항복'하고 '결정'해서 그렇게 '실천'하려는 의도에서 그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의 양면성인 ■'우리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연습하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출처: 박영선목사_믿음의 본질(2001)_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_9 은혜와 동시에 책임으로서의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