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2001)_24. 인내하는 믿음]
자연인들이 갖는 종교에 대한 본성, 초월을 종교적인 중심에 놓은 사람들이 갖는 종교적 본성이 있다.
■그런데 성경이 믿음을 논할 때 '인내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그 종교적 본성이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어 달려서 그 답을 초월적으로 받아내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시련이나 인내가 필요없다.
~~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것이 하나의 본능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신앙을 논할 때마다, '하나님께 진심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매어 달리면 필요한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리라'는 그런 식의 기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야고보서에서 본 바와 같이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로마서 5:3 이하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을 이루는 방법은 능력이나 믿음이나 기도가 아니며 환난, 인내, 연단이라고 말한다. 하나로 묶어 얘기하자면 '시련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올바른 믿음이 소망을 이루고, 우리가 소원하는 목표와 보상을 얻는 것이 믿음인 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시련을 견디는 것'을 말한다.
초월적인 보상을 받아내는 어떤 신비한 신앙의 형태가 아니다.
우리 생각에는 세상적인 모든 일들을 일시 중단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 엎드려 있는 것이 소망을 이루는 방법일 것같지만,
■성경은 그보다는 시련과 고난과 환난을 얘기하는 것이다.
약속과 소망들이 믿음의 내용이요 목표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약속과 소망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될 때에는,
성경은 그 믿음이 초월적인 방법을 끌어내는 어떤 신비한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 인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어떤 과정 ]이고 [ 시련과 환난의 과정 ]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왜 나타나는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이 시련이다.
■하나님은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하신다.
뭐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가?
그게 있어야 부피가 생기는 것이다. 그 내용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에서 시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복, 약속과 소망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내가 기대하는 때에 허락되지 않는 것으로 시련이 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는데, 도대체 믿은 효과가 없는 거다. '아니, 믿은게 이게 뭐야?'가 생기는 것이다.
~~
하나님이 왜 믿음에 인내라는 단어를 붙이게끔 요구하시는가?
왜 시련과 연단이 필요한가?
왜 한숨과 체념과 낙심까지도 허용하시는가?
왜 그런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평면에 그린 둥근 원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이 믿음의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그 원을 원통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누가 얼마나 빨리 하나님 앞에 맘에 들게 해서 용돈 타 가느냐, 자기가 필요한 결과를 얻어가느냐,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더 깊은 경지로 가는 거다.
이 깊은 하나님, 이 높은 하나님, 이 넓은 하나님을 알아 배워,
내 자신이 크는 차원에서 믿음의 시련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인류와 역사에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더 크고 더 놀랍고,
온 우주만물에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가 충만하기 위하여, 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출처; 박영선목사_믿음의 본질_24. 인내하는 믿음)
자연인들이 갖는 종교에 대한 본성, 초월을 종교적인 중심에 놓은 사람들이 갖는 종교적 본성이 있다.
■그런데 성경이 믿음을 논할 때 '인내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그 종교적 본성이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어 달려서 그 답을 초월적으로 받아내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시련이나 인내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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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것이 하나의 본능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신앙을 논할 때마다, '하나님께 진심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매어 달리면 필요한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리라'는 그런 식의 기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야고보서에서 본 바와 같이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로마서 5:3 이하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을 이루는 방법은 능력이나 믿음이나 기도가 아니며 환난, 인내, 연단이라고 말한다. 하나로 묶어 얘기하자면 '시련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올바른 믿음이 소망을 이루고, 우리가 소원하는 목표와 보상을 얻는 것이 믿음인 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시련을 견디는 것'을 말한다.
초월적인 보상을 받아내는 어떤 신비한 신앙의 형태가 아니다.
우리 생각에는 세상적인 모든 일들을 일시 중단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 엎드려 있는 것이 소망을 이루는 방법일 것같지만,
■성경은 그보다는 시련과 고난과 환난을 얘기하는 것이다.
약속과 소망들이 믿음의 내용이요 목표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약속과 소망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될 때에는,
성경은 그 믿음이 초월적인 방법을 끌어내는 어떤 신비한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 인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어떤 과정 ]이고 [ 시련과 환난의 과정 ]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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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왜 나타나는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이 시련이다.
■하나님은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하신다.
뭐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가?
그게 있어야 부피가 생기는 것이다. 그 내용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에서 시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복, 약속과 소망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내가 기대하는 때에 허락되지 않는 것으로 시련이 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는데, 도대체 믿은 효과가 없는 거다. '아니, 믿은게 이게 뭐야?'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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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왜 믿음에 인내라는 단어를 붙이게끔 요구하시는가?
왜 시련과 연단이 필요한가?
왜 한숨과 체념과 낙심까지도 허용하시는가?
왜 그런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평면에 그린 둥근 원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이 믿음의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그 원을 원통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누가 얼마나 빨리 하나님 앞에 맘에 들게 해서 용돈 타 가느냐, 자기가 필요한 결과를 얻어가느냐,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더 깊은 경지로 가는 거다.
이 깊은 하나님, 이 높은 하나님, 이 넓은 하나님을 알아 배워,
내 자신이 크는 차원에서 믿음의 시련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인류와 역사에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더 크고 더 놀랍고,
온 우주만물에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가 충만하기 위하여, 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출처; 박영선목사_믿음의 본질_24. 인내하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