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생명 성령의 법]과 [죄 사망의 법] 사이의 갈등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비판과 절규를 자아낸다. 헤매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들이 일한다. 언제까지? 구원의 완성 때까지

nazunzaro 2020. 12. 18. 23:2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그러면 이제 죄를 안짓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와서 죄와 사망의 법이 몰고 간 운명과 그 궁극적 결과를 이길 것이라고 한다.
■소멸시키고 해소하고 쫓아내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갈등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비판과 절규를 자아내지만, 결국 비극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게 하여 이길 것이라고 한다.

"~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2-17)

이 구절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예수믿는 너희에게 영광만 주고 고난을 없애준다는 말은 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로 약속된 자이다. ■그런데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무서워할 필요 없다, 너희가 아들이며 하나님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인 것을 기억하라'는 권면이다.

이런 권면은 왜 나왔을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실감했다면 이런 말씀으로 권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갈등이 없고 공포와 의심이 없어야 하는데, 이 권면이 나온 것은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 현실은 애매하고 무섭고 망한 것 같은 현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즉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는 기회며 시간이며 과정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틀려서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약속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로마서 8장은,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한다.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는 왜 나왔을까? 결과가 아직 안 나왔기 때문에 격려하는 것이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으면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는 필요 없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왜 나오는 것일까?
얼마나 한심하고 못났으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겠는가?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편 들어 주시며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에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신통하거나 시원해지지 않는다. 잠깐잠깐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이게 뭔가?' 하는 날들이 많다.

이런 사실을 왜 알아야 할까? 이런 과정이 무엇을 만들어내고 왜 필요한가를 모르면 체념하고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잘잘못이라는 것이 잘하고 못하고의 개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마저도 하나님이 들어 일하신다는 걸 모르게 된다. ■한 사람의 생애에 걸쳐 그를 훈련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걸 모르게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이 말은 '실패도 못난 것도 일을 한다'고 해석해야 맞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은 예수 안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하신다. 그 운명이, 그 승리와 영광이 결정되어 있다. 미리 아셨고 부르셨고 의롭다고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전부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예언적 완료, 선지적 완료라고 한다. 지금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하지만 결국 예정된 운명으로 가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결국 승리로 갈 거면 이런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헤매는 시간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헤매는 시간들이 일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 현실과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더 적극적인 이해를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에 대해서까지 인가? 실패까지도 말이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구해낸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 예수이고, 그 예수를 보내신 이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 격려가 필요해서 그렇다.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나는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자신이 없다. '이건 예수 믿는 게 아니다.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새겨야 하는 말씀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너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이렇게 이어진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5-36)

36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평안하지 않고 마음에 확신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도살 당할 양 같이 '오늘 콱 죽어버릴까. 내일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어디까지 내려가 보았는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자리,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는 원망의 자리, 분노의 자리, 절망의 자리, 부끄러움이 자리,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 보았는가? 거기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과정을 요구하실까?
제자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하). 우리는 이 구절을 지극 함으로 받아들인다. 구절의 뜻은 모르고 지극함, 열심, 진심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은 '내 이해와 능력 밖까지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로 일하신다는 것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체를 따라 시간과 공간과 경우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고 가셨는가? 문둥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며 바다를 잠잠 케 하셨다. 그랬던 이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요 우리를 부르신 복된 기회라고 한다》.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사도행전 4장 12절의 선언은 ■'예수가 십자가를 져서 구원을 이루셨듯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인생의 말 못할 모든 정황을 거쳐서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라는 의미이다.

고난이 우리에게 일을 한다.
하나님이 끝없이 이 일을 하신다.

"너는 지금 자녀로서 훈련을 받고 있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는 나와 함께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자다"

어떤 최악의 형편도 하나님의 통치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최악의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고 하나님에게 외면될 수도 없다. 그런 조건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이 영광받는 그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 나는 내 조건, 내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이 책임, 이 선택, 이 기회가 신앙생활이다.
나 하나의 씨름이 나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다보히 15. p.226~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