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 영화로움,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이제 죽으실 것이다, 그것이 아들의 영광이 되며 아버지의 영광이 된다.
■죽는 것이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이요, 그 영광을 받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라서 해석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들로서 아버지께 받는 영광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는 십자가의 수난은 우리가 두고두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늘 반복해서 확인하고 또 넓혀가야 하는 이해이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순종하기를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순종하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해석을 우리는 듣는다.
그리고 그 죽으심을, 그의 순종과 비우심과 낮아지심을 이룸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다 그 이름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섬김의 극단의 상태 - 섬기는 것은, 섬긴다는 것은 섬겨야 할 대상을 위하여 최선을 지나서 극단적인 것 - 까지 다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알고 있는 승리 성공에 있지 않고, 자기를 내어줌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로 인도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이 찬송, 신령한 복, 사랑, 거룩, 기쁨, 영광, 그의 자녀, 이런 단어들로만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는 뜻으로 소개되고 있다.
길지 않은 복음서에 별것 아닌 이야기 - 한 여인이 와서 예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입맞추고,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이 속으로 '이 사람이 진정한 선지자라면 자기에게 와서 이 발 씻는 여인이 죄인인 줄 알텐데 왜 물리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별것 아닌 이야기가 - 왜 이렇게 길게 소개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야 된다.
예수님을 초청한 이 시몬은 바리새인이라 여기 나와 있고, 그들은 옳고 그른 일에 모든 잣대를 그 판단 기준으로 갖고있는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가장 열심히 율법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진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한다는 책임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하는 하나님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는 겁에 질려서 신앙생활을 한다. 틀리지 않으려 하고 벌받지 않으려고 한다. 틀리지 않고 벌받지 않게 살면, 다 지켜도 보람이 없다. 거짓말 안하고 살고 성실히 산 건, 보람이 없다.그래서 여기는 어떤 부작용이 생기느냐 하면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해야 된다.
그게 지금 딱 이 바리새인이 하는 게 그것이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는데, 이 사람이 많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는데, 자기한테 와서 발씻고 입맞추는 여인이 누군지도 모른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에 딱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예수가 이렇게 답하는 거다. "너는 내가 들어올 때 나를 초청해 놓고도 넌 발 씻을 물도 안 줬다. 넌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이 여인은 와서 나에게 울며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누가 더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겠느냐?" 그렇게 묻는 거다.
■그러니 뒤집어 말해서 하나님은 잘잘못과는 상관이 없는 분이다.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잣대로 삼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위해 내 아들을 준 것같이 너희도 제발 나를 사랑해다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우리가 다 씻고 자격을 갖춰야 되는 분이 아니라, 성경이 얼마든지 얘기하는, "은혜롭고 자비롭고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 어찌 에미가 젖먹이는 아기를 잊겠느냐? 그는 잊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안 믿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만든 하나님은 누구냐 이거다. 누구냐? 누구를 겁주기 위한 폭력의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불안에 떨고 이 불안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시비밖에는 할 줄을 모르는 신앙이 됐다 이거다.
뭘 시비를 걸라고 하나님이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잘못한 새끼들 다 잡아다 죽여라` 이렇게 되지 않았다. 자기가 못 살지 않는가? 넉넉할 수가 없다. 언제나 죄책감과 자책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다 씻어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분노와 절망이 누군가에게 불길로 터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얘기들은 다 감사와 기쁨과 연결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기쁨, 사랑, 충만.. 너희는 더이상 종이 아니다. 너희는 내 친구다. 친구란 뭔가? 서로 의지하고 사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그렇게 요구한다.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보았나?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이상 어디에 무슨 더 어떤 조건, 무슨 더 요구가 있겠는가? 그 아들을 주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뜻밖에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방심하게 되거나 허랑방탕하게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겁을 내는 게 훨씬 문제인 거다.
■그러니까 왜 예수를 그따위로 믿는가?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존재가 됐지 않았는가?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인생은 훨씬 넓게 살 수 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무책임한 거다. 비겁한 거다. 그건 도망가고 외면하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아도 어렵다. 걱정할 것 많고.
■요한복음 17장이 그 얘기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께서 아들로 영광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아들의 죽음, 그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자식을 죽여서 우리를 구원하겠다` 는 그 방법이 얼마나 영광된 임무인가? 라고 예수가 고백하지 않는가.
"아버지께서 이 가장 중요한 일을 나에게 시켰다. 나의 죽음은 나의 영광이고, 이렇게 하실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로마서 8장 14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은 왜 오나?
섬겨야 해서 온다. 지는 역할을 해야 된다.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같이.
그것이 예수에게 영광이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지는 역할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것은 영광이다.
`네가 하나 짐으로써 저 모두를 영광된 자리에 함께 데리고 와라`
이게 우리 인생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여기 성경이 약속하는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운명, 우리의 책임이 녹아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얘기했다.
■이 권세는 권력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영광이었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듯이, 그가 가진 모든 권세는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 말씀같이,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니라"
자, 얼마나 명백한가!
그런데 왜 서로 속이고 사는 건가? 스스로를 속이고 영광과 기쁨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비난과 저주와 절망과 분노 속에서 사로잡혀서, 누구를 비난해서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그 죄인을 하나 밝혀내는 게 무슨 큰 일이겠는가?
죄를 잡지 말고, 이 복음을, 이 기쁨을, 이 기적을, 이 웃음을 나누도록 되어있는데, 왜 좇아 다니면서 시비인 건가?
■우리 지난 주간에 제대로 한번이나 통쾌하게 웃었는가? 세상적인 통쾌함은 누구를 잡는 거다. 우리의 통쾌함은, '맞아. 이게 복음이야. 이게 신자의 존재 가치야' 그런 것들이다.
(*다보요 37)
■죽는 것이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이요, 그 영광을 받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라서 해석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들로서 아버지께 받는 영광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는 십자가의 수난은 우리가 두고두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늘 반복해서 확인하고 또 넓혀가야 하는 이해이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순종하기를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순종하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해석을 우리는 듣는다.
그리고 그 죽으심을, 그의 순종과 비우심과 낮아지심을 이룸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다 그 이름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섬김의 극단의 상태 - 섬기는 것은, 섬긴다는 것은 섬겨야 할 대상을 위하여 최선을 지나서 극단적인 것 - 까지 다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알고 있는 승리 성공에 있지 않고, 자기를 내어줌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로 인도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이 찬송, 신령한 복, 사랑, 거룩, 기쁨, 영광, 그의 자녀, 이런 단어들로만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는 뜻으로 소개되고 있다.
길지 않은 복음서에 별것 아닌 이야기 - 한 여인이 와서 예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입맞추고,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이 속으로 '이 사람이 진정한 선지자라면 자기에게 와서 이 발 씻는 여인이 죄인인 줄 알텐데 왜 물리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별것 아닌 이야기가 - 왜 이렇게 길게 소개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야 된다.
예수님을 초청한 이 시몬은 바리새인이라 여기 나와 있고, 그들은 옳고 그른 일에 모든 잣대를 그 판단 기준으로 갖고있는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가장 열심히 율법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진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한다는 책임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하는 하나님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는 겁에 질려서 신앙생활을 한다. 틀리지 않으려 하고 벌받지 않으려고 한다. 틀리지 않고 벌받지 않게 살면, 다 지켜도 보람이 없다. 거짓말 안하고 살고 성실히 산 건, 보람이 없다.그래서 여기는 어떤 부작용이 생기느냐 하면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해야 된다.
그게 지금 딱 이 바리새인이 하는 게 그것이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는데, 이 사람이 많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는데, 자기한테 와서 발씻고 입맞추는 여인이 누군지도 모른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에 딱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예수가 이렇게 답하는 거다. "너는 내가 들어올 때 나를 초청해 놓고도 넌 발 씻을 물도 안 줬다. 넌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이 여인은 와서 나에게 울며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누가 더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겠느냐?" 그렇게 묻는 거다.
■그러니 뒤집어 말해서 하나님은 잘잘못과는 상관이 없는 분이다.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잣대로 삼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위해 내 아들을 준 것같이 너희도 제발 나를 사랑해다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우리가 다 씻고 자격을 갖춰야 되는 분이 아니라, 성경이 얼마든지 얘기하는, "은혜롭고 자비롭고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 어찌 에미가 젖먹이는 아기를 잊겠느냐? 그는 잊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안 믿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만든 하나님은 누구냐 이거다. 누구냐? 누구를 겁주기 위한 폭력의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불안에 떨고 이 불안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시비밖에는 할 줄을 모르는 신앙이 됐다 이거다.
뭘 시비를 걸라고 하나님이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잘못한 새끼들 다 잡아다 죽여라` 이렇게 되지 않았다. 자기가 못 살지 않는가? 넉넉할 수가 없다. 언제나 죄책감과 자책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다 씻어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분노와 절망이 누군가에게 불길로 터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얘기들은 다 감사와 기쁨과 연결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기쁨, 사랑, 충만.. 너희는 더이상 종이 아니다. 너희는 내 친구다. 친구란 뭔가? 서로 의지하고 사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그렇게 요구한다.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보았나?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이상 어디에 무슨 더 어떤 조건, 무슨 더 요구가 있겠는가? 그 아들을 주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뜻밖에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방심하게 되거나 허랑방탕하게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겁을 내는 게 훨씬 문제인 거다.
■그러니까 왜 예수를 그따위로 믿는가?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존재가 됐지 않았는가?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인생은 훨씬 넓게 살 수 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무책임한 거다. 비겁한 거다. 그건 도망가고 외면하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아도 어렵다. 걱정할 것 많고.
■요한복음 17장이 그 얘기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께서 아들로 영광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아들의 죽음, 그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자식을 죽여서 우리를 구원하겠다` 는 그 방법이 얼마나 영광된 임무인가? 라고 예수가 고백하지 않는가.
"아버지께서 이 가장 중요한 일을 나에게 시켰다. 나의 죽음은 나의 영광이고, 이렇게 하실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로마서 8장 14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은 왜 오나?
섬겨야 해서 온다. 지는 역할을 해야 된다.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같이.
그것이 예수에게 영광이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지는 역할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것은 영광이다.
`네가 하나 짐으로써 저 모두를 영광된 자리에 함께 데리고 와라`
이게 우리 인생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여기 성경이 약속하는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운명, 우리의 책임이 녹아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얘기했다.
■이 권세는 권력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영광이었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듯이, 그가 가진 모든 권세는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 말씀같이,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니라"
자, 얼마나 명백한가!
그런데 왜 서로 속이고 사는 건가? 스스로를 속이고 영광과 기쁨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비난과 저주와 절망과 분노 속에서 사로잡혀서, 누구를 비난해서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그 죄인을 하나 밝혀내는 게 무슨 큰 일이겠는가?
죄를 잡지 말고, 이 복음을, 이 기쁨을, 이 기적을, 이 웃음을 나누도록 되어있는데, 왜 좇아 다니면서 시비인 건가?
■우리 지난 주간에 제대로 한번이나 통쾌하게 웃었는가? 세상적인 통쾌함은 누구를 잡는 거다. 우리의 통쾌함은, '맞아. 이게 복음이야. 이게 신자의 존재 가치야' 그런 것들이다.
(*다보요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