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설득이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했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초점이 제물에 있기보다는 그 제사를 드린 사람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저들이 어떻게 현실적인 결과나 증거가 없음에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믿음을 따라 하나님 편을 들고 믿음을 지킨 그런 믿음의 행위가 가능했던 더 근본적인 믿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이다.
■즉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적인 것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벨은 믿음을 가져서 오히려 억울하게 죽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가 믿음을 지켜서 핍박을 받고 불이익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꼭 불이익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 문제에 대해서 영향력이 없는 것은 11장 4절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통치와 발언권 내에서는 아벨이 대접을 받고 있다. 죽었다는 것이 여기서는 문제가 안 된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보상하거나 방해한 것을 두고 이쪽에서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더라는 말이다. 여기에 초점이 있다.
노아 문제도 그렇다. 노아는 장차 올 일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내용을 듣고 경고함을 받는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 세상이 망할 것 같은 징조가 없는데도 그 일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섭하사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주시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으로 원인을 삼거나 세상적인 것으로 보상을 삼거나 세상적인 것으로 어떤 증거를 삼으려고 할 문제가 아니라, 이 믿음이라는 영역에서는 하나님만이 원인이시며 결과이시며 증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세상이 자연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며, 그는 인격자라는 얘기이다.
믿음 자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히브리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믿음 안에 있는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통치와 복주심과 대접하심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은 아무 영향력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저들에게 믿음이 힘을 발휘하게 한 근본 원인, 근본 원리임을 말하는 것이다.■세상이나 혹은 자연의 법칙이 통치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원인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다. 모든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하여 원인이며 결과며 통치권자는 하나님뿐이시며,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발언하시며 설명하사 준비하게 하시며 믿게 하신다.
단추를 눌러서 아벨을 하나님 마음에 들게 움직이거나 전기를 꽂아서 에녹을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저들의 마음을 항복 시키사 저들이 그 믿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초월을 앞세우지 않고 계시를 앞세운다. 계시를 앞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어 우리에게 당신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다시 이런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신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설명하시느냐 하면 우리를 기계나 로보트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설명을 하시며 안타까워 하신다. 감정까지 도입을 하고 계신다. 어떤 분이 쓴 책 이름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 그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성경에는 '그토록...'이라는 표현이 있고,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하시며 우리의 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빌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격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못한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보통 우리는 뭐라고 화를 내는가?
"하나님, 제가 그토록 기도했지 않습니까? 몇 단계나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 십니까?"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신다. 우리가 스스로 책임지고 반대하고 극복하고 이기기를 바라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조종하는 것을 절대 안 하신다. 놀랍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우리의 인격에 발언하신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에 대고 발언하시지, 우리를 조종하시지는 않는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는 것이, 조종당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조종하기 쉬운 어떤 기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종교적인 어떤 일에 헌신적이며 진심과 맹렬히 열심을 내는 것을 가지고 쉽게 신앙이 좋다고 판정을 못 내린다. 그것이 이런 이해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동참한 행위라면 그건 아주 좋은 신앙이다. 그러나 이런 인격적 관계를 떠나서 기계적인 밀접함을 원하는 것으로 그의 신앙행위가 자행되고 있으면 그건 정말 '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설득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 그 과정 없이 그런 과거 없이 믿음이라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확인 속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그런 의미에서 주문이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묶어 버리는, 다른 생각과 선택을 포기하고 스스로 옭아매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확인해서 '하나님, 당신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당신만이 저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는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믿음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상하게 여길 만큼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그냥 맹탕으로 갖고 있는 열심, '저는 죄 짓기 싫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는데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 말 들을래? 아니면 매 맞고 들을래?" 이런 선택이 아니고 "너, 내 말 들을래? 세상 말 들을래?"에서 선택을 하고, 그래서 세상을 따라 가면 당장은 좋아 보이고 당장은 신나 보이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긴 싸움을 통해서 드디어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을 갖고 와도 '싫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택하겠습니다'를 받아내시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자리에 가도록 하나님이 기다리시며 우리를 납득하시며 여백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해보고 돌아오게 하신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했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초점이 제물에 있기보다는 그 제사를 드린 사람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저들이 어떻게 현실적인 결과나 증거가 없음에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믿음을 따라 하나님 편을 들고 믿음을 지킨 그런 믿음의 행위가 가능했던 더 근본적인 믿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이다.
■즉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적인 것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벨은 믿음을 가져서 오히려 억울하게 죽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가 믿음을 지켜서 핍박을 받고 불이익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꼭 불이익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 문제에 대해서 영향력이 없는 것은 11장 4절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통치와 발언권 내에서는 아벨이 대접을 받고 있다. 죽었다는 것이 여기서는 문제가 안 된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보상하거나 방해한 것을 두고 이쪽에서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더라는 말이다. 여기에 초점이 있다.
노아 문제도 그렇다. 노아는 장차 올 일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내용을 듣고 경고함을 받는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 세상이 망할 것 같은 징조가 없는데도 그 일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섭하사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주시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으로 원인을 삼거나 세상적인 것으로 보상을 삼거나 세상적인 것으로 어떤 증거를 삼으려고 할 문제가 아니라, 이 믿음이라는 영역에서는 하나님만이 원인이시며 결과이시며 증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세상이 자연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며, 그는 인격자라는 얘기이다.
믿음 자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히브리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믿음 안에 있는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통치와 복주심과 대접하심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은 아무 영향력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저들에게 믿음이 힘을 발휘하게 한 근본 원인, 근본 원리임을 말하는 것이다.■세상이나 혹은 자연의 법칙이 통치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원인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다. 모든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하여 원인이며 결과며 통치권자는 하나님뿐이시며,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발언하시며 설명하사 준비하게 하시며 믿게 하신다.
단추를 눌러서 아벨을 하나님 마음에 들게 움직이거나 전기를 꽂아서 에녹을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저들의 마음을 항복 시키사 저들이 그 믿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초월을 앞세우지 않고 계시를 앞세운다. 계시를 앞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어 우리에게 당신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다시 이런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신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설명하시느냐 하면 우리를 기계나 로보트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설명을 하시며 안타까워 하신다. 감정까지 도입을 하고 계신다. 어떤 분이 쓴 책 이름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 그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성경에는 '그토록...'이라는 표현이 있고,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하시며 우리의 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빌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격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못한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보통 우리는 뭐라고 화를 내는가?
"하나님, 제가 그토록 기도했지 않습니까? 몇 단계나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 십니까?"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신다. 우리가 스스로 책임지고 반대하고 극복하고 이기기를 바라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조종하는 것을 절대 안 하신다. 놀랍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우리의 인격에 발언하신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에 대고 발언하시지, 우리를 조종하시지는 않는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는 것이, 조종당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조종하기 쉬운 어떤 기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종교적인 어떤 일에 헌신적이며 진심과 맹렬히 열심을 내는 것을 가지고 쉽게 신앙이 좋다고 판정을 못 내린다. 그것이 이런 이해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동참한 행위라면 그건 아주 좋은 신앙이다. 그러나 이런 인격적 관계를 떠나서 기계적인 밀접함을 원하는 것으로 그의 신앙행위가 자행되고 있으면 그건 정말 '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설득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 그 과정 없이 그런 과거 없이 믿음이라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확인 속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그런 의미에서 주문이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묶어 버리는, 다른 생각과 선택을 포기하고 스스로 옭아매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확인해서 '하나님, 당신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당신만이 저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는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믿음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상하게 여길 만큼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그냥 맹탕으로 갖고 있는 열심, '저는 죄 짓기 싫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는데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 말 들을래? 아니면 매 맞고 들을래?" 이런 선택이 아니고 "너, 내 말 들을래? 세상 말 들을래?"에서 선택을 하고, 그래서 세상을 따라 가면 당장은 좋아 보이고 당장은 신나 보이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긴 싸움을 통해서 드디어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을 갖고 와도 '싫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택하겠습니다'를 받아내시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자리에 가도록 하나님이 기다리시며 우리를 납득하시며 여백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해보고 돌아오게 하신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