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의 이 지긋지긋한 현실이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인도의 과정.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따라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신다

nazunzaro 2020. 12. 8. 09:10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따라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나 헌신 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기독교 신앙을 성립시킨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극적(劇的)이기를 기대한다. 물론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으나 소원하고, 우리에게 조건이 없지만 기대한 결과를 받는다는 면에서 기독교 신앙은 극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결과나 소원이 '시간을 뛰어넘어 이루어진다'라는 의미에서 극적이려고 한다.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우리가 소원하여 신앙을 제시하기만 하면 그 결과가 바로 이루어지는 기계적 방법을 의미한다.
우리가 간절히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단축하는 데 가장 큰 욕심이 있는지 모른다.

성경은 전부 이런 내용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것이지만 이 일은 이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나님인 시간을 가지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즉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지체하시거나 우리의 결정과 태도를 봐 가며 반응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일을 신적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차근차근 쌓아서 넘치게 하신다는 뜻이다.

마치 부부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부부란 동격이며, 합의해야 하며 존중하고 노력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한 관계이다.
여기서 많은 시간이란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많은 경우를 접하여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그 다름을 함께 녹이기 위한 여러 과정을 뜻한다. 이런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으며, 이런 경우를 통해서만 그 간격은 메워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앙은 극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극적인 반전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극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나님이 놓아 두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호세아서 본문에도 보면 호세아 본인은 전혀 그럴 맘이 없는 일에 부름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고 가르치고 싶어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어떤 길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뜻이다.

■신앙 신앙 현실은 괴롭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답이 없는 일들로 반복될 수 있다. 하나님이 왜 그 일을 요구하시는지 우리에게는 답이 없고 그 일은 어떻게 해결하고 뒤집어야 하는지 모르는 일들을 반복해야 할 수 있다. 그것이 호세아의 길이고 하나님의 종의 길이다. 이 길을 걸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해결할 수 없는 오늘을 살라고 하신다.
거기서 무엇을 병원 것일까 호세아 본문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답이 없는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그 답이 없는 상대를 사랑하여 그 사랑을 다만 답이 없는 데로 끝내기 않기로 작정하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이 왜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을 알라고 하신다.

■답이 없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라. 우리가 원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없고 진저리 치는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껴안는 연습을 하라. 매일 울고 매일 분통을 터트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러신 것을 기억하라.
자기 아들을 보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아버지의 분노와 그 분노를 넘어서는 사랑을 기억하라. 그리고 생각하라.
■우리의 오늘이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사랑인 줄 알고 감내하라.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일에 참여하라. 분노로만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분노가 사랑으로 결과하기까지, 그 분노를 분노로 만족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가 지긋지긋해하고 진저리 치는 현실을 하나님이 걸으시고 싸매어 포기하지 않으사 기어코 이루시고야 만 사랑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을 가장 중요한 데서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과 놓고 볼 때 현실이 하나님보다 늘 크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응답과 인도와 주권에 대해서 늘 불만이다.
■우리의 현실이 지닌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위하여 오늘의 현실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깜빡한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에서 도피하지 마라. 손잡고 기도만 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과 도망갈 수 없고 헤어날 수 없고 묶인 것 같은 우리 현실이, 하나님이 겪으시는 사랑의 안타까움이요, 우리를 항복시키고 알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인도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게 주문을 거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 고통이나 이해관계를 해결에 주는 분으로밖에는 모실 수가 없다.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에 동등한 내용과 사랑으로 응답 되고 채워지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이 길에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답하고 신앙으로 제대로 반응하리라 작정하고 기도하라.
그러면 이것이 우리의 고통스럽고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의 유일하고 충분한 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성육신의 길이 되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의 인생이 되며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삶이 될 것이다. 이 기적의 인생, 이 능력의 인생, 이 감사한 신앙의 길을 걷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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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사랑과 거룩과 분노와 벌하심과 안타까우심으로 찾아오는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 쉬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포기 하지 않는 하나님의 간섭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붙잡고 오늘을 이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자의 마땅한 자랑과 증거가 있는 인생 되어야 한다.

(*호세아설교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