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저 사람은 다르다. 도대체 왜 여기서 양보를 하나? 왜 질수 있나? 뭐가 그를 우리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나?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인간의 가치나 존재론 이런게 얼마나 다른가!

nazunzaro 2020. 10. 18. 09:57
우리는 자칫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현실을 놓치게 되기 쉽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답답해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한 현실이라는 걸 놓치면, 원망과 치성 밖에 남는 게 없다. 더 많이 치성을 드려 감동을 받아 내거나, 아니면 원망을 하거나, 체념해 버릴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교회사 내내 이 싸움이 교회(기독신자들) 안에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만 현실을 못보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겉으로는 공동체에 나와서는 신앙인이고, 나가서는 세상대로 살 수 밖에 없거나, 그것 밖에는 제대로 된 신앙을 이해할 수도, 어떻게 마주쳐야 되는지도 모르게 되더라, 그거다.

그래서 돌아와 이제 기도를 하는 거다.
기도란 뭔가? 함께 계셔야 하는 주님이 없어서 이제 남은 게 기도 밖에 없다, 그런 뜻일 수도 있는 거다.
'기도가 우리가 기대하는 주문이 아니다'를 확인하게 된다.
떠나가신 주님, 약속과 하나님의 뜻만 우리에게 허락한 주님, 그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부활하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안 계시는 성도들. 남겨진 건 기도.
그러면 그 기도는 분명히 우리가 보통 하듯이 하는 기도로써 받아내는 응답용은 아닐 거다.
왜?
그렇게 할려면 기도를 줄 필요없이 주께서 부활하고 해결했어야 맞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줬어야 맞지 않은가? 그렇게 안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무든 권세를 가졌다고 얘기하는게 무든 뜻인가? 이게 맨 먼저 이해해야 할 성경적인 선언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신약시대란 구약시대와 뭐가 다르며,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게 무슨 뜻인가? 신약시대는 뭐가 다른가?

이게 다르다. 예수님 이전 시대는 죽음이 끝인 시대였다. 그러나 예수 이후로는 부활이 죽음을 이기는 시대이다. 그것이 신약시대이다. 새로운 약속이다. 옛 약속 속에는 이것이 없었다,가 아니라, 옛 약속에도 예수로 인한 구원이 예언되어 있고, 약속되어 있지만, 그 때는 아직 죽음을 이긴 부활 승리가 현실과 역사 속에 사건으로는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믿음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때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어서, 그 시대는 죽음이 끝인 시대였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부터는 이제는 부활이 죽음을 이긴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 전 시대와 이렇게 대비하라는 거다. 죽음이 모든 권세를 가졌던 시대와 다른 시대, 새로운 시대이다, 이거다.

우리가 이 늘 들어왔을 텐데도 분명치 않았던 설명인데, 세상을 살면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고 그리고 들이대는 가장 큰 세력이 그거다. '너 그렇게 살면 죽어'다.
'너 약하면 죽어, 너 물러나면 죽어, 이 시대에 살다가, 예수로 인하여, "나를 믿으면 다 이겨"라는 시대에 온 것이다.

●나를 믿으면 다 이긴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옛 시대가 가졌던 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이라는 의미에서의 힘이 아니고,
죽음을 이기면 부활 생명에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해서 세상과 인생과 운명을 보라,는 말로의 초대요 약속이다.

그러니까 옛 시대가 죽음이 끝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이 전부이고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창조주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역사와 세계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아는 시대, 세계관으로, 인간의 의미와 운명을 보는 눈이 바뀌어진 시대를 살라, 그런 뜻이다.

이걸 이해하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꿀 수 밖에 없다.
그것 없이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를 하는 것은, 가운데를 비워놓고, 그러니까 현실을, 자기인생을 비워놓고, 예수 믿고 비워놓고, 죽은 다음
천국으로 묶어놓은, 가운데를 비워놓은 인생을 살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로 여기를, 세상이 전부이고 권력이고 보상인 것을 신앙이라는 방법으로 답을 얻으려는 말이 안되는 타협과 혼란의 시기를 살게 된다.

'죽어도 좋다'라는 것은 결사의 각오가 아니라, 죽는 것이 끝이 아닌, 죽음을 극복한 부활이 있는데 그 부활은 죽으면 살려준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이 끝인, 죽음이 최고의 권력인 세상이 아닌 (다른)세상을 사는 것이다' 라고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최고의 무기가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말이다.

●'예수를 산다, 내 안에 예수가 산다' 라는 것은, '예수가 오신 목적, 예수가 사는 방식, 예수가 가지신 인생에 대한 이해, 예수가 이루시고자 했던 목적으로 사는 자다' 이거다. 예수가 그런 것처럼.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사는 것과 다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려고 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본 증거로 알다시피 ●예수가 오시고 예수가 산 방식은 그냥 방식이 아니라, 원리와 내용과 목적과 가치가 다른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다'라는 것은, 무슨 신비로운 종교적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떤 꿈결같이, 어떤 이상과 종교적 보상에 의한 희열에 차서 모든 고통도 고민도 없는 둥둥 날아가는,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나 역사관이나 인간의 가치나 존재론이나 이런 모든 것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고 예수다' 하는 얘기는 '예수에게서 나타난, "인간에게 하나님이 무얼 요구하시느냐, 무얼 채우시려느냐 어떻게 하라느냐?"에 대한 완벽한 구체적 증거들, 성육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간, 섬기고 죽고 그리하여 영광의 자리로 들어간 그의 부활의 승리의 의미가 무엇이냐?"로 나를 사는 것이다'라고 얘기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런 환경과 조건을 주지 않고 승천하고 떠나버리고 성령을 보내어 우리보고 이 땅을 계속 살라고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부르사 교회를 이루신다. 교회란 건물이거나 조직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는 신약시대의 이름이다. 그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안에서 불러 예수와 묶은 자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간다는 거다. 함께!
그 '함께'가 어디까지냐? 하는 것이다. 그 '함께'는, 가장 좁게는 같은 신앙의 동지들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우리가 아직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 인생과 환경 조건을 얘기하기도 하고, 가장 넓게는 역사이다. 가장 넓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하여 가장 큰 오해가 뭐냐 하면,
이제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나가 전하여,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렇게 구원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과 달리,
사실 성경을 자세히 종합적으로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제자들이 그 증인이요, 제일차 제자들이요, 그걸 가지고 전해야 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의 구원을 허락하셨다를 전하러 간다)
우리 먼저 믿은 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은 십자가 안에서 성립된 것이다.
●우리가 전해서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두를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강요하는 데에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가서`라고 요구하는, 모든 조건, 환경, 사회, 배경 속에서 먼저 믿은 자들이,
아직도 세상이 전부인 구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앞에서, 죽음이 전부인 세상 앞에서,
'부활 생명을 가진 자는 뭐가 다른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을 목적하는가?'라는 차원에서 구별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구체적으로 이런 뜻이다; '예수 믿어 안 믿어? 너, 안 믿으면 지옥 가. 글쎄 뭐 내 말 듣고 나 따라서 기도해' 이게 신자로서의 최우선 책임이 아니라,
이 평생을 지지고 볶아서 결국 죽음으로 몰고가는 고난에 찬 인생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죽을 수는 없어서 발버둥을 쳐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윤리도 없고 이상도 없고 가치도 없는, 다만 존재를 위한 발버둥을 치느라고 악하고 미련하고 어둡게 사는 것과 구별되어서,
●그게 겁이 안나는, 모든 삶의 실존적인 시험과 위협과 유혹 속에서 그것들로 영향받지 않는, 그것으로 채울 수도 없고 그것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예수의 부활 생명을 가진 자로서는 고난을, 위기를, 유혹을, 시험을, 억울함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어떻게 감수하는가? 왜 그런가? 보상이 무언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다름인 것이다.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이는 도대체 왜? 왜 여기서 양보를 하는가? 저 사람은 왜 질 수 있는가? 뭐가 그를 우리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는가?'를 위하여 산지사방에 존재하게 되어 있다.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어 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빛이고 소금인 것이다.
그것이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저 사람은 다르다.
예전엔 그것을 한국 교회가 윤리로 주로 이해를 했다. 그러나 아니다. 윤리 정도가 아니다.
실존적인 것이다. 실존적이라는 것은, 삶의 한 가운데서 생명을 위협하고 세상의 가치로 시험하는 현장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예수가 살아간 방법으로,
'네가 남은 구원하였는데 너는 왜 죽느냐? 네가 메시야여든 내려와 보라'를 당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이 눈치만 빠른 사람들이 되고 있다. 예수 믿어서 좋은 것은 안쪽에 걸고, 세상으로 이익 보는 것 한쪽에 걸어가지고 살고 있다.
'어, 분명하게 난 크리스챤이다' 이렇게 뭐 걸고 나가서 뭐 시위를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를 세상이 보면 미련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다.
그걸 말과 명분과 시위와 어떤 봉사로 대신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우리 각자의 존재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순종해야 한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것 안다.
그러나 이 설교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무런 정치적 사회적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그네가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인생을 사나, 그가 복의 근원이다. 그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고,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는 존재이다. 그게 빛이고 소금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신자들은 이 삶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지 않은가?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기 때문이다. 믿음의 보상은 멀고, 세상의 협박은 눈 앞에 있다. 그 싸움을 평생하는 거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쓸모있는 인생을 살았나'라고 돌아 보는 것이 신자의 회상이 아니라, '결국 세상은 거짓말이었구나! 세상이 준다고 하는 보상들은 보상이 되지 않는구나!'를 알아, '맞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를 아는 자리에 오면, 그게 그게 신자의 인생의 답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더 잘 할 걸..'
그 실패없이 이 자리에 못 온다.

●(기독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보상과 목적을 삼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 너머에 보상이 있다.

그게 사도행전의 시작이다.
'자, 너희는 새 시대를 산다. 어디가서 "넌 왜 그러냐? 넌 왜 그래?" 이 싸움 하지 마라. "넌 왜 불교신자가 됐냐? 너 왜 예수 안 믿냐?" 이렇게 싸워서 네 인생을 보상받거나 증명 받으려 하지 말고, 그 옆에서, 같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살아라. 그들 앞에, "이 사람은 다르다" 그것 받아내라. 누구 비난하고 정죄해서 댕댕거리지 말고, 네 위치를 확보하지 말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감추어지고 세상에 떠밀려가는 속에서, 억울함과 누명과 오해와 욱여쌈과 비난 속에서, 너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라. 그들이 보고, "당신은 도대체 왜 우리와 다릅니까?"라고 묻게 하라'

예수님이 올라 가신다. "살아라" '아니, 올라가시면 어떡합니까?' "뭘 보고 있느냐? 너희가 본 이 예수는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힘을 다하여 너희에게 주어진 신앙의 내용들을 너희 삶에 순종하라" 
이렇게 사도행전은 시작한다.
정신차리고 긴장하고 겁을 먹고 도망가지 말고, 사도행전 끝날 때까지 집중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