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죽음을 없앤게 아니라 놔둔 채 죽음을 통과한 방법이 하나님의 뜻, 도전이다. 너도 저 높고 크고 위대한 자리에 함께 가자고 설득하는 것이 죽음이다

nazunzaro 2020. 7. 24. 23:22
예수의 죽음은 굉장히 뜻밖이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제자들도 다 놀라고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모든 무리들도 배신감을 느꼈던 그래서 분노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다.

이 죽음은 우리가 성경적 논리로 생각할 때 그 공생애에 행했던 모든 기적들과 연결해서 모순이 된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시며, 바다의 광풍을 잠재우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고서,
●죽으시면 그러면 안되는 일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희망과 기적과 약속과 영생과 진리와 복과 사랑을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한번의 사건, 한순간의 어떤 도움이 아니라 그 가치가 영원하게 만들어야 된다.
그러려면 죽음을 해결해야 된다. 그러니까 그가 죽음을 해결해야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 공감할 수 있는데, 죽음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 죽음에 잡혀 죽는다.
그것이 당시의 제자들이나 군중들이 놀랐던 대목이고, 우리에게도 사실은 정당한 질문으로 다가와야 되는데, 우리는 그 질문을 예수님의 부활, 성령강림 등으로 인해서 어물어물 넘어와 있는 셈이다.

해결해야 된다.
'십자가로 해결했잖아~' 그렇게 말하면 쉬워 보이지만,
●죽음을 해결하는데 '죽음의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죽음을 해결한다'는 건 방법상 모양상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까 성경이 여기를 어떻게 푸는지 알아야 한다. 죽음을 그냥 둘 수 없고 해결해야 되는데,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2:14)'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성경으로 억지로 풀 수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맞다. 그러나 지금은 심기 우는 것 같지 않고 죽는 것 같지 않은가? 죽음을 없애 버리거나 죽음을 해체해 버리거나 소용없게 만들어야 될 것 아닌가?
그러려면 죽음보다 더 큰 세력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죽는 것 같고 소멸되는 것 같기 때문에 예수를 못 알아보는 거다. 예수 당시 군중들은 분노했다. 앞엣 것을 안했으면 그나마 믿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대도 안했을 텐데, 그냥 우리를 살게 놔두지 왜 잔뜩 바람만 넣어놓고 이렇게 맥없이 조롱과 수치와 고통 속에서 죽는단 말인가? 이게 예수님이 죽음으로 들어간 실제의 역사고, 실제 역사적 반응이다.
지금까지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안 믿는, 기적과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어째서? 이렇게, 당연히 물어야 된다.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는 우리말 표현이 영어 킹제임스버전하고 같이 번역한거다. 거기에는 이 멸했다는 것이 destroyed로 나온다. 멸망시켰다. 그런데 원래 원문의 뜻은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뜻이다.
●죽음은 남아있는데 그 죽음이 옛날 같은 권세를 갖지 못한다. 가장 크게 무슨 권세냐? 《그것으로 인류의 운명이 되게 할 수가 없다. 비극과 절망으로 끝나게 할 수 없다》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얘기한다.

●그러면 그렇게 할 것이면 굳이 죽음이라는 방법을 쓸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다시 난다. 죽음이 끝이라면, 죽음을 소용없게 만들려고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소용없게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애초에 죽음을 명하여 '지구를 떠나거라. 없어져라'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는가?

그런 질문을 하고 보면, 실제로 구원역사가 일어난 것이 죽음을 통과한 방법이었다면,
●《죽음을 없앤 것보다 죽음을 통과한 방법》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다 그것을 더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렇게 당연히 물어봐야 한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 사망이 일어나는 이유는 죄 때문이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죄는 잘잘못에 의해서 죄가 정죄가 심판이 결정된다, 이렇게 얘기해놓고 그 다음을 이걸 설명을 하지 않은 채로 막바로 반박을 해버린다. 이렇게 반박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렇게 나온다.

●죽음이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어쩌고가 없고,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이김을 주신다. 죽음과 헛됨이 죽음의 가장 큰 내용이 헛됨인데 그 헛됨, 태어난 게 손해인 그 헛됨이 없어지고, 우리에게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로라'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죽음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준 것은 어마어마한 것인데, 거듭 다시 반복해서 얘기해야 되지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죽음을 겪어서야 이 결과를 만드느냐?`하는 건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 우리는 이 일이 일단 여기에서 시작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생각에는 죽음을 이길려면 죽음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된다 그건 우리에게 당연한 생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의 당연한 생각에 도전하시는 것이다
그게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까닭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그대로다.
이사야서 53장 1장,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누가 믿었느뇨? 누가 상상을 했느뇨? 누가 하나님이 이런 모습으로 찾아올 줄 기대했으며 이해할 수 있었겠느뇨?'로 왔다.
초라하게 와서..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아주 쉽게, 하나님이 오시면, 그 초월하심, 우월하심, 그 위대하심, 그 권능으로 찾아오실 것으로 생각했지,
우리에게 하나도 어떤 위압감을 주지 않는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형편과 조건 속으로 들어올 줄 아무도 몰랐다. 우리의 기대와 달랐다.
그리고 이사야 6장을 인용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이다;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제가 가겠습니다'
'너, 가라. 그러나 하나 알아둬라. 네가 하는 말 아무도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듣고 회개할까 봐 겁난다'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응답이 예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십자가에서 보듯이 왜 이 앞에 기적들을 행하신 이가 죽음을 감수하셔야 되느냐? 죽어야 되느냐?`에서 우리가 턱 막히듯이,
우리 현실, `왜 예수를 믿는데 안 믿는 자들보다 더 고단하냐? 내가 뭘 잘못했냐? 하나님은 왜 일을 이렇게 하시냐?`라고 우리 앞에 턱 막히는 이 현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말하는 거다.

■'너희는 봐도 모른다. 너희는 들어도 모른다. 너희들이 알고 깨닫는 수준에 타협점을 요구하지 마라. 너희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 우린 이걸 쉽게 `하나님을 안믿고 자기를 믿었어`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와 이상, 우리가 가지는 가장 완벽한 요구보다 더 비교 안되게 너무 높아서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선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걸 적나라하게 보이는 거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이가 어째 사람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도전하고 계신다. 도전이시다.
왜 그렇게 도전하신다고?
하나님은 우리가 한 반응과 우리가 한 결정을 하나님의 일하심에 수용하시기로 하신 거다.
우리가 결과시킨 죽음을 하나님이 들어와 경험하시고, 우리의 형편과 우리의 못난 자리에 당신의 이해와 공감과 참여를 이렇게 낮춰 내 옆에 온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한다; '나와 함께 내가 너와 함께 있는 자리까지 온 것같이, 너도 나와 함께 저 높고 저 크고 위대한 자리에 함께 가자' 그렇게 설득하는 것이 죽음이다

히브리서 4장에 의하면, 하늘 보좌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는 우리의 고난을 체휼하신 분이다
체휼이란 뭐냐? 번역이 자꾸 부드러워져서 원래의 의미가 자꾸 죽는데, 육체로 경험하신 분이다. 육체로.
우셨고, 고통을 호소하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표현한. 신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닌 고백을 하신 자리까지 내려온. 그래서 우리가 자초한 우리가 만든 최악의 자리에 들어오신. 그 죄의 삯의 자리를 통과하여 우리를 모두 통과시켜 끌어안는 하나님의 호소. 하나님의 자기 설명. 나는 너희에게 이런 하나님이다 하는 말씀을 역사에다가 일으키신 거다. 그것이 기독교이다

우리의 삶이 죽을 것 같아서 밤낮 원망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죽는 것이 삼키워지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신비라고 배운다.
그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 되어야 한다.
서로 격려하고 이 역사와 인류의 운명이 신자된 우리 손에 있는 줄 아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충성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주 앞에 무릎 꿇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야 한다.

(*다보요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