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기쁨으로 받는 최고의 영광, 최고의 명예, 최고의 가치를 선택하는 자유의 보상인 것이다

nazunzaro 2020. 7. 22. 13:31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그 명령에 이렇게 반발한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몰라서 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 이해와 안 맞는다. '하나님 뭐하고 계시다가 이제 와서 여기와서 하자 그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다라는 우리 해석은 원래 원문의 뜻으로는 영어의 be동사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로 쓰는. '나는 스스로 인 하나님이니라. 나는 언제나 하나님이니라. 네가 아니라고 그럴 때도 나는 하나님이었고, 네가 나를 외면했을 때도 나는 하나님이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울부짖을 때도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그가 창조한 그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는 우리가 별 것 아닌 것로 보는 우주와 역사와 인생과 모든 경우들 속에 하나님으로 준비하시고 약속하시고 보내시고 이루시고 결정하시고 그리고 지금 직접 빚고 계신다.

그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것이 나를 다시 격발시키며 다시 일어서게 하며, 믿음의 자리에 서게 한다.
이런 도덕적인 완성으로, 윤리적 안심으로 머물 것을 하나님이 타헙을 거부하신다.
`더 가야 된다. 사랑해야 된다` 여기가 어렵다.

로마서 5장에 가보면 그 말씀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자, 얼마나 우리가 좋아하는 말들이 많이 나오나 보라. 화평, 믿음, 은혜, 영광, 즐거움, 이렇게 다 약속이 되어있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환란, 연단, 인내는 비로소 그 후에야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다시 사랑이 언급되는 것은 의지를 가진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거다. 의지를 가진,
어떤 것보다도 가장 큰 의지를 가진 것,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기어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까지 끌고 가겠다.
그리하여 무슨 환란이 있다? 보이는 세상에서의 환란이 아니라, 죄가 사망이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질서만이 아니라, 매일 닥치는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과 내 한계와 내 무능만이 아니라, 내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완성하지 못하는 나,
그래서 울부짖는 나, 매일 `나는 아닌가 보다` 라는 절망과 비명까지 일을 한다는 거다.

뭘 하나? 예수 믿는 거니까 중간에 큰 위로를 받고 성령의 체험을 하고 하는 것들은 다 어떤 위로, 어떤 격려다.
■그걸로 내용이 다 차는 법은 없다. 내용은 이것, 나이로 차는 거다. 하고, 하고, 하고, 하고, 또 해서 드디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히 바뀐다.

왜 이런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로마서 8장 본문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영광의 자유. 사랑은 자발성을 가져야 된다. 그것은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굴복일 수 없다.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우리의 결정에 우리의 반응에 순종하신다. 우리를 죽이신다. 그걸 감수하신다.

왜 사랑이 자꾸 등장하는가?
그 사랑이 어떻게 그 열매를 완성하는가? 그 과정에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항복시키시는가?
이게 기독교 신앙, 신앙인생이다.

마음먹은 만큼 안된다. 명분으로 정답으로 알고 있는데 안된다.
어떻게 알게 되니? 세상이 하는 것, 세상을 따라간 것이 헛되고 무가치하고 부끄럽다고 배운다. 부끄럽다고.
`내가 보상을 못받아도 좋습니다. 난 부끄러운 인간이 되지는 안겠습니다`라는 성숙한 많은 경험에 의해서 알게된 하나님이 우리를 힘으로 무슨 보상으로 부르는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인생 속에서 배우게 된다.
■하나의 득도가 아니다. 너무나 많이 매일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를 받는 하나님의 인내, 권능 아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매일 이렇게 볶고 있는거다.
우리가 다만 원하는 평안, 형통, 안심, 무개념, 그것을 놔두지 않는다.
사랑이니까. 사랑으로 볶으신다. 우리를 위하여 볶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순종으로 나가는 것이 규칙도 방법도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아는 자리에 온다.
순종.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그 앞에 기쁨으로 나를 맡기는 것 그게 순종이다. 사랑의 행위이다. 사랑의 행위. 순종.

우리는 다 이 문제를 고난이 뭔지?
왜 예수님이, 히브리서 5장 8장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이라는 표현으로 소개되고 있는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때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기쁨으로 받는, 겟세마네의 시험을 이겨, 그것은 시험을 보고 점수를 받는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늘 얘기하는 진심과 희생과 눈물이라는 신파적인 표현이 아니라,
■최고의 영광, 최고의 명예, 최고의 가치를 선택하는 자유의 보상인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는 매일 살면서 이 시험 앞에 서는 거다. 이 연단 앞에 서는 것이다. 이 소망을 향하여 하루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 즉 소망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으로 안다고?
로마서 5장 8절에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사랑이 우리를 안놓는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뭐라고 정의하나?
오랜 고통, 이기적이지 않는 것, 온유한 것, 무례이 행하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허락하는 것. 이 사고 재앙을 허락하시는 것. 우리 인생을 허락하시는 것,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이 여기를 촛점으로 갖고 계신다. 나를. 나의 항복을. 그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 없음과 하나님 있음을, 인격과 가치와 만족에서, 명예에서, 영광에서 비교해 보라고, 확인해 보라고.


■`너는 다만 재앙을 당하지 않고 그냥 한 평생 쉽게 살고 말면 다라고 생각했느냐? 네가 그렇게 간단한 존재인 줄 아느냐?`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꾸중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돌아봐야 되는 것이다


조건의 문제도, 능력의 문제도, 비교의 문제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선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하루가 그 기회라는 걸 알아서 울며불며 영광의 길을 가고 있다고 아는, 신자의 인내, 믿음 순종이 더욱 더 커져나가야 된다.



기도.
하나님 사랑의 성실하심 능력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함없는 거룩하신 의지, 매일 찾아오시는 성실..
우리도 그리 반응하는 귀한 인생 하루가 얼마나 명예로운 시간인지를 아는 감사가 넘치는 그런 신앙의 길을 걷는자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