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는 안심과 확신을 하면, 그 순간 기독교는 창조와 약속의 영역을 포기하고, 자기의 기대와 만족 속으로 딱 오그라 붙는다. 하나님의 정의는 섬기고 지라는 거다

nazunzaro 2020. 6. 29. 10:10
요즘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인 화두, 주제, 관심은 정의. 정의이다.
세상에서는 정의를 뭐라고 규정을 하느냐 하면 이라고 규정을 한다.
누군가 손해보지 않는 것, 똑같이 기회와 보상을 받는 것. 그래서 정의를 실행하려면 불법을 행하려는 자들이나 또 너무 독점을 하거나 경쟁의 우위에 서있는 자들의 더많은 이익들을 그 법이나 사회적인 어떤 장치로 제악을 가해야 한다 하는 것들이 정의를 이해하는 세상적인 이해의 한계이다.

그러나 성경은 정의를 평등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섬기고 져라》라는 말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결코 권력을 가지고 우위에 서거나 권력으로 인하여 그 아랫사람들을 장악하고 조종하는 것을 한번도,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디를 뒤져봐도 성경에서는, 아니 하나님 자신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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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결국 우리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안심과 확신이다. 우리가 원하는 그 확신이라는 건 얼마나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우리가 확신을 하면 그 순간 기독교는 창조와 약속의 영역을 이렇게 포기하고, 자기의 기대와 만족 속으로 이렇게 딱 오그라 붙는 거다.
그게 바벨론 포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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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항복과 공감을 요구하고 있다' 라는 부분에서 우리가 헷갈리는 거다.
'우리가 빨리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쓸모 있기를 바라지 않고, 이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대부분 우리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안심과 확신이다. 우리가 원하는 그 확신이라는 건 얼마나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우리가 확신을 하면 그 순간 기독교는 창조와 약속의 영역을 이렇게 포기하고, 자기의 기대와 만족 속으로 이렇게 딱 오그라 붙는 거다. 그게 바벨론 포로다

우리가 계속하는 기도가 뭐라고?
'회개합니다'라든지, 뭘 이렇게 많이 늘어 놔도 결국은 `내가 편하게 해 주십시오`에 불과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넌 내가 누군지 그래도 모르겠느냐? 네 인생이 너한테 기회이고 네가 책임져야 하는 과정이라는 걸 모르겠느냐? 이때를 놓치면 안 돼. 너 정말 못 알아먹겠느냐?"
그렇게 꾸짖으셔서, 우리가 자식 꾸짖다가 맨 마지막에 주는 벌이 뭐냐? 집에서 내쫓는 거다. 성경은 그 얘기하는 거다. 기가 막힌다. 그러니 `부모가 날 버렸나 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가서 다른 집을 가보니까, 집 밖을 나와보니까 거기는 사람이 살 수 없더라는 걸 바벨론에서 깨닫게 된다. 바벨론에서. 그들이 믿는 신은 , 그러니 을 발견한다.

'우리 하나님은 진짜다. 그것이 무슨 정치력, 경제, 국방, 교육 이런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이렇게 높게 정해 놓으시고 목적하시고 일하신 우리 아버지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그 바벨론 포로는 출애굽 이상으로 중요한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삼킬 것이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 백성들은 결국 포로가 되고 나라가 망할지언정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족속이니라`라고 여기 하박국 1장에 선언을 한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요즘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인 화두, 주제, 관심은 정의. 정의이다.
정의를 뭐라고 규정을 하느냐 하면, 세상에서는 평등이라고 규정을 한다. 누군가 손해보지 않는 것, 똑같이 기회와 보상을 받는 것. 그래서 정의를 실행하려면 불법을 행하려는 자들이나 또 너무 독점을 하거나 경쟁의 우위에 서있는 자들의 더많은 이익들을 그 법이나 사회적인 어떤 장치로 제악을 가해야 한다 하는 것들이 정의를 이해하는 세상적인 이해의 한계이다.
●그러나 성경은 정의를 평등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섬기고 져라》라는 말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결코 권력을 가지고 우위에 서거나 권력으로 인하여 그 아랫사람들을 장악하고 조종하는 것을 한번도,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디를 뒤져봐도 성경에서는, 아니 하나님 자신마저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오심의 가장 놀라움은 그가 아무런 폭력도 공포도 행사하지 않는다는 데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시는 자기증명과 그 책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있다.

●세상에서는 우리만이 질 수 있다. 우리만이 봉사하며 희생하며 지며 줄 수 있다.

성경은 종이었던 자 보고 '너, 꼭 자유인이 되라 '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여자들 보고 `나 억울하다, 그러지 말라. 너 억울하지 않다`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 한국에 살아서 억울하다`그렇게 말 안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존재의 명예와 복의 어떤 장애도 손해도 끼치지 않는다`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다. 神正論이다.
그 정의를, 우리가 정의라는 말 자체를 오해했기 때문에 `보상받아야 한다, 손해 볼 수 없다`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세상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얻는 어떤 권력과 이익을 믿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보상해 주십시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불평과 원망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멸망이 왜 있었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우리 안에 무엇을 채우고 싶은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때보다 더 많이 더 지극히 더 정성을 다하여 일하신 때는 다시 없었던 것이다.

신약에 오면 예수께서 성자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 손에 죽으시고, 우리의 저주와 모욕을 감수하시고 우리를 사망을 지나 부활로 인도하신다. 길을 내신다.
"내가 앞서 간다. 따라 와라. 무덤이 끝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기독교 아닌가?

우리의 인생의 현시점, 뭐라고 뭐라고 핑계 댈 필요 하나도 없는, 과거나 미래나, 나라나 경제가 아니라, 우리의 지금 시점 지금의 자리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 신자는 섬기고 지는 그게 하나님의 정의이고 뜻이라는 이 믿음으로 살리라) 이게 우리가 살아야 되는 유일한 근거며 힘이며 방법이며 명예며 권리이며 힘이다.

그 인생을 살아내는, 그래서 우리 마음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안 믿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감수해 내는 위대함과 명예로움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기도)
●예수께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길이다.
섬기고 지고 용서 관용하고 참고 기다리는 길.. 온유 겸손의 길..
그러나 이 길은 세상은 이해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하나님이 목적하고 기뻐하고 우리에게 채우는 하나님의 권능이고 하나님의 복이다.
이 인생을 살아 내는 우리들 되어가야 한다.

(*예10강 202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