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에 많은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지마는 결국 중간에 찾아오는 것은 이거다: '메시야가 왔는가? 내가 믿는 그 예수가, 내가 기대하는 그 예수가 맞는가?' 라는 자리에까지 오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현실인 이유는(우리가 겪는 실제 현실이 어떠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의 십자가로 한 것같이,
●우리가 신앙을 완성하고 확인하는 방법도 이 절망을 극복하는, 이 절망의 자리를 통과하는 과정을 가진다 그 말이다.
(우리의 기독교신앙은 절망의 자리를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서 확인되고 성장한다)
모두가 넋이 빠지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자리, 심지어 그를 죽인 로마의 병졸들 마저도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이 신의 아들 아닌가? 왜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죽은 자까지도 살려냈는데 당신은 왜 죽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
그것은 다만 조롱이 아니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예수가 부활 후 사십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였는데, 한꺼번에 오백명 앞에서도 자기를 나타내시고 부활을 증언하셨고, 제자들은 옛날보다 더 큰 셀레임 속에 있었다. 사람을 살리고 모든 병을 낫게 하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런 일이라는 것은 보도듣도 못한 상상도 못했던 일 아닌가?
그랬던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다. 환장할 노릇이다.
십자가를 지실 때보다 더 놀랍다. 한번이면 됐지 않았는가?
교회에 설교 들으러 오면 생각을 해야 되는 거다.
왜? 우리의 신앙의 현실이 생각을 안할 수 없다.
이런 많은 우여곡절과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어 목숨걸고 매달린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지 않는 현실에서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건 생각 없이는 믿을 수 없다.
●생각해야 된다. 기독교는 呪文도 아니고 복권도 아니다. 한 인격과 思考와 선택과 결정이라는 귀한 책임을 이루어 나가는 기회이고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 부분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도전이 되고 고민이 되고, 생각하고, 울고불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이 늘 쉬운 빈대떡 사먹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간단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이 거룩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의 경지를 요구하고 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확인하고 만족하지 않는 한 행복은 없다. 돈이 많고 건강하고 누구에게 부러움을 받고 사는 것은 결코 행복이 되지 않는다. 변명이다.
행복은 우리가 아는 존재의 맨 중심에 있는 영혼, 우리의 마음, 인격, 이런 것들의 항복과 넘치는 확신에 있다.
그 부요함을 성경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을 다른 것으로 팔아먹지 못하게 한다. 형통, 단순함, 쉬운 것으로 팔아먹지 못하게 한다.
거기가 복잡하다.
우리의 잘못으로 우리 인생이 힘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쉽지 않은 곳으로 데려오고 있다.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것, 딱 하나다.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전도해라, 선교해라 이렇게 서둘러 가는 것은 여기에서 순서가 너무 건너 뛴다. 가운데가 너무 비어있다.
예수가 떠난 후 제자들이 이런 기도를 한다. 뭘 하나 보라. `헤롯과 빌라도의 권력을 무너뜨려 주옵소서`라고 하지 않는다.
헤롯과 빌라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나님이 보낸 악역을 맡은 자들이다. 예수를 못박은 자들이고 지금도 예수의 일을 증거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시는 방법이다. 핍박 속에, 적대 속에, 오해 속에 이 일을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하신 약속 그대로 이다.
우리 현실은 이것이다. 누가 큰소리를 치는가? 세상의 것으로 힘은 삼는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비난한다.
예수 믿는 자들은 뭘 원망하나? `하나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권력을 갖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진 자가 되게 하옵시고 우리가 우월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는 빌라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왜? 빌라도는 우리한테는 개똥같은 놈이다. 아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빌라도에게 안 나타나시고.
왜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총독이 되고, 왕이 되고, 권력을 가지고 더 가져야 되고 더 똑똑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기독교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나? 시험봐서 가는 건가? 석차로 하는 건가? 키로 재나? 몸무게로 재나?
그렇지 않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를 만나셔서 우리는 붙잡혀 있다. 복된 붙잡힘이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편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신이 인간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누구에게는 안 나타나셨다고? 빌라도에게는 안 나타나셨다. 우리에게는 나타나셨다. 주일 날 교회에 앉아 있으면 제정신으로는 못앉아 있는 것 아닌가?
주일 날 왜 교회에 나오나? 신앙이 좋아서 나오지 않는다. 다른 데 가면 불편해서 그런다. 등산을 가면 굴러떨어질 것같고, 놀러나가면 무릎팍이 깨어질 것같아서. 그래서 일단은 고개를 한번 내밀고 가야 안심이 되어서. 주일날을 빼먹으면 불편한 거다. 그건 복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그래서 다 신앙행위인 것이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원망이고 반발이지, 없는 자는 그런 것도 못햐다. 그게 우리이다.
●이러한 중요한 이해 - 하나님이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세력들을 놔둔 채, 그들과 함께 우린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며 하나님의 선교를 완성하며 하나님이 자녀들을 완성시킨다는 사실이다.
이걸 초대교회가 알고 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원하는 것 같은 일로는 오시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항복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통하여서 일한다고 확인시키기 위하여 오신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지금의 갈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표가 되는 것이다.
●저 믿지 않고 세상의 것으로 안심하고 있는 자들은 자기 인생이 뭔지 모른다. 늘 상대적인 우위를 확인하는 법 외에는 없다. 나는 가진 자, 나는 배운 자, 나는 승자, 이런 것 밖에 없다.
우리도 차츰 더많이 경험하겠지만, 이기는 것, 가지는 것, 이런 것들로는 인간의 영혼이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필요없다, 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운명과 가치와 확인에 있어서 아무런 중요함이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결국 돌아보면 억울하지가 않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이런 중요한 일로 오신다.
예수의 오심은, 보이는 한 인격과 존재로써,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세상의 죄와 사망과 왜곡과 그리고 절망의 그 조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극복하여 뒤집는가를 보이시는 보이는 존재로 오시는 거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인생을 사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였으나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그가 죽음을 뒤집어 엎어 부활하심으로써, '이제는 사망이 끝이 아닌 시대를 내가 연다' 라는 보이는 증언과 보이는 운명을 만들어 내시는 이로 오신다.
● 성령은 각각의 한 개개인의 영혼에 찾아오셔서 [우리 자신을 바꾸고 완성하는 일]을 하신다. 그러니까 성령충만은 밖으로 나타난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증명을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살아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 능력이 어떻게 세상의 권력 폭력 왜곡을 꿰뚫고 살아내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를 우리에게 격려하시며 증언하시며 붙잡고 계시며 계속 일하고 있는거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증언이다. 부활과 성령이다.
그러니 이러한 일은 로마서 8장에 가면 이렇게 우리들에게 격려하는 말씀들과 연결해서, 오늘 우리의 삶에, 매일 기도할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큰 위로로 다가와야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일대 선언이다. 우리 믿고 참여하는 것 이전에 발표된 선언이다. 이제는 어떤 세상이 되었느냐?
`예수님 오시기 전의 세상은 말하자면 끝이었다. 사망으로 끝나는, 헛됨으로 끝나는,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세상의 운명이었다면,
예수 이후로는 사망이 끝이 아니고 모든 절망과 모든 헛된 것과 모든 왜곡과 모든 실패마저도 결국은 승리로 끝나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느니라`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우리는 아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죽음이 최고의 권력이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라'.
예수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자랑이 뭐뇨? 마지막 날에 이김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김을 주신다고 죄가 다 실패와 패배와 멸망을 명하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 신앙은 그것이 최고의 권능이 되지 않는다. 생명이 이긴다는 거다.
우리의 오늘의 분노, 의심, 탄식, 괴로움, 막막함 모두가 세상에서는 이렇게 얘기했던 것이다. `너, 내 말 들어. 내 말대로 안살면 너 죽을 거야. 너 여기에서는 그렇게 못 견뎌`
그 말을 따르면 안심과 행복과 가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따르면 우리가 본 모든 사람들의 행하는, 있는 것이 전부인, 방탕하게 살고 책임없이 사는 것이 전부인 실컷 본 꼴을 따라갈 뿐이다. 겁을 주는 거다. 죄가 사망이라는 권력으로 우리에게 겁을 주는 거다. '내 말 들어. 내 말 들어' 이게 헛된 인생을, 허무한 인생을, 생각없는 인생을 만들게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겁내지 마. 네 실패가 끝이 아니야`. 세상은; '넌 결국 죽을거야 넌 살아도 쓸모가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지금 너한테 일하고 있어. 네 눈물과 한숨이 손해보지 않을거야. 네 절망이 끝이 아니야`. 이것은 기독교가 하는 약속이다.
우리의 지금의 신앙 상태나 신앙의 지위가 얼마나 높고 얼마나 확신에 차있느냐는 두번 째 문제다.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을 만큼의 진정성을 가진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약속이다. 아멘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다.
부모를 가지면 이런 자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민하다 고민하다 안되면 어떻게 하나? 집에 가서 엄마한테 얘기하고 두들겨 맞으면 엄마가 알아서 해결하시겠지 그런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두들겨 맞지 않는다. 벌을 주지 않고 심판하지 않는다. `많이 배웠지? 다음엔 더 잘나게 해봐` 이런 격려를 듣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과정들이고 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로마서 12장에 가서 이런 유명한 격려를 요구를 받고 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오늘 사도행전 4장 본문에서 본 내용이다.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사실 때문에 온갖 위협을 받고 모함을 받는다.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그 얘기를 하자, 모두가 함께 뭘 확인했다고요?
`악당들이 악한 역할 하듯이 우리는 우리 역할을 하게 힘 주시옵소서`그렇게 얘기하지, `저 악당들을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안한다. `우리가 더 큰 힘을 갖게 해 주옵소서` 안한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당을 제거하는 일에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악당들이 하는 것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선한 일을 해야한다. 예수 믿는 자의 다른 것이다.
●예수 믿는 자의 가장 다른 게 뭔지 아는가? 용서하는 것. 누구를 내가 고칠려고 할 필요 없다. 내가 잘해야 된다.
남포교회에는 유명한 표어가 두개 있는데, 하나가 '너나 잘 해'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은, 선한 것으로 악을 감동시키거나 설명하거나, 제거하지 말라는 거다.
선으로 악을 감동시키지 말라고. 악과 싸워서 그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우리가 시험을 받는다.
그건 걔가 하게 놔 두라고. 우린 우리가 할 일을 해야 된다.
우리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자꾸 상대방 탓으로 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안해도 된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어떻게까지 하라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러나 꼭 거기까지는 안나가도 된다. 나도 잘 못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역할은 알아야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지, 사망을 이기고 있다는 게 뭔지.
세상은 우리에게서 뺏아갈 것이 없다. 우리를 위협할 뿐이다. '너 그렇게 살면 안돼'..
그렇지 않다. 진정한 행복은, 진정한 자랑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자비하고 성실하심을 아는 것까지이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예수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기쁨으로 충만해서 사실 다른 아무것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 우리의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세상 앞에 빛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이 일, 저 일을 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시지 않으며 조작하지 않으시며 강요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항복한 자리만큼 따라오라 그런다.
열 번의 기회에 한 번 하라. 열 번의 기회에 두 번 하라. 한 걸음씩 나아지라.
세상이 요구하는 `너 그렇게 하면 안돼. 네가 착하게 굴고 네가 지면 다 와서 너를 물어뜯을거야`. 그래서 우리가 겁이 나서 못한 것들을 후회하는 자리까지 하나님이 용납하신다.
해 보면, 악하게 굴면, 남는 게 없다. 약삭빠르게 굴고 거짓말한 것은 남는 게 없다.치사하고 야비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스스로가 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증언한다.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영광이냐? 그것이 무슨 자랑이냐?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이 뭐냐?` 이렇게 묻는다.
세상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것 밖에 할 게 없다. 속이고 빼앗고가 전부이고, 그러나 우리는 빼앗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결국 세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를 짓밟아서, 누구의 것을 빼앗아서 우리를 채울 존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만이 우리를 만족시킨다.
그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사도행전이 기록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합의해야되는, 공감해야되는, 항복해야 되는,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지혜 권능이다. 우린 그길로 왔다. 내일도 오시라.
우리의 인생을 진지하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내는 귀한 발걸음들로 하루하루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선택하고 울고 후회하고, 그래서 하나씩 더 나아지는 인생을 살아가며 이 끝은 실패할 수 없다고 믿는 우리들 각각의 진지한 인생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예수를 믿게 하시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이름을 주셨다. 우리가 다 세상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나, 예수 안에서 복된 자인 것을 말씀으로 확인한다.
우리가 하는 분노와 원망이 있는가? 한탄이 있는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은 절망이 있는가?
하나님이 그 모든 것 안심시키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복되고 영광된 자리로 우리를 불렀다는 것 알게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믿음 갖고 오늘을 견딘 것처럼, 내일도 하루 견디게 하시고,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우리 모두의 입술로 항복을 주실것을 믿는다.
나와 나를 아는 이웃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에 놀라움과 하나님 앞에 찬송과 무릎꿇는 일들이 일들이 일어나는
기적된 인생이 되고 그 자랑을 나누는 우리들 교회 되어야 한다.
(*박영선목사, 2018.08.24. 본향교회 사경회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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