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애굽을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만,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은 본인이 책임과 실력을 가져야 되는 것

nazunzaro 2020. 2. 15. 10:32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꺼내는데 중요한 관건은 바로가 회심하는 게 아니라, 모세가 성숙해야 되는 거다. 희한한 일이다.

그 거절을 하던 모세는 회심을 하게 된다.

백성들은 '우린 못 살겠다' 계속 그런다. 계속 그 거절, 하나님 앞에 거절이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모세는 온유하게 그 모든 걸 감수한다.

어떻게 감수할 수 있었을까? 자기도 죽어났었으니까. 사십년 미디안 광야시절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원망하고 원망하다가 나중에 잊어버렸거든. 그런데 그게 하나님이 자기를 담금질하고 담금질하고 담금질했다는 걸 이제 알게 됐다. 그래서 그 모든 걸 견딘다. 심지어 금송아지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까지 얘기한다. '이것들 다 진멸하고 너로 내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 모세가 뭐라했죠나? '하나님, 그러려면 저도 죽여주시옵소서.

그렇다. 아주 굉장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구약에는 모세에게서만 나오고, 신약에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내 골육 내 친척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그렇게 말을 한다.

 

● 우리가 말 한마다 한마디에 '넌 왜 믿음이 없어? 넌 왜 그 꼴이야?' 이런 말들을 자주 주고받는데, 문맥을 모르면서, 상대방의 사정을 모르면서 이런 말들로 밖에는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뭐가 없기 때문인가? 성경이 한 사람을 항복시키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기다려주지 못하는 데가 있다. 이걸 서로 좀 알고 있어야 된다. 이런게 우리에겐 없다는거다.

따뜻한 말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두렵다. 왜 이런 길을 걷나..?

 

지금 모세의 생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모든 바로의 어떤 폭력과 그리고 광야 사십년을 백성들과 지나는 모든 앞이 안보이는 위기들, 가데스바니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다 죽게 되었다. 다 죽어버리고 말 뺑뺑이를 돈다.

그런 현실상의 이런 답이 없는 길을 걷는 것이 다만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성경이란 말이다

생각을 가다듬어야 될 필요가 있다.

모세가 자기의 인생에서 자기가 받은 거부, 자기의 그 인생의 모든 조건들이 거부로 얼룩져서 자기가 하나님을 거부한,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거부하는 바로 앞에 세워서, 모세를 거부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최고의 권능과 기적으로 불러내는 이 사건에 모세가 주인공으로 서서,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과 함께 죽는다는 거다.

그들은 실패해서 광야에서 죽고, 모세는 성공해서 들어가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지만 모세는 못들어가는 식으로 만듬으로써, 이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에 모세의 역사적 위치가 있는 것이다.

 

모세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이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 나를 이 백성을 위하여 세웠는데 이들이 실패했습니다. 나 혼자 살아나가는 것은 수치입니다. 같이 죽는 게 명예입니다. 네,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는 거다.

멋있지 않나? 모세가 멋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멋있다. '저 안 믿는 것들 다 버리고 너만 와' 이렇게 안하시고, '이것들은 내가 이대로 들여보낼 수 없다. 그러면 너도 같이 가서 죽어라'

'맞습니다 하나님, 부하들 다 죽이고 저혼자 오면 그게 무슨 수치입니까? 명예로 죽겠습니다 하나님, 기꺼이 같이 죽겠습니다' 그러는 거다.

 

그럼 이게 말이 되나?

모세가 죽는 것은 살아있는 것보다 더 큰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이기고 승리해서 가지는 결론보다 더 큰 게 모세의 죽음으로 인하여 성경이 압축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 가나안 입국에서 실패하여 광야에서 죽고 마는 것이 우리를 위한 거란다.

그들이 거기서 죽은 것은 실패 아닌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는, 그 역사가 담은 교훈과 준 유산이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모세의 가치는, 이 실패한 사람들과 함께 죽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사람이 그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다는 보증으로 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했을 때 기억하자. 모세를 함께 죽임으로써, 실패한 자들이 '나는 실패해서 망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에 모세가 함께 있음으로써, '내가 완전히 망한 게 아니구나'라고 증인을 세우고 있다 그런다.

 

광야의 실패는 누구에게서 일어났느냐? `애굽을 나온 자에게서 일어났다` 이거다.

●애굽을 나와서 실패한 건 뭐냐? 애굽을 나오면 가나안을 들어가야 된다 이거다. 출애굽은, 애굽의 노예의 자리에서 해방된 것이 구원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해야 되는 첫 발자국이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애굽을 나오는 첫걸음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첫걸음이어야 되는데, 그들은 그들이 받은 구원의 목적지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실패했다, 누가 광야의 시체가 됐냐? 애굽을 나와서 시체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하는 거다.

 

● 그러니 잘잘못의 문제가, 내가 시작이 틀렸다가 아니라, `시작을 했는데 목적지를 못가고 있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어느 기독교 역사 속에나 구원파가 있다. 구원파란 뭐냐 하면 `애굽을 나오면 곧 구원이다, 애굽을 나오면 곧 가나안이다`이렇게 말하는 것이 구원파다. 거기엔 광야가 없다. 왜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광야가 있어야 하느냐? 그럼 이 광야가 없다면 홍해만 건너면 가나안이라면 얼마나 쉬우냐? 그러니까 이제 구원파에서는 제대로 된 구원을 받으면 죄 안짓는다는 거다. 마음이 늘 평안하다는 거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 구원은 분명히 받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 구원의 감격이 있는 분들 알겠지만 구원받고 한 삼개월쯤 평화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부흥회가고 다시 확인하고, 다시 부흥회 가고 다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면 약효가 점점 떨어진다. 3개월 가던게 2개월 가고, 그 다음 나중에는 내가 정말 홍해를 건넌게 맞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구원파는 거의 예외없이 한 삼년이면 다 나온니다. 그게 아니거든.

 

●홍해를 건넜더니, 애굽을 나왔더니, 곧 가나안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분명한 목적을 갖고 광야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출애굽 사건을 돌아보면, 애굽을 나오는 열가지 재앙에서나 광야생활에서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진다. 열가지 재앙도 홍해를 가르는 것도 만나도 메추라기도 불기둥도 구름기둥도 다 하나님이 하신다. 원망하면 즉각 즉각 다 주신다.

그런데 가나안을 들어갈 때만은 백성들이 결정해야 되는 거다. 거기엔 하나님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들이 `못들어간다` 그러자, '그럼 너희가 결정한 대로 죽어라'가 된다.

 

●애굽을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만,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은 본인이 책임과 실력을 가져야 된다.

가장 크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자유를 알아야 된다.

우리 신약성경에도 구원은 자유와 직결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5장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으니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이렇게 된다.

그런데 자유란 마음대로 할 권리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성숙을 말합니다. 어떤 책임? 선택을 책임지는 것.

구원은 선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책임을 지는 성숙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어디서 죽느냐?

헤매다가 다 광야에서 죽는다. 가나안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사십년을 걷게 된 내내 뭐는 계속되는가?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기둥 불기둥이 계속된다. 거긴 구원받은 데이다. 거기서 죽었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어, 책임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대표적 이 개념들은 인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것은 자발적이어야 된다. 그러니까 자유는 모든 권리를 줘야 하고, 그 대신 자기가 자기선택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져야 된다.

 

●우린 여기를 헤맨다. 은혜와 책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구원이 일어나고 왜 만족한 현실을 살 수 없는지, 우리가 이 실력을 길러야 되는데, 이 실력을 훈련받는 곳이 온갖 역경 속에 있다. 여기가 어렵다

 

이걸 잘 대표하는 사람이, 이 자유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바울에게 아주 충만히 있다.

오늘 모세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모세가 여기 함께 죽음으로써, 여기서 죽었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 비극이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다.

우리의 생애가 후손들에게 다만 교훈이 되지말고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 승리자가 되라.

 

이 비극적인 교훈으로 쓰이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예수를 죽인다. 신기하다

●인간이 저지르는 최고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게 아니고, 예수를 죽이는 거다. 신을 죽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걸, 그걸 품는다.

 

이 길을 잘 걸어야 된다. 이 문제는 히브리서에서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6장에 한번 구원얻고 타락하면 그다음엔 방법이 없다고 나온다. 여기서 하는 얘기는 이거다; '출애굽은 되돌릴 수 없다'

홍해를 가르고 백성들이 다 나온 다음에 다시 물이 덮혀서 애굽병사가 다 죽고 돌아갈 때는 안 열어준다. 거기 광야에서 죽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노하셨나?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인데, 누구냐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다. 애굽에서 나왔으나 광야에 밖에 못왔다.

 

●이 얘기를 왜 하냐? 우리에게 기독교신앙이란 앞으로 갈 것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라. 더 나라가라. 그런 얘기를 한다

이제 안타까운게 이거다.

더 나아간다는 게 뭐냐? 불신자들은 할 수 없는 게 신자들에게만 있는 게 있다. 뭔가? 빛이고 생명이고 진리고 십자가고 부활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뭘 할 수 있느냐 하면, 우리만이 용서를 할 수 있고 은혜를 나눌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자꾸만 자기신앙을 비난으로 확인한다.비난으로 확인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았고 헌신과 소원이 있는데 안되더라 말이다. 안되면 어떡하는 수밖에 없냐 하면 다른 사람 흠을 잡는 수밖에 없다. 나도 안됐으니까. 우리 고등학교 때 시험 못 보고는 누구 핑계댔나? 옆집 사는 철수, 걔도 오늘 육십 점 밖에 못 받았다는 거 아닌가. 이렇게 시비를 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 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놓친다.

할 수 있는 기회. 우리만이 웃을 수 있다. 세상은 이해관계로 웃지만, 우리만은 웃을 수 있다. 왜?

우리의 어떤 유익이나 우리의 필요한 것이 사람 손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만이 넉넉한 거다.

우리만이 용서할 수 있다. 왜?

그 웬수 때문에 내가 망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나의 운명과 나의 인생을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한다.

우린 그걸 못한다. 그래서 살살 이제 고쳐나가기를 바란다.

 

공기도 할 때 어떤 교회에서 무슨 예배로 모였을 때 대표기도나 우리 무슨 부서에서 모여서 대표기도 할 때 개인회개를 나열하지 마라. 기도하는 저도 사실은 기도할 자격도 없고 죄덩어리고 지난 한 주간도 매번 안목의 정욕, 이빨가는 정욕 이기기, 그런 거 나열하지 마라. 대표기도를 하는 거다. `하나님 은혜를 더하셔서 우리 열심히 지금 살고 있는 중인데, 우리 마음에도 미흡한 거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내일은 또 멋지게 살려고 합니다. 은혜 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하라.

자꾸 스스로를 이렇게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 흠결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과거에서 오늘로도 못온다.

오늘 할 걸 못하고 자꾸 지운다. 과거를 지운다. 그래서 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건가?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싶잖은가. 다시 가서 다시 잘하고 싶잖은가. 왜? 잘못해서 쓴맛을 봤으니까.

 

●그걸 오늘 쓰라. 오늘. 뭐부터 한다고? 웃으라.

 

신앙이 좋으면 무서운 얼굴이 된다. 그럼 잘못간 거다. 그렇잖은가. 뭘 일일이 정답을 말하겠나? 누가 모르겠는가? 아는데 안돼서 그러는 거지.

편들어 달라고 온 것 아닌가. 그런데 편은 안들어 주고 사방에서 다 째려 본다. 왜? 본인들의 넉넉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감싸 안을 품이 없는 거다.

왜 그렇게 됐다고? 지금 우리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고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 흠을 잡기 시작하면 끝없이 잡아야 된다. 그런데 흠은 아무리 지워도 긍정적인 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긍정적인 건 해봐야 된다. 자꾸 해보라. 오늘은 한 번 했다, 오늘은 두 번 했다, 오늘은 세 번 했다..

'욱' 하려고 할 때 넘어가야 되는 거다. 운전할 때 제일 조심해야 된다. 거 욕 나오는 거 많잖은가. 제일 좋은 방법은 이제 번호를 붙이는 거다. 1번 개ㅆㄲ, 2번 나쁜놈, 3번 미친놈, 4번 쯧, 사연이 있겠지 5번.. 이렇게 내려가는 거다. 하나씩, 하나씩 내려가라.

●말을 바꿔야 된다. 말을 번호로 바꾸고, 번호를 좋은 말로 바꾸라. 자꾸 해보라.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상한 나라이다. 친절하게 굴면 의심한다. 뭐 사러 갔다가도 점원이 너무 친절을 떨면 속는 것 같아서 안 산다. 교회에 와서도 방긋방긋하면 `저게 귀신이 들렸나? 저게 왜 웃어?` 이렇게 된다. 그러면 안된다.

●반가워 해야 된다. 그게 우리 실력이고 기회이다.

 

교회에 와서 못하면 어디서 하겠나? 밖에서 했다간 미친놈 취급당하니까 못한다. 그건 조심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할 수 있잖은가. 그게 뭐 어렵나? '반갑습니다~ 집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린 말을 어떻게 하냐 하면, '아휴, 아직도 살아있구나'

뭔 인사를 그렇게 하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건가?

해 보라. 해서 자꾸 나아지라. 하면 는다. 이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다.

 

로마서 12장 3절에 가면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 하느냐 하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걱정만 하라. 주장은 하지 마라.

왜 내 분노가 정당한지 설명하지 마라. 그냥 안타까워만 하라. `이거보다는 좀 나았으면 좋겠다` 거기까지만 하라.

믿음의 분량대로, 실력만큼, 자기한도 내에서만 하라.

 

그 다음에 잘 보자;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우리 열심히 해야 된다. 주는 게 받는 거보다 낫다. 정말이다.

우리가 재물은 아무나 줄 수 없지만, 사랑은 누구나 줄 수 있다. 부자는 사랑을 돈으로 줘야 된다.

부자가 와서 `나 이거 길에서 삼만 원에 산거야!` 그러면 안된다.. 부자는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으시라.. 그리고 밥값 내세요. 이거 절대 서로 오해하면 안돼요. 그리고 얻어먹는 사람들은 '고맙다' 그래야 돼.! 삐지면 안돼요. 서로 고마운 거예요.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있어야 주는 것이 빛이 나고, 받을 줄 알아야 그 모든 역할들을 다 빛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에 한국교회의 약점이 있어요. 모두가 다 정답 얘기하고, 모두가 다 금식하고, 모두가 다 동일한 일을 하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그래서 모두에 대해서 그 다름에 대해서 그 다양한 자리와 역할과 본분에 대해서 서로 축하해 주지않고 질투하고 비난해요.

질투와 비난이 흠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한테서 뭘 맡겼는지 못 찾아내서 그래요. 못 찾아내면 계속 불만이예요.

나이가 들면 똑 두 가지로 인간이 나뉘는데, 원망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로 나뉘어요.

예수를 안 믿고 감사하는 자는 없어요. 다 원망하죠. 억울해하고요. 예수를 믿어야 감사하는데, 예수 믿는 자 중에서도 감사하는 자는 적어요. 그러니까 광야에서 뺑뺑이를 아직도 돌고 있는 거죠.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죠. 거기서 무슨 훈련을 받고 있는지.

 

더하는 훈련을 하라고요. 더하는 훈련,, 더하는 훈련, 할 수 있는 것! 예수 안에서 본 것, 우리한테 주어진 이걸 하라고요.

 

그게 이제 14절 이하에 아주 극적인 설명으로 되어있어요.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래요.

우는 자리에 가서 정답 얘기하지 말고, 웃는 자리에 가서 초치지 마세요. 아주 중요한 우리의 예의예요.

 

그리고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너희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래요.

전에도 이 예는 한번 든 것 같은데, '벤허'에서 벤허로 나오는 '찰톤 헤스톤'이 멧살라 역으로 나온 '스티븐 보이드'인데, 촬영을 하다가 스티븐 보이드가 대본을 집어던지고 화를 낸 적이 있어요. '나 배고파서 못 해! 나 안 해' 이거 웬수 아녜요? 촬영하다 말고? 그러니까 다들 '저 나쁜 ㅅㄲ, 콱 죽여버리고 딴 사람 씁시다' 그러는데, 찰톤헤스톤이, '야, 멧살라, 가자. 내가 순댓국 사줄께.그걸 하라는 거예요.

 

그 놈이 있어야 주인공 역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저들하고 이렇게 대조되는 거예요. 세상 앞에 뭐가 빛이고, 뭐가 어두움인지.

어두움 뿐이면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뭔지도 대조되잖아요. 여러분이 이걸 하는 거예요.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선을 감동시키거나 회개시킬 생각하지 말고, 악이 악한 일을 볼 때마다 `그래 나는 내 역할해야지` 그러라는 거예요. 선한 역할 하세요.

그 악한 자를 비난하고 꺾고 뒤집어놓고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선한 역할 하세요.

우리의 역할이 뭔지 알아야 되는 거예요.

 

모세가 백성들하고 함께 광야에서 죽는 게 명예였다면, 그것이 오늘 어떤 유산으로, 어떤 유익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느냐?

'거기서 죽고 마는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 많은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고 구름기둥 불기둥을 동원하신 것으로 그들을 거기까지 와서 거기서 실패한 거기서 죽어버린 이 비극적인 영화에서 우리가 받은 것으로 우리가 유익을 안 본다면 나중에 천국 가서 어떻게 모세를 볼 수 있냐?` 이렇게 마음이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나는 모세가 좋아. 이름이 삼삼하잖아` 이런 걸로 때울 수 없다 이거예요.

 

여러분에게 양식이 되고 오늘을 이기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살겠다` 이렇게 잠자리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고,

여러분들의 생애에 나를 누가 대신하겠어요? 내 성격, 내 고집 갖고 내가 사는 거죠. 내 거죠.

`내가 없으면 그만인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존재론적 역사적 임재와 기적을 일으킨다` 그런 자부심과 믿음을 갖고 사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며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굉장한 기회입니까?

회개하다 잊어버린 오늘이 되지 말게 하시고, 더 나아가고 더 나아가는,

주 앞에 은혜를 구하고, 그리고 우리가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스스로 영광의 길, 명예의 길 걸어가는 하루하루가 됨으로써,

이 어두운 세상 앞에 우리가 빚진 것과 생명인 것과 진리인 것이 주 예수의 죽음으로 드러낸 그 사랑으로,

인류와 역사와 우리 이웃들 앞에 소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적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박영선목사, 하나님의 사람 모세, 2020합신인천노회제직세미나 1, 202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