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설교메모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세상이 줄 수 있는 이 가장 최고의 고통 속에 들어가라고 하신다

nazunzaro 2020. 2. 12. 06:55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아버지를 알려면 나를 알아야 된다, 나를 믿어야 된다`

이렇게 말하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니 이 문제, 그가 이런 기적을 이루시고 어찌보면 맥없이 죽어버리고 마는 이 생애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냈고, 내가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따라왔고, 그리고 너희가 모르는 하늘의 진리를 나누고 구원을 하러 왔는데'..

왜 죽음으로 끝나는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실 필요도 없이, 하늘에서 구름을 이렇게 쓱 반으로 나누시고 '이놈들,'그렇게 하면 악당들은 다 죽고 이제 천사들만 살아남고.. 그렇게 하면 쉬웠을텐데 굳이 아들을 왜 보냈을까?

또 그 아들은 와서 왜 당신이 성자 하나님으로서, 창조와 심판의 주인으로서, 세상의 역사를 쥐고있는 권세자로서, 많은 증거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오병이어, 나사로의 죽음을 살려낸 것, 바다를 잠잠케 한 것.. 그 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죽어야 했던가?

`왜 아들을 보내셨는가? 그 아들은 왜 죽었는가?`

 

예수께서 오셔서, '나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그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다. 나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나는 죄도 용서할 수 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를 져야한다' 라고 그의 생애를 마치신 부활로 그 모든 것을 뒤집으신 그의 생애, 그의 정체성,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하나님 당신의 당신에 대한 증명, 구원에 대한 증명,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성경적 설명은 뭔가?

 

빌립보서 2장에 의하면; 이 방법, 십자가에 죽는 방법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란다.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아주 완벽하게 승복하신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는 이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증명을,

우리 동시대의 율법사들이 혹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들어서 폭력밖에 결과시키지 못한 것과 대비되어서, 자신들의 지위를 공포와 권력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서,

● 하나님은 그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뜻을 온전히 승복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는 본체시나 하나님과 등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태로 인간으로 나타나사 죽기까지 복종하는 이 기꺼운 항복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증명하신다.

 

이 하나님 아들의 승복을, 우리 보통하는 그의 헌신 그의 희생 윤리적 최고의 희생이라는 단어로 가치로 쓰지 말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항복을 보라.

 

그 아들의 항복으로 자신을 증명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기로 했을 때, 그의 구원이 아들의 항복이 있었던 것처럼,

● 신자들의 항복에 의해서 모든 세대와 역사의 결국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동참으로 결과된다,라고 얘기하고 싶은 게 요한복음인 것이다.

 

여기가 우리가 헷갈리는 부분이다. 왜 그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죽느냐 이거다.

죽음으로도 그 폭력을 감수하여, 창조와 심판에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영광의 하나님을 담아내는, 그것으로 이것을 훼손하지 못하는 그런 자리까지 예수님이 들어가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은 항복할 만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정말 다른 분이시다. 예수를 보라` 이렇게 된 것이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를 따라오라' 이렇게 된 거다.

우리의 기도는 얼마든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 수도 있고,

●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받는 고난들을, 이 세상의 무지와 폭력과 죄악들을 얼마든지 감수하고 다 삼켜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일에 네가 참여하라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거다.

 

사도 바울은, '지금 원래 우리가 알고있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자리에까지, 또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일에 예수님이 그러신 것같이, 내가 복음을 들고 나갔을 때 저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온갖 험한 고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다

 

●교회란,(기독인으로서 타인과의 만남은, 삶은) 신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여기는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믿음(섬김 관용 온유 겸손의) 공동체이다.

힘을 가지지 않는데 (기독인의 섬김과 용서,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님이 일을 해서, 말하자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힘에 의한 승리, 힘에 의한 명분을 다 깨신다.

왜 깨냐고? 그것보다 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장 강한 힘보다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타령을 하면 사랑이 되는 게 아니라, 힘으로 하는 문제를 우리가 극복해야 된다.

 

● 우리는 힘에 의한 손해를 보는 것으로 원망을 하면 안된다. 원망을 하지 마라가 아니라, 힘을 가져서 누구를 울려서 승리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누구를 지옥에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다시 해 보자.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게 영광이라고 한다. 이 고난이.

 

●이 세상이 겁내는 고난, 슬픔, 아픔, 절망, 죽음 앞에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그런 것들이 최고의 권력이지 않다,고 하는 일에 나를 쓰신다.

 

그것이 예수의 오신 이유였고, 예수를 통하여 아들을 통하여 받으시려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었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들에게 영광과 기쁨이었고, 우리 인생에도 예수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명예이다, 이렇게 선언하는 거다.

 

이걸 인상을 쓰고 설교를 해야 된다는 건 비극이다.

그러니 우리가 뭘 넘어서야 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다. 힘의 논리, 승부의 논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당장 이 말이 생각이 날거다;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

● 그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는 우리가 절벽 앞에 선 것 같다. '여기에 발을 내디뎌라'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모든 안심과 만족이라는 그 허구를, 그 기만을, 그 공포를 넘어서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그 다음에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천국으로 불러가거나 더이상 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어려움과 죄악된 것과 관계없는 자리로 갈 것으로 기대가 되는데,

바울이 깨달은 것은,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동참하여 부활로 가는 그 과정을 받아들이는 그의 고백은, 우리 조금 전에 얘기한 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육신을 이해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국가에 공헌이 많으면 `경`이라는 존칭을 쓰게 해준다. 명예로운 호칭을 준다. 아무아무개 `경`이라는 말을 쓰는데, 영어로는 그냥 `Lord`이다.

그런데 이 일은 제일 쉽게는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한 어떤 군인들이나 또는 예술가에게 주는데, 그 연극배우들에게도 준다. 세익스피어의 극을 최고로 치고, 거기에서 주연을 가장 잘한 사람들에게는 이 경칭을 준다. 세익스피어 연극 중에 이 경칭을 받을 만한 작품은 그 '4대 비극' 이다. 오셀로나 리어왕이나 멕베스나 햄릿이라 하는데,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연기를 잘하면 이 경칭을 주는데, 거기의 주인공들은 참으로 비참한 생애를 사는 거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 들어가는 역을 해야되는 건데, 그 역을 제안받는 것부터 명예다. 그렇게 살라는 것 아니고 연극이다. 최고의 배역이다. 아무에게나 주겠는가? 그걸 하려면 정말 내면의 연기, `인간과 인간영혼의 고통`에 관한 어떤 이해가 없으면 할 수가 없는거다

 

●● 이것이 명예인 것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이 가장,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속에 들어가라고 한다.

왜 그러나? 그런 깊이까지 들어가야 반전이 그만큼 올라온다. 다 살면서 경험했다시피, 형통하면 뇌가 녹이 슨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살게 해 주세요` 그러는 것은 성육신을 거부하는 거다. 인간은 생각을 해야 되고 고통에 몸부림쳐야 고통이 주는 공포와 범위를 벗어난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한사람이 누구를 향하여 웃는다는 것은, 철이 없을 때 웃는 것하고 이런 경지에 들어간 웃음하고는 다른 거다.

다르다. 애들이 그런 모습을 가지면 안된다. 애들 때야 동심이 괜찮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난 진심이야'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안된다. 그게 차라리 주름살로 나와야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이 하는 얘기,`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증거하듯이,

예수가 증언한 것이 우리 것이 되게 하는 이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아,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과 진리와 승리를 담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 우리가 이 배역에 동참하고 있다`를 아는 것은 대단한 기쁨(Joy)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가면 이 말이 여기에 멋지게 설명되어 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그 연합, 긴밀한 그 관계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친히 그의 권세로 권력으로 창조와 심판의 주인으로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

우리의 거부와 반대와 우리의 왜곡과 기만과 부패와 적대를 다 감수해야 하는 이 일을,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감수하는, 아버지에 대한 승복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고통의 적대적인 환경 현실 역사 속에 들어와 아버지의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그것을 아버지의 사랑이 생명으로 누려지는 기쁨 명예로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생애를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자리에 우리로 함께 와 하나가 되자 그러신다.

 

하나님은 우리 보고 신이 되자고 부르신다. 관계에서 그렇게 부른다. 사랑하는 일에서는 신과 인간이라는 차별이 깨진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존재가 가져야 할 정체성, 신분과 지위의 명예, 그리고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 오늘의 정황 거기서 뭘 봐야 되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타협하자는, 타협하지 않으면 너 죽여버리겠어,라는 죄와 악의 권세의 도전을 직면하는 거다.

그걸 뚫을 수 없으면 예수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모든 것이 해결되고 마는 것, 주문만 외우면 되고 마는 것, `나는 너보다 더많이 가졌어. 나는 재능도 힘도 너보다 우위에 있어` 라는 우열의 개념, 승부의 개념 외에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거다. '그런 짐승의 세계, 동물의 왕국에서 벗어나라. 너는 내 자녀다. 위대한 인생을 영광된 존재가 되어라'

 

이걸로 매일매일 도전하신다. 한꺼번에 안된다. 시간 오래 걸린다. 35년이나 같이 하고도 표정이 변한 게 없다. 그러나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우리도 같이 잃지 않고 있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롭다.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끝까지 붙잡고 놓지않으시는지 두렵고 기이한 그 능력으로 도망가지 않겠다.

이 부끄러운 자신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바로 그 지극한 권능으로 우리 인생을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

 

*다보요16